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전교차로와 감수성과 정의에 관한 이야기
오래 전 영국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일정이 많고 일행이 여럿이어서 현지에서는 승합차를 빌려 이동하기로 했습니다. 외국에서, 더욱이 자동차가 오른쪽으로 다니는 나라에 사는 사람이 별안간 왼쪽으로 운전하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모두들 겁내고 꺼려하는 통에 어찌어찌 기사 역할을 맡았습니다. 대신 한명이 전담으로 조수를 하기로 했습니다. 조수가 할 일은 내비게이션을 보고 큰 소리로 좌회전, 우회전을 알려 주는 것이었습니다. 헷갈리지 않게 방향을 잘 알려준 조수 덕분에 복잡한 런던 시내 뿐 아니라 한적한 교외에서까지 긴 여정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운전하는 내내 인상 깊었던 건 회전교차로였습니다. 교통량과 보행자가 많은 도심 한가운데가 아니라면 웬만한 교차로는 회전식이었습니다. 회전교차로에서는 차나 사람이나 텅 빈 도로를 바라보며 신호가 바뀌길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선순위에 따라 교차로에 들어갔다 원하는 방향으로 빠져나가면 됩니다. 신호등을 설치하고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막대한 예산도 아낄 수 있습니다. 보행자가 있으면 ‘무조건 멈춤’이라는 대원칙과 ‘회전차량 먼저’라는 우선순위만 잘 지켜진다면 사고 날 일 없고 시간과 돈 모두를 절약할 수 있는 일석삼조로 보였습니다. 꼬박 1주일을 운전하면서 ‘이 좋은 걸 우리는 왜 안할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2015년 초의 일입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드물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영국을 다녀 온 후로 우리나라 도로에 회전교차로가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도로 정비와 맞물려 새로 조성되는 교차로는 하나 둘 회전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신호대기 없이 매끄러운 흐름에 차를 맡기며 ‘어째 내가 생각만 해도 바뀌지?’라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전부터 시작된 흐름이 그제사 눈에 띄었는지도 모릅니다. 순서야 어찌됐건 사회경제적 비용이 줄어드는 방향으로 도로 행정이 바뀌는 걸 반갑게 바라봤습니다.
얼마 전이었습니다. 교외 회전교차로에 들어서는데 아내가 말합니다. “누구누구는 회전교차로만 나오면 땀을 뻘뻘 흘린데. 줄줄 이어지는 차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고 나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끼어들라고 공간 내주는 차도 없고. 아주 힘들다고 하던데, 당신은 괜찮아?” 아내가 말하는 ‘누구누구’는 50대 여성 운전자입니다.
회전교차로가 어렵다니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아차 싶었습니다. 도로에서 맞닥뜨리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대처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같은 상황이라도 누구는 어렵고 누구는 쉽습니다. 능숙한 운전자에게 회전교차로는 효율적이고 편리합니다. 반면 누군가는 삼색 신호등이 두 눈 부릅뜨고 지켜주는 반듯한 네거리가 안전하고 편리합니다. 양 쪽 모두 ‘편리’를 말하지만 내용은 상반됩니다. 보행자 역시 갈립니다. 젊고 재빠른 축이야 신호등 없이 언제든 손만 들면 건널 수 있는 회전교차로를 선호할 테고, 한편에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신호등의 보호를 받으며 마음 놓고 건너는 걸 좋아하는 쪽이 있습니다.
회전교차로를 반긴 데는 중년 남성의 시선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운전 경험이 많고 자동차 조작에 능숙해 회전교차로를 드나드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신호등이 설치된 텅 빈 교차로에서 초록불이 들어오길 기다리는 시간이 마냥 지루합니다. 사회경제적 비용을 들먹이고 효율성을 따집니다. 평소 3, 5, 7로 제한속도를 낮추고, 육교를 허문 자리에 횡단보도를 설치하는 걸 잘한 일이라고 말해왔습니다. 자동차 보다는 보행자가, 속도보다는 안전이 먼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전교차로를 어려워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섬세하지 못했습니다.
감각이 예민하거나 섬세한 사람을 두고 ‘감수성이 풍부하다. 감수성이 예민하다’고 합니다. 반대로 감수성이 낮거나 둔한 사람도 있습니다. 감수성(感受性)은 ‘외부 세계의 자극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성질(네이버, 국어사전)’입니다. '유기체가 내외계의 자극변화를 수용하는 능력(네이버, 문학비평용어사전)'으로 풀이하기도 합니다. 외부 자극을 받아들이는 방법이나 그 정도, 즉 감각의 예민함이 감수성입니다.
