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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연 Mar 30. 2023

봄맞이

노루귀의 안녕과 봄나물 한상

예로부터 하늘의 봄은 음력 정월에 시작되고, 땅은 2월부터라고 합니다. 윤 2월이 시작된 지난 주말, 텃밭과 비탈 여기저기에는 온갖 풀들이 선발대를 내보내 드디어 살 만한지 탐색합니다. 먼 산 눈은 하마 녹아 골짜기로 찬물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는지, 공기 중에 수분은 풀잎에 이슬을 앉힌 다음 땅바닥에 또르르 굴러 떨어질 만큼 넉넉한지, 겨우내 딱딱하던 땅은 세상여린 새순이 껍질을 긁히거나 부러지지 않고 새살을 온전하게 밀고 올라올 만큼 포슬포슬한지 두루두루 살펴야할 선발대는 정찰 임무는 내팽개치고 햇빛과 바람과 봄기운을 제 먼저 먹겠다고 분주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이른 봄 새 풀들은 버드나무에 핀 복슬강아지 마냥 통통하고 폭실해 눈길만 닿아도 봄볕에 일렁이는 아지랑이처럼 푸근합니다. 어른 풀이 되면 독성을 내뿜는 풀들도 애기애기한 이때만큼은 땅의 향기만 그윽하게 품고 있습니다. 그저 맛있고 이로운, 그래서 고마운 먹거리입니다. 나와 아내의 봄날 역시 땅의 봄이 무르익을 즈음, 그러니까 마당과 텃밭과 들판이 봄풀로 색깔이 바뀔 때 시작됩니다. 


점심을 먹고 느지막이 호미와 칼을 챙겨 나섭니다. 괭이질 한번 삽질 한번 하지 않고, 거름 한 움큼 내지 않은 공짜 식재료가 지천입니다. 찬바람과 묵직한 눈과 살을 에는 별빛이 엄하게 길러낸 나물을 조심스레 캐고 도려내고 꺾습니다. 하나씩 담다보니 한식경 만에 플라스틱 바케스가 넘칩니다. 흙을 털어내고 찬물에 철푸덕 철푸덕 요란하게 헹궈냅니다. 잠시 물기가 떨어지질 기다렸다가 일없이 딸려온 검불과 묵은 이파리를 다듬으며 흙과 풀의 향기를 다시 들이킵니다. 거친 전처리를 마친 재료를 아내에게 건네주는 것으로 역할을 마치고 서둘러 얕은 산행길에 나섭니다. 지난해 발견한 노루귀 서식지는 그간 안녕하신지, 멧돼지 등쌀은 무사히 비껴갔는지 궁금해 더는 버티기가 힘들었습니다. 


노루귀(2022.4.2)

잰 걸음을 놀려 군락지 발치에 다다랐습니다. 이쯤에서는 어른거리는 꽃 그림자가 보일법도 한데 도무지 눈이 부시지 않습니다. 덜컹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기어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입니다. 그러고도 코끝을 땅에 처박고 가는 눈을 더 가늘게 좁혀 시신경을 한곳에 모으고서야 외가닥으로 가느다란 꽃대가 꽃을 지운 채 길게 늘어져 숨을 고르고 있는 게 보입니다. 주변에는 희거나 푸르스름하거나 연분홍한 낙화가 드문드문 점점이 뿌려져 이미 노루귀의 꽃시절이 저물고 있음을 증언합니다. 님의 무탈을 확인한 나는 안도감으로 기뻐하고, 처연하게 빛나는 꽃잎과 우아하게 흔들리는 꽃대와 작은 몸으로 겨울을 밀어내는 장한 기세를 놓친 나는 아쉬움으로 맥이 풀립니다. 한참동안 엎드려 양쪽 눈에 눌러 담고 가슴을 벌려 꼭꼭 채우고선 뒤돌아섭니다. 다음 번 만남까지 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샤워를 하고 드디어 아내의 봄나물 한상을 마주합니다. 머위꽃쌈장, 원추리나물, 민들레초무침, 머위나물, 삼나물(눈개승마), 깻잎장아찌입니다. 사진 밖에 있는 마른 김과 깻잎을 제외하면 모두 낮에 밭과 비탈에서 얻어 온 재료에 아내의 수고가 더해졌습니다. 하나같이 황후의 찬을 놓고 우열을 가리는 건 어리석지만 그래도 굳이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머위꽃된장입니다. 적당한 간기와 고소함이 앞서고 그 뒤로는 놀랍게도 꽃향기가 따라옵니다. 그릇 밑바닥에 따로 숨겨진 공간이 있어서, 그곳에서 시나브로 끝물을 향해가는 매화꽃향기를 뿜어내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머위꽃이 활짝 피면 올해는 기필코 꽃향기를 맡아 보고 진위를 밝혀 보겠노라 다짐하며 밥에 올려 마른 김에 싸서 입에 넣습니다. 머위 특유의 쓴맛은 데치고 볶은 과정에서 배경으로 멀찍이 물러나 풍미를 돋웁니다. 


마당과 텃밭 아무데서나 자라 천덕꾸러기인 원추리는 이맘때만 대접받습니다. 오동통한 밑동은 아삭한 식감으로, 파릇한 줄기부분은 색감으로 해마다 한자리를 차지합니다. 뿌리를 제거한 민들레는 생으로 초고추장에 무쳤습니다. 콩 알 만 한 꽃봉오리를 포도송이처럼 품고 있어 터지는 재미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올해 처음 식탁에 올렸는데, 앞으로 단골로 삼기로 했습니다. 몇 년 전 1년생 모종을 심은 삼나물은 올해 처음 수확했습니다. 새끼손가락 굵기의 새순을 꺾어 나물로 먹습니다. 눈개승마라고 하며, 어릴 적 강원도에서는 찔뚝바리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봄나물의 제왕이라는 별명답게 두 사람 모두 흡족한 맛입니다. 


어스름한 저녁, 창가에는 목련이 알전구를 켠 듯 환하게 매달려있고 물소리는 골짜기 깊은 곳으로 봄을 데려갑니다.

왼쪽 위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머위꽃된장, 원추리, 민들레, 머위나물, 삼나물, 깻잎


# 노루귀 #머위 #머위꽃된장 #원추리 #민들레 #삼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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