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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의미 Mar 19. 2022

롤, 플레이



아닌 척 옆 반을 자주 기웃거렸다. 어떤 여자애 때문이었다. 걔는 항상 체리 구슬 끈으로 곱실머리를 질끈 올려 묶고 있었다. 핫핑크 세일러문 백팩을 메고 등하교를 하던 그 애는 말수가 적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듯했다. 공기놀이하다가도, 딱지치기하다가도 그 여자애를 자주 힐끔거리게 됐는데, 주변에 같이 노는 사람이 없어도 지루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혼자서도 소상히 분주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친구들과 구르는 게 유일한 하루 일과였다. 누가 먼저 정글짐에 올라가는지, 더 빨리 달리는지, 먼저 탈출하는지에 사활을 걸었다. 철저히 친구 의존적인 나의 스케줄과는 다르게 친구들은 하나같이 바빴다. 태권도, 피아노, 바둑, 발레를 연달아 배웠다. 어느 날은 약속을 하고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을 기다리는데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다. 끝내 발을 떼지 못하고 기다리다가 오후 4시가 되어 운동장에 혼자 남게 되었다는 걸 알고는 그대로 신발주머니를 패대기쳤다. 가방도 던져버릴까 하다 우유가 터질까 간신히 참았다. 주머니를 몇 번 더 밟다가 집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니까, 혼자 하교하는 일은 처음이었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씩씩거리며 내일 만나면 죽여버릴 친구 이름을 하나하나 읊었다. 닫힌 정문을 돌아 도서관과 연결된 후문으로 나가려는데 익숙한 세일러문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당연하게도 혼자인 뒷모습은 축 쳐진 나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이 오롯했다. 머리가 둥둥 울렸다. 어차피 가는 방향도 같은 것 같았다. 먼저 말을 걸었다. 너 옆반 애지? 나랑 친구 안 할래?


같이 놀지 않더라도 이해하려던 참이었다. 힐끔거리기만 해 봤지 한 번도 먼저 말을 걸어본 적이 없었다. 이름도 몰랐다.


하지만 그건 걔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내 이름 알아? 물었더니 그 애는  아니, 당연한 듯 대답했다. 그 신속함에 조금은 자존심이 상해버렸고 동시에 더 좋아졌다. 단짝이 되면 좋지 않을까, 상상했다.


처음 간 윤의 집은 어두웠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요란히 집 안을 메웠다. 윤은 익숙한 듯 거실 불을 켰다. 적막은 익숙하지 않은 배경음이었다. 우리 집은 늘 동생들과 엄마의 고함으로 복작복작 시끌시끌했다. 뭔가를 얘기해야 할 것 같은 강박이 올라왔다. 나는 최근에 알게 된 여러 친구들의 비밀을 두서없이 쏟아냈다. 윤은 잠자코 내 이야기를 들었다.


윤의 엄마는 보통 일곱 시가 넘어서 들어온다고 했다. 아빠는 그것보다 더 늦게 돌아와서 보통은 집이 비어있을 때가 많다고. 매일 두 시간 정도는 혼자 집에서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다고 덧붙였다.


‘책을?’ 의아했다. 언뜻 지나쳤던 거실 책장에 어른들이 보는 줄글 책들이 가득 꽂혀 있었는데, 그런 걸 읽을 수 있는 걸까 궁금했다. 어쨌든 혼자 있을 때 책을 읽는 사람과 단짝이 되는 건 꽤 멋진 일 같았다. 어떤 책을 읽느냐고 물었다.


그냥 글이면 다 읽어. 소리 내서 읽기에 길지 않은 책들. 목소리가 울리면 꽤 근사하게 들리거든. 혼자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윤이 구사하는 단어들은 완전히 새로운 것들이었다. 윤은 어른 같았다. 엄마가 자주 듣는 라디오 채널의 클래식 방송을 진행하는 언니를 떠올렸다. 윤과 친구가 되려면 지금보다 덜 흥분해야 할 것 같았다. 그게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 상태인지는 잘 몰랐지만.


조용히 노는 법을 몰랐다. 매달리고, 달리고, 넘어졌다. 집에서도 비슷한 양상이었고 엄마는 층간소음으로 골머리를 썩었다. 내가 알고 있는 놀이는 윤의 집에선 할 수 없었다.


타협점으로 역할 놀이를 하며 놀았다. 타인이 되어 연기하는 방식이었다. 익숙한 타인은 대부분 가족과 학교에 국한되었기에 나는 누구를 연기하면 좋을지 방향을 잃었다. 반면 윤이 제시하는 상황은 예측할 수 없었다. 집 나온 엄마, 주정뱅이 아저씨, 개미, 모기, 민들레 꽃이 되기도 했다. 윤의 연기는 자주 구체적인 상황을 떠올리게 했다. 어떻게 반응하는 게 맞을지 계속 윤의 눈치를 살폈으나 어떤 말을 하던 윤은 자신의 역할이기에 바빠 보였다. 잘 놀기 위해 거실에서 영화 채널을 틀어놓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엄마가 종종 보던 채널이었다. 윤처럼 대사가 많은 역할이 맡으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할 것 같았다. 책을 읽는 건, 혼자서는 너무 어렵고 도무지 마음이 가질 않았으므로 영화를 봤다.