회전교차로에 관한 내 감수성은 둔했습니다. 운전에 관한 한 강자로서 소수자의 입장에 생각이 미치지 않았습니다. 내가 편하다고 남들도 다 그럴 거라고 지레짐작했습니다. 여기서 강자와 소수자는 개인으로서 힘이 세냐 약하냐 혹은 숫자가 많으냐 적으냐에 따른 게 아닙니다. 지배 이데올로기와 규칙을 생산하고 강제하는 그룹에 속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정책과 제도를 만들 때 기준으로 삼는 대상에 속하느냐 아니냐에 따른 구분입니다. 교통시스템에 관한 한 성인 남성은 어느 모로 보나 강자입니다. 반대로 회전교차로에 들어갈 때마다 손에 땀을 쥐는 모모 씨 혹은 아내가 언급한 누구누구는 소수자입니다.
감수성이 풍부하다고 해서 모든 자극에 똑같이 열려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감수성은 대개 꾸미는 말과 함께 쓰입니다. 성 차별과 불평등을 날카롭게 짚어내는 ‘성인지 감수성’, 인권을 침해하는 제도와 관행을 어물쩍 넘기지 않는 ‘인권 감수성’이 그렇습니다. 보행자와 어린이, 초보운전자 중심으로 교통체계가 바뀌는 건 이들의 불편과 위험에 좀 더 세심해진 까닭입니다. 반면 이동권 확대를 주장하는 장애인 단체의 지하철 시위를 불법으로 몰아가는 공권력이나 이들을 민폐집단이라고 비난하는 댓글에서 알 수 있듯이 장애인 이동권에 관한 일부의 감수성은 여전히 낮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의 감수성도 있습니다. 이른 새벽 풀잎에 맺힌 이슬을 보고 미소를 짓는다거나 도심의 북적이는 분위기 속에서 흥분지수가 올라가는 경우입니다. 내가 감각적으로 무엇에 반응할 지는 오롯이 내게 달렸고 그 영향은 나에게 국한됩니다.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성향 혹은 선호 문제인 이런 경우를 제외하면 사회적 감수성이 남습니다.
사회적 감수성은 사회 문제에 관해 내가 반응하는 정도입니다. 사회적 이슈에 관한 나의 감수성이 모여 사회 전체의 감수성이 되고, 사회와 국가는 이것에 근거해 선택을 합니다. 나의 선호와 감수성이 결과적으로 나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회전교차로가 늘어나는 건 소수자의 ‘안전한 편리’보다는 나 같은 사람의 ‘효율적인 편리’에 반응한 결과입니다. 최근 헌법재판소가 합헌 결정을 내린 ’민식이법‘은 아이들이 어린이 보호구역에서만큼은 더 철저하게 보호받아야 한다는 공감대에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사회적 이슈에 관한 내 감수성, 즉 사회적 감수성은 사회적 선택의 기초입니다. 이 질문은 결국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나아가 ’정의(正義)란 무엇인가‘로 귀결됩니다.
무엇을 정의로 볼 것인가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다만, 각자의 정의 개념에서 공통분모를 하나씩 뽑아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기준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로 조화(調和)입니다. 정의는 혼자가 아니라 여럿에 관한 문제이고, 입장과 처지가 다른 여럿이 서로 잘 어울리는 것이 조화이기 때문입니다. 조화의 의미는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을 통해 좀 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우주는 물, 불, 공기, 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4원소가 비슷한 힘으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조화로운 상태이자 정의입니다. 불의란 어느 한 쪽이 강하거나 약해 균형이 무너지는 것이고, 불균형하게 센 것을 줄이고 미약했던 것을 복구하는 것으로 정의는 회복됩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정의란 영혼이 조화로운 상태였으며, 인간 뿐 아니라 우주 자체가 영혼을 갖고 있는 하나의 실체였습니다.
짧은 문장 몇 개로 정의를 정의(定義)하는 건 가당치 않습니다. 더군다나 우주와 인간사회가 애초에 조화로운 상태였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균형이 무너지더라도 원형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사고방식에서 그리스인의 낙천적 성격을 읽어내기도 합니다. 어쨌건 우리는 지금 수많은 불균형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정의롭고 조화로운 상태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회전교차로처럼 가벼운 불균형도 있지만, 대부분 묵직하고 광범위한 사안입니다. 다단계식으로 층층이 계층화된 산업구조와 거기에 예속된 노동의 서열화, 제도와 관행 심지어 언어생활에 깊게 뿌리박힌 성차별, 지역간 계층간 천차만별인 의료서비스, 경제력에 따라 극명하게 갈리는 교육 환경, 빈곤의 대물림, 심지어 사회적 지위와 권력 앞에 무너지는 법 앞의 평등 등 눈 가는 곳 어디에서도 불균형은 쉽게 찾아집니다. 워낙 공고하고 광범위하다 보니 늘상 그런 건가 싶기도 합니다.
