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CTION
정말 그대로 있네. 희진은 아파트 상가 건물 1층에 자리 잡은 빵집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샹도르 과자점
어린 시절 매일매일 출석 도장을 찍었던 동네 빵집이었다. 학원에 가기 전에는 꼭 샌드위치를 사서 먹고, 친구들과 노래방에서 몇 시간씩 노래를 부르고 출출해질 때면 초코빵을 사서 먹던 빵집이었는데… 샹도르 과자점은 정말 그때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희진이 기억 속에 묻혀있던 동네 빵집을 찾게 된 건 한 달 전 집으로 날아온 한 통의 편지 때문이었다. 먼바다를 건너 한국에서 날아온 편지 한 통. 14살이 끝날 무렵, 식구들과 이민을 간 희진은 한국에 더 이상 연락 하고 지내는 지인들이 없었다. 더군다나 철 지난 손편지라니. 배송되는 중에 비라도 맞은 건지 발신인 부분은 물에 젖어 번져있었다. 희진은 발신인을 확인할 수 없는 편지를 열었다.
희진이에게
안녕, 희진아. 오랜만이야. 중학교를 졸업하고 몇십 년 만에 창동에 왔다가 문득 네 생각이 나서 편지를 써봐. 메일을 하려고 했는데 없는 메일이라는 알림이 떠서 오랜만에 손편지를 쓰고 있어. 네가 아직 그곳에 살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오랜만에 창동에 왔어. 창동도 많이 변했더라. 우리가 자주 가던 분식집, 문방구 모두 사라졌더라고. 당연히 없어졌을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정말 없어진 걸 보니 기분이 이상했어.
아직 남아있는 것들도 있었어. 우리가 살던 아파트. 그리고 기억나? 아파트 옆 상가 1층의 빵집, 샹도르 과자점. 네가 거기 빵을 진짜 좋아했잖아. 하도 자주 오니 사장님이 가끔 빵 하나씩을 더 챙겨주곤 하셨는데. 그 샹도르 과자점이 그대로 있더라. 빵집이 벌써 29년이 됐대. 같은 자리에서 쭉 빵집을 운영하면서 청춘을 가게에 다 바쳤다고 사장님이 웃으시더라. 사실 동네 빵집들이 프랜차이즈에 밀려서 많이 사라졌는데 샹도르 과자점은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 보니 괜히 뿌듯한 마음도 들었어. 우리가 이곳에서 나눴던 추억에도 힘이 생긴 것만 같아서ㅎㅎ.
빵 메뉴는 많이 바뀌었어. 어릴 때 먹던 팥빵이나 소보로빵, 희진이 네가 특히 좋아했던 초코 소라빵 같은 건 아직 그대로이긴 한데 요즘 유행하는 빵 종류는 많이 생겼어. 당연한 거겠지? 호두 크림치즈 빵이나 에멘탈 치즈 빵 뭐 그런 것들. 예전에 자주 먹던 크림빵이랑 새로 나왔다는 빵 이것저것을 사서 먹었는데 역시 여전히 맛있더라. 사장님이 냉동 반죽이 아니라 매일 매일 반죽하고 당일에 굽는 거라 맛있을 거라고 하시더니 정말이었어. 초코 소라빵은 옛날 그 맛 그대로야. 아니 그때보다 좀 더 맛있어진 것 같기도 하고? 너도 먹었으면 틀림없이 좋아했을 거야ㅎㅎ.
근데 사장님이 제일 자신 있는 빵은 식빵이래. 난 그게 되게 의외였어. 식빵은 빵집이라면 무조건 있는 기본 메뉴잖아. 그래서 간단하게 생각했는데 사장님 말로는 식빵이 가장 예민한 빵이래. 발효 과정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으면 볼륨도 안 나오고. 사장님 말을 들으니 역시 기본을 지키는 게 어렵구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 난 기본을 잘 지키고 있나 싶은 마음도 들고.
