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일하는 선생님으로부터 그가 어린이날 선물 종목을 고심한다는 걸 전해 들었다. 선물 단가에 대한 실질적인 고민이었는데 학습지 교사의 지위와 여건 상 어떤 선물이 적절한 지에 대한 걱정이었다. 언젠가 엄마가(그도 작년까지 학습지 교사였다) 어린이날 아이들에게 줄 사탕과 초콜릿을 비닐포장하던 걸 기억해냈고 제안을 건네자 동료 선생님은 펄쩍 뛰었다. “요즘 엄마들이 군것질을 얼마나 싫어하는데요. 역시 학용품이 제일 적절할까요?” 허구한 날 방을 궁글러 다니던 연필, 지우개, 색연필 출처가 어딘지 알 것 같았다. 교사 몇 명의 고민들이 굴러다녔을지.
어린이들에게 직접 선물을 준 기억은 없으므로 내가 어린이 시절 받았던 선물을 곰곰이 떠올렸다. 나의 엄마는 어린이 날을 특별히 챙기지는 않았고 (“매일이 어린이날인데 선물은 무슨!”) 본인이 즐기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던 사람이었다. 산타의 환상을 부단히도 늦게 깨 주고 싶었던 것 같은데 덕분에 열 살이 되도록 산타를 위한 쿠키와 우유를 신발장 위에 두고 잠에 들었다. 산타가 온다면 날 꼭 깨워주라는 당부도 매년 같았다. 그러던 열한 번째 크리스마스이브 날, 엄마는 굉장히 곤란한 얼굴로 10년간 유지해 온 산타 비밀을 조심스레 밝혔다. 옛날 같은 선물은 어렵다는 그가 내민 투박한 선물 포장을 뜯어보니 웬 책이, 그것도 두 권이나 들어있었다. 황순원의 “소나기”와 구성애의 “아우성(아름다운 우리들의 성을 위하여)”이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책 제목을 읽으면서 가슴팍이 찔끔찔끔 저렸다. 훌쩍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달갑지 않았다. 지금껏 산타가 전해주었던 장난감과 공주 드레스, 마술봉, 곰인형으로부터는 영원히 안녕이구나. 종종 유년기와 강제 이별한 후 부쩍 이유 없이 외로울 때가 있었다.
요즘 내가 만나는 어린이들은 나이대가 다양하다. 한글을 처음 접한 어린이도, 월경을 하는 어린이도 있다. 취향도 가지각색이라 선물을 하나로 통일하는 건 불가능했다. 시큰둥한 얼굴들. 요즘 어린이들은 뭘 하든 쉽게 지루해했다. 글쓰기 교사 친구가 소개해 준 “어린이 해방 선언문”이 얼핏 스쳤다. 천도교와 동학을 공부한 그가 뽑은 문장은 한 줄 한 줄이 정성스러웠다. 내가 발췌하진 않았지만 친구의 노고를 빌려 내가 만나는 어린이들과도 내용을 공유하고 싶었다. 선언문의 문구를 옮겨적고 글씨를 키웠다. 1923년 발행 연도 옆에 유행하는 만화 캐릭터도 붙여 넣으니 제법 읽고 싶게 보였다. 다만 선물의 부피가 보잘것없었다. 봉투만 준다면 굳이 열어보지 않을 것 같았다. 선물에서 무게는 생명이었다.
세 개 구천 구백 원 하는 장난감 코너는 멀리서부터 눈길을 끌었다. 예상 단가 적정선에 포함되었고, 어린이들이 싫어하기 어려운, 어른이 쉽게 사주지 않을 것 같은 장난감이었다. 수첩에 어린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나열하게 시작했다. 이름 옆엔 그간 수업하면서 알게 되었던 그들의 특징을 적었다.
친근한 수연-도장 찍기 좋아함.
말이 많은 준규-그림 그리면서 구체적으로 상황 묘사.
세심한 은강-감정을 잘 읽고 오래 기억함.
장면들을 넘기며 장난감을 카트에 넣었다. 몇 시간에 걸쳐 선별하니 장난감으로 가방이 터질 것 같았다. 살짝 열린 가방 위로 휘황찬란한 금빛 포장지가 깃발처럼 나부꼈다.
짠! 하고 꺼냈으나 마스크에 가려진 표정은 알 길이 없었다. 부끄러운지 궁금한지. 고맙다고 한마디 해줄 법도 한데 내가 다 무안했다. 대부분 어린이들은 솔직했다. 재미없고 유치하고 익숙하다고 톡 쏘면서도 선물을 흔들며 마구잡이로 포장지를 뜯었다.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장난을 걸면 내가 질세라 맞받아쳤다. 어린이 해방 선언을 읽어 달라는 몇 명에게는 낭랑한 목소리로 한 글자 한 글자를 읽어주었다. 귀 기울여 듣는 이는 한 명도 없었으나 대뜸 몇몇 단어들의 뜻을 물어오기도 했다.
지나치게 친절하거나 대답이 없는 어린이들은 어려웠다. 질문은 많은데 돌아오는 정보는 적었다. 내가 필요한 말을 건네는 건지 헷갈렸다. 어쩌면 어린이다운 천진난만을 그들에게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적절한 사회성”은 무수한 방식으로 갖가지 가면을 만들어냈을 것이었다. 내년에 중학생이 되는 한 어린이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평소처럼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좋았던 시절 다 갔죠.” 구체적으로 무엇이 좋았는지, 지금은 왜 그렇지 않은지 묻고 싶었으나 인터뷰이가 고개를 돌렸다. 인터뷰는 빠르게 종료되었다.
어린이들과 같이 선언문을 읽다 질문을 받았다는 소리에 친구는 부러워했다. 본인의 학생들은 미적지근한 표정과 태도로 이거 다 아는 내용인데요, 했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학교에서 외운 자료였고 친구는 분노했다. “아니, 그걸 왜 외우게 할까? 익숙해지면 재미가 하나도 없는데.” 기함을 토하는 목소리를 뒤로 선물을 받았던 어린이들의 얼굴을 다시금 떠올렸다.
100년 전 선언문은 어린 동무들 뿐 아니라 어른 동무 들에게도 청한다. 대우주의 뇌신경 말초가 어린 동무들에게 있으니 섬세하고 보드랍게 설명해달라고. 설명 없는 일방적 언사는 자주 여러 관계들을 망치곤 한다. 대우주의 뇌신경 말초를 가진 이들에게는 오죽할까. 내 몸에 묻어있는 시냅스의 기원을 어린이들로부터 자주 목격한다. 상상과 흥분, 가상의 만물로 세상이 그득그득 복작거렸던 세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