“소수자들의 저항으로서의 정의”
불균형 해소와 균형의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넘치는 데서 덜어 내 모자라는 곳에 채우는 것이 정의이고 조화를 이루는 길입니다. 철학자 이정우 교수는 말합니다. “오늘날 ~ 소수자들은 사회에서 핍박받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정의론은 타자들/소수자들로부터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사회는 애초에 부정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고, 한 시대, 한 사회의 부정의는 바로 타자들/소수자들에게 구현되어 있기 때문이죠. 타자들/소수자들은 그들이 부정의를 구현하고 있다는 그 점에서 정치적인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정치라는 것이 살아 있는 현장이 되는 것이죠(「개념-뿌리들」그린비).” 그리고 이것을 “소수자들의 저항으로서의 정의”로 정리합니다. 우리의 감수성이 향해야 할 지점 역시 이곳입니다. 모든 영역에서 모자라는 곳을 세밀하게 살피는 방향으로 감수성을 발현시킬 때라야 그곳에 더함을 더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균형과 정의를 세우는 길입니다.
검사가 대통령이 되더니, 곳곳에 검사들이 자리를 잡습니다. 중요한 자리를 모두 검사들로 채울 기세입니다. 군사독재 시절, 많은 군인들이 군복을 입은 채 혹은 군복을 벗자마자 정치하겠다고 나섰던 것과 비슷합니다. 일사불란한 명령체계와 폐쇄적인 조직문화에 익숙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정치판에 뛰어든다고 정치가가 되는 건 아닙니다. 더군다나 특정 집단이 한꺼번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이력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공감을 기초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갈등을 해소하는 정치의 기본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집단으로서 그들의 감수성은 그들 자신과 그들을 배출한 집단에게만 열려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소수자를 향해 조금씩 열려가던 사회적 감수성을 ‘법치’라는 이름으로 틀어막아 버립니다. 불균형을 심화시키는 조치들이 연이어 터져 나옵니다. 스스로를 쇠창살에 가두면서 “이대로 죽을 순 없지 않습니까?”를 외치는 하청 노조를 압수수색하고 470억 원이나 되는 손해배상소송으로 목을 조릅니다. 보편의료를 위해 보장성을 강화해온 건보정책의 폐기를 선언합니다.
법에 의한 지배, 즉 ‘법치’는 국민의 권리이자 요구이지 권력을 쥔 자들이 쓰는 말이 아닙니다. 공권력을 휘두르면서 법치를 외치는 건 법을 무기로 삼아 폭력을 휘두르는 것에 불과합니다. 법 앞의 평등 역시 형식적 평등이 아닙니다. 애초에 불균형한, 그래서 부정의한 상태를 바로 세울 수 있게 법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걸 전제합니다. 공공정책과 복지정책의 목적이 바로 실질적 평등입니다. ‘세금 먹는 하마’ 운운하며 공공의료원 폐쇄를 주장하는 건 그래서 나쁩니다.
“서 있는 곳이 다르면 풍경이 달라지지.” 웹툰과 드라마 ‘송곳’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입니다. 누구나 처지에 따라 입장이 갈립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를 주무르고 권력을 흔드는 사람들이 입에 올려서는 안 될 말입니다. 자기가 선 자리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보겠다는 뜻입니다. 입장이 다르다고 진실을 호도하는 건 곤란합니다. 내 발바닥이 딛고 선 땅이 녹았다고 봄이 온 건 아닙니다. 산등성이 어딘가에 집채만 한 얼음 덩어리가 버티고 있는데, 눈앞에 풀잎 하나로 혼자 봄 타령 하는 건 미욱한 짓입니다.
“서 있는 곳을 바꾸면 다른 풍경이 보인다”
송곳의 대사를 비틀면 다른 뉘앙스의 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서 있는 곳을 바꾸면 다른 풍경이 보인다.” 지금껏 서 있는 자리만 고집해 거기에 메일 것이 아니라 옆으로 한 발짝 비켜서면 다른 세상이 보입니다. 같은 자리라 하더라도 방향을 살짝 틀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비켜서기와 방향 틀기는 그쪽으로 나의 감수성을 열어젖히려는 시도입니다. 그쪽 세상을 내 안에 받아들겠다는 제스처입니다. 그쪽은 다름 아닌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부정의가 구현되어 있는 소수자와 약자들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