어쩌다 보니 구구절절 빵집 얘기만 하고 있었네. 내 얘기를 대뜸 꺼내기가 좀 부끄러워서 그랬어. 사실 요즘 내가 지나온 시간들을 자꾸 후회하게 됐거든. 그래서 기분 전환도 할 겸 오랜만에 창동에 왔는데 샹도르 과자점이 그때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야. 이름도 그대로, 사장님도 그대로인 그 가게가 지난 시간을 고스란히 품은 채 자리하고 있는 게, 그렇게 위안이 되더라. 그 시간을 함께했던…
편지는 거기까지였다. 편지의 끝부분도 물에 번져 글씨를 알아볼 수 없었다. 끝내 발신인을 알 수는 없었지만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며 어린 시절 내내 붙어 다녔던 단짝 예인이. 매일 밤, 편지를 펼쳐보던 희진은 편지를 받은 지 한 달 만에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어서 오세요, 샹도르 과자점입니다.”
샹도르 과자점의 문을 열자 고소한 빵 냄새가 희진을 반겼다. 어릴 적 자주 먹던 빵부터 처음 보는 빵까지 다양한 빵들이 진열대에 놓여 있었다. 손으로 투박하게 적은 빵 이름표와 옛날 빵 포장지를 보고 있으니 코끝이 찡해지는 기분이었다. 희진이 빵집 구석구석을 사진으로 남겼다.
“사장님, 요즘은 어떤 빵이 맛있어요?”
“맛있는 건 다 맛있는데, 잘 나가는 건 쌀로 만든 빵이 잘 나가요. 쌀 식빵, 쌀 모닝빵. 그리고 늙은 호박 카스테라도 잘 나갑니다. 다른 곳은 호박 분말이나 가공된 호박을 쓰는데 저희는 생호박으로 만들어서 훨씬 더 호박 맛이 좋거든요.”
희진이 쌀식빵과 늙은 호박 카스테라를 쟁반에 담았다. 어릴 적 자주 먹었던 샌드위치와, 제일 좋아했던 초코 소라빵을 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천천히 빵집 내부를 둘러보던 희진이 계산대 앞에 서자 빵을 정리하던 사장님이 다가왔다.
“사장님, 저 사실 20년 전쯤에 여기 단골이었어요.”
“어이구, 그래요? 반가워요. ”
사장님이 희진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세월의 흔적을 품은 옅은 주름살 아래, 어린 희진을 향해 웃어주던 그 시절 사장님의 얼굴이 보였다.
“제가 14살 때 이민을 갔거든요. 이후로 올 일이 없었는데, 누가 아직도 빵집이 열려 있다고 말해줘서. 저 진짜 단골이었거든요. 매일 와서 빵 사 먹고, 사장님이 단골이라고 서비스도 주시고 그러셨어요. ”
“하하, 그랬구나. 다른 손님들도 그렇게 자주 찾아와 주세요. 초등학교 때 방문했던 사람들이 결혼해서 아이랑 찾아오는 일도 있고. 옛날 맛을 찾아온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고. 이렇게 일부러 찾아와줘서 고마워요. ”
“아니에요, 여기 아직 계셔주셔서 제가 더 감사해요.”
“감사는요. 그냥 이게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이고, 이 가게와 일이 전부니까 이렇게 계속 일하고 있는 건데요, 뭘.”
우리가 이곳에서 나눴던 추억에도 힘이 생긴 것 같았다는 편지의 그 말이 희진을 스쳐 지나갔다.
“저 한국 들어오면 앞으로도 종종 들를게요, 사장님.”
“그래요. 우리 가게는 언제 와도 열려 있으니까, 언제든 편안하게 찾아와요. 나도 건강하게 오래 장사하고 있을게.”
사장님에게 빵 봉투를 건네받으며 희진은 물에 번져 알아볼 수 없었던 편지의 뒷부분을 생각했다. 모든 게 그대로인 채 지나간 시간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빵집. 우리의 시간들과 그 시간 속에서 쌓은 추억들이 모두 가치 있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은 빵집, 샹도르 과자점. 희진은 이곳이 오래오래 계속되길 바랐다.
“어서오세요, 샹도르 과자점입니다.”
빵집을 나서려던 희진이 누군가를 향하는 사장님의 인사에 자연스레 반대쪽 출입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빵집 안으로 들어선 낯선 듯 익숙한 얼굴이 희진과 눈을 마주쳤다.
“어, 희진아?”
“예인아!”
빵집 한가운데에 선 희진과 예인이 반갑게 손을 마주 잡았다. 마치 20여 년 전의 어느 그날처럼.
글 정유진
사진 김싱싱
인터뷰 서유민 정유진 천예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