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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우미 Aug 25. 2020

결혼이란 아이러니

정세랑 작가의 <웨딩드레스 44>를 읽고

결혼이란 아이러니

정세랑의 <웨딩드레스 44> (<옥상에서 만나요> 수록) 를 읽고


  몇 년 전만 해도 결혼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막연히 먼 미래라고 생각했고,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결혼해 살아가고 있으니 할 만한 일이겠거니 했거든요. 비혼이 국내에서 주요 여성주의 의제가 된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죠.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만나 함께 살기로 결정하는 일이니만큼 결혼은 분명 개인적인 서사와 선택이 얽힌 일이지만, 여자에게 결혼은 결코 개인적인 선택이 될 수 없는 아이러니한 이벤트입니다. 결혼을 하면 필연적으로 불행해질 수 밖에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만큼 결혼을 할 때 여자의 인생에 개입되는 요소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입니다. 왜 유독 여자에게 결혼은 온전한 개인의 재미나 삶의 방식이 될 수 없는 걸까요?

  정세랑 작가의 단편 <웨딩드레스 44>는 마흔 네벌의 웨딩드레스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웨딩드레스는 낭만적 로맨스라는 개념의 대표적 상징으로 쓰이곤 합니다. 그런데 첫번째 웨딩드레스를 입어본 여자가 하는 말이 마치 앞으로 이 단편이 무엇을 보여줄지 선언하는 것 같아요.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드레스를 입고 나올 때 특수효과 넣어주잖아요. 갑자기 더 예뻐 보이게. 그거 거짓말인 거 알고 있었지만 정말 아무 효과 없네. 그냥 나네요."


  낭만이라는 특수효과를 뺀 결혼 이야기. 이 이야기를 읽다가 개인적으로 위에서 던진 질문(왜 여성에게 결혼은 개인적인 선택이 될 수 없는가)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하는 구절을 읽었는데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기본적으로 잔잔하게 굴욕적이야" 라는 문장이었어요.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기본적으로 잔잔하게 굴욕적이야. 내 시간, 내 에너지, 내 결정을 아무도 존중해주지 않아. 인생의 소유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간 기분이야."


 여기서 말하는 굴욕감이란 무엇일까요. 굴욕감은 물리적으로 위력을 휘두르는 상대방에게 설설 기며 복종할 때만 느껴지는 감정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갑의 위치에 존재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존재하기 때문에 자꾸만 나의 선택에 대해 그에게 구구절절 설명하고 이해시켜야 할 때 사람은 굴욕감을 느낍니다. 내 선택을 존중한다는 누군가의 말에 감지덕지 고마움을 표해야할 때, 수면 밑에 깔린 권력 관계를 느끼고 마는 것이죠.


 학부생 시절 현대문학을 배우며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근대적 자아의 형성'과 관련된 것이었어요. 현대 소설과 그 이전을 나누는 기준 중 하나가 근대적 자아의식의 여부인데, 이때 근대적 자아란 자신을 둘러싼 타인이나 공동체와 자신을 구별짓는 개별성을 지닌 주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관습을 뛰어넘어 개성을 발견하기 위해 문인들은 자유 연애라는 개념을 꿈꿨습니다.


그런데 남성 작가들은 이와 같은 자아 각성의 과정에서 '나'에 대한 입증이나 설명을 요구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나'와 함께 낭만적 사랑을 나눌 '너'를 찾고 묘사했죠. 그들은 결코 본인의 존재를 독자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지만 여성 작가는 자신이 가정에 속한 부녀자가 아닌 사회적 주체라는 것부터 말해야 했습니다. '나'가 어떤 사람인지, 여학생이란 뭔지, 신여성은 어떤 존재인지... 그들에게 최선의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해야 합니다. '너'를 찾기 전에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부터 해야되는 상황이죠.


 이런 끝없는 해명의 필요성은 기실 외부에서 여성을 이미 어떠어떠한 존재라고 규정하고 있기에 생겨납니다. 결혼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문제가 아니야. 내가 제도에 숙이고 들어간 거야. 그리고 그걸 귀신같이 깨달은 한국사회는 나에게 당위로 말하기 시작했지." ...(중략) "모두가 나에게 '해야 한다'로 끝나는 말들을 해. 성인이 되고 나서 그런 말 듣지 않은 지 오래 되었는데 대뜸 다시."

 

작가가 말하듯, 결혼한 여성이 수행해야 하는 가치와 의무는 개인이 선택하기 전에 "이미" 규정되어 있고 그것은 기혼 여성에게 당위로 돌아옵니다. 아무리 좋은 시댁, 좋은 남편이라도 결국 그들도 나의 선택, 나의 결정을 앞선 그 문제의 '당위'를 알고 있죠.


- 너는 왜 남편 아침밥 안차려줘?
- (내 결정이니까) 아.. 아침에 남편이 먼저 일어나고 더 요리를 잘하니까... 구구절절..
- 아~ 그렇구나. 좋은 남편이네^^ 이해할게.


- 이번 추석에 어머니집 가야하는거 알지?
- 아.. 근데 낮 세시까지는 돌아와야 돼 내가 할 일이 있고.. 그 다음 날 우리 엄마 집에도 가야돼서 에너지를 아껴야 돼.. 너네 엄마 집 갔으면 우리 엄마 집도 가야지.. 구구절절..
- 그럼 갔다가 최대한 빨리 오자!
- 응 이해해줘서 고마워 (내가 왜 고마워 해야하지?)


 그 당위를 느슨하게 해주는 것에 대해 고마움을 느껴야하는 굴욕감. 누군가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굴욕감이겠죠. 남성들에게 결혼이란 이미 단단히 성립된 자아를 표출하게 해주는 자유 연애의 마지막 과정이자 로맨스의 결실인데 여성들에게 결혼은 또 다시 나의 시간, 나의 결정, 더 나아가 자신의 존재 자체를 끝없이 설명해야하는 가부장적 굴레인 것입니다. (bgm;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이 단편을 읽으며 이 굴욕감이야말로 결혼의 숨길 수 없는 분명한 본질이라고 생각했어요.



  마흔 네 벌의 웨딩드레스에는 외국인과의 결혼,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해야만 하는 동성애자, 비혼을 다짐하며 오래 동거를 해왔으나 결국 결혼을 선택하게 된 커플 등 다양한 사연 또한 존재합니다. 이 이야기들을 통해 작가는 가부장제와 가까운 제도라는 결혼의 면면 뿐만이 아닌 우리 사회에서 "주변인"으로 취급하는 이들이 결혼과 관련해 맞닥뜨리는 상황 또한 조명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 선택하는 행사가 결혼인데 행사의 준비 과정과 의례에는 수많은 외부 권력이 개입되고, 누군가는 결혼이라는 선택에서조차 소외됩니다. 결혼은 분명 개인의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상대, 재정상태, 나이, 혼례 방식에 대해 사회에서 규정하고 인정하는 기준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낭만으로 포장되지만 여성이 몸을 끼워맞추며 입어야 하고 그 후엔 커피 한 잔도 맘껏 즐기지 못하는 답답한 웨딩드레스가 이를 잘 표상하고 있죠.


  가장 개인적인 선택, 동시에 “메이저(!)한 인생"의 상징이자 수단인 결혼의 아이러니함에 대해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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