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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이 Jun 27. 2022

물이 무슨 죄길래?

살아있는 것에 대한 감각과 페미니즘

얼마 전, 한 배우가 한 가수의 콘서트에 대해 트윗을 남겼다가 여러 사람의 입방아에 오른 사건이 있었다. 콘서트에서 물 300톤을 사용하게 되어있는데, 현재 소양강이 마를 만큼 다른 지역은 가뭄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현실 자각에서 올린 트윗이었다. 이 트윗 한 개를 두고 "네가 뭔데 돈 주고 쓰는 물에 대해 뭐라고 하냐", "그럼 네가 찍는 드라마에서 쓰는 물도 아까우니 쓰지 말아라" 등의 비난이 온라인 세상을 뒤덮었다.


대표적인 반응 두 가지에 대해 차근차근 살펴보자. 먼저 "내 돈 주고 산 물 내가 쓰니까 신경 꺼"라는 말은 소비자본주의의 본질을 관통하는 문장이다. 소비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의 소유자는 어떤 재화나 서비스가 '교환가치'를 지닌다면 그것을 구매하거나 판매하거나 교환할 신성불가침의 자격이 있다. 자본만 있으면 소위 '내 것은 내 것, 너의 것도 내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자본의 교환만이 신성시되는 사회에서 도덕, 생명윤리 등은 무시받거나 귀찮은 것쯤으로 축소된다. 내가 힘들게 벌어 엄청난 경쟁률의 온라인 티켓팅을 뚫고 기어코 쓰게 된 나의 돈에 살아 있는 다른 존재의 가치 따윈 끼어들 틈이 없다. 물? 가뭄? 그런 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타인의 생명보다 일요일 저녁 오랜만에 친구들과 방방 뛰어 놀 기회가 더 중요하다. 그러니 만나지도 못해본 어느 배우가 쓴 온라인 문장 하나가 얼마나 화가 나겠는가. 마치 나한테 "너는 놀 자격이 없어"라고 하는 것 같겠지. 그래서 불쑥불쑥 튀어 오르는 마음속 분노가 "네가 뭔데?"라는 악플로 쏟아져 나온다.



그러면 "네가 찍는 드라마에서 쓰는 물도 아까우니 쓰지 말라"는 반항(?)은 어떨까? 이것만큼 단순하고 유치한 반응이 어디 있을까? "우리 아빠가 더 잘 났어"식의 다툼이나 "우리 집이 너네 집보다 더 커"처럼 맥락도 없고 의미도 없고 사회적 효용성도 없는 미성숙한 문장일 뿐. 아 집 이야기는 조금 다른가? 아냐 결국 위계를 나눠서 무시하는 태도는 변함이 없으니 마찬가지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는 가부장제와 결탁하여 시스템이 책임져야 하는(그래서 누군가는 죽어야 하는) 위험과 위기를 외주화 시켰다. 아동 노동, 노인 돌봄, 여성 차별, 성소수자 박해, 장애인 억압, 흑인 노예, 원주민 추방, 공장제 동물 사육 등등. 자본의 이름으로 실행됐던 수많은 '2등 시민과 그 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은 '1등 시민'을 위해 기꺼이 눈 감고 귀 막을 수 있는 것들인 셈이다.


난 이 부분에서 300톤 물에 대한 걱정을 내비쳤던 배우의 말에 심히 공감한다. 그의 트윗은 단순히 "물이 아깝다"기보다 "꺼져가는 다른 생명에 관심을 갖자"의 차원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그 외침은 페미니즘적이다. 기울어진 운동장과 권력의 불균형으로부터 나오는 차별과 폭력을 종식시키려는 운동 또는 사상. (괜히 에코-페미니즘이 있는 게 아니다.) 유래 없는 가뭄과 고온 현상에 대한 진심 어린 우려는 페미니즘의 렌즈로 세상을 바라본 이가 쓸 수 있는 가장 짧고 간결한 문장에 담겨 있다. 나도 한 번 써보련다. 워터밤 콘서트 물 300톤 소양강에 뿌려줬으면 좋겠다. 한 방울도 남김없이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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