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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수란 Aug 28. 2021

<미드소마> 가면극은 지금, 여기에


 한창 진행되고 있는 영화. 프레임 안으로 새로운 인물이 걸어 들어온다. 나는 한 명의 인간이 등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미를 느낄 때가 있다. 이 인물이 가진 역사와 성격, 그리고 앞으로 내뱉을 대사 몇 마디로 이 영화의 방향은 달라진다. 사람들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는 건 더 재밌다. 한 사람 안에는 무수한 감정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몇 가지, 이리저리 뒤엉킨 과거의 흔적들이 담겨 있다. 그 사람들은 모여서 탁구공을 주고받는다. 지금의 말, 그리