재밌는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침대에 누우면 영화의 대사와 장면들이 떠다녔다. 장면을 생각하고  생각하다 영화 꿈을 꿨다. 마치 내가 겪은  같았다. 말할 거리가 늘어나는 기분은 새로웠다. 새로운 세계는 무궁무진했다. 무엇보다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나를 부지런하게 했다. 꿈을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알림장 하단에 메모해두는 습관이 생겼다. 쉬는 시간에 윤에게 찾아가  꿈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를 하는  좋았다. 윤은 대부분 질문이 많았다. 그래서 하늘을 날다가 아마존으로  떨어진  같아? 호랑이는 사탕을 먹다가  이가 부러졌는데? 죽었다가 살아나는  어떤 기분이야? 쉬는 시간이면  반으로 달려갔다. 같이 공을 차던 친구들은 변절자라고 놀려댔다.


어느 날은 엄마도 아빠도 늦게 집에 들어왔다. 티브이를 틀어놓고 잠을 자다가 눈을 떠보니 어떤 장면이 보였다. 장면은 선상으로, 거대한 배 안으로, 무도회장으로, 화물칸으로, 화물칸 안 어떤 자동차로 이끌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열쇠 돌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전원을 끄고 방으로 뛰었다. 이불로 얼굴을 덮으니 땀 냄새가 진동했다.


여느 때처럼 침대에 누웠지만, 도무지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궁금한 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떠다니는 이미지들이 온몸을 저리게 했다. 다부진 몸, 도발적이고 부드러운 눈빛, 실크 가운, 말없이 그림을 그리는 예쁜 남자. 쓱싹쓱싹 연필 초크 소리, 여자가 차고 있던 초록 에메랄드. 눈을 감아도 자꾸 부자 여자의 호화로운 응접실로, 둔한 숨소리 가득한 자동차 뒷좌석으로 돌아갔다. 그날은 꿈을 꾸지 않았다.


윤의 집 거실에서 멍하니 앉아있던 내가 갑작스럽게, 우리 타이타닉 놀이할래, 제안했다. 윤은 모르는 영화라 했고 나는 내가 다 알려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


밤새 연상한 배우들의 몸짓을 할 줄 아는 모든 단어로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깨서부터 팔을 이렇게 쓸고 내려와서 깍지를 끼면 네가 나를 보는 거야. 그러면서 이렇게 쳐다보는 거지. 그럼 내가 네 손가락을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몸이 너무 뜨거우면 용암처럼 터져서 흐르게 될 수도 있는 걸까. 몸이 끓고 있다고 확신했다. 뛰어다니다 화분을 깨서 손들고 복도에 서 있을 때, 교실 앞에서 혼이 날 때처럼 손과 발을 떨었다. 증상이 무척이나 닮은 게 이상할 뿐이었다. 파랗게 질린 손과 발은 차가웠지만 윤은 따뜻했다. 온도 때문인지, 어쩌면 눈을 오래 쳐다봐서 일지도 몰랐다. 잔뜩 더웠다. 자꾸 땀이 나서 중간중간 쉬어야 했다. 영화에서 본 차 뒤 칸은 뿌우 우연 김이 서려 있었다. 왜 그 안이 더웠을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윤의 몸 구석구석 입바람을 불었다. 윤의 손이 여기저기를 간질였다. 계속해서 이렇게 부끄럽고 따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연기라고 하긴 했으나 집에 와서도 계속 윤이 생각났다. 손가락 마디마디, 곱슬곱슬 간지럽지만 과일 향 샴푸 냄새가 나던 머리카락도. 꿈에 윤이 나왔다. 잠에서 깨면 방금까지 같이 있었다는 착각이 들었다. 윤의 꿈을 꾸고서는 평소처럼 편하게 꿈 얘기를 늘어놓을 순 없었다. 구체적으로 물어올 게 뻔했다.


점점 옆 반을 덜 기웃거렸고 윤은 평소처럼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묻지 않고 가지 않은 채 윤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정적은 정적대로 시간을 채웠다. 이끌리듯 나는 다시 운동장에서 놀기 시작했다.


복도에서 윤과 딱 정면으로 마주쳤을 때 슬쩍 시선을 내리깔고 가볍게 옆을 스쳐 지나갔다. 무시하고 싶은 의도는 없었는데 그날은 그랬다. 그리고 여러 날들을 그랬다. 윤도 먼저 인사를 하거나 아는 채 하지 않았다.


방학식 날 처음으로 윤의 엄마를 보게 되었는데 곱실거리는 머리와 계란 같은 얼굴 모양이 꼭 닮았다고 느꼈다. 멀찍이서 보고만 있다가 뒤로 돌아 엄마에게로 갔다. 친구들과 사진을 찍고 선생님과 작별인사를 하고 가방을 챙겼다. 엄마가 전학서류를 떼는 동안 책상 서랍을 정리했다. 조각난 지우개, 찢긴 유인물, 색종이 딱지, 급하게 쑤셔 넣은 알림장이 나왔다. 알림장을 열었다. 꼬깃하게 접힌 페이지가 한 장 한 장 지나갔다. 중간부터는 깨끗했다. 재활용 휴지통은 다른 종이 더미로 이미 소복했다. 살포시 올려놓아도 됐지만 온 힘을 다해 알림장을 바닥으로 던졌다. 그래, 이건 게임이니까. 다음번에 잘하면 되니까. 구겨진 세계가 팔랑, 바람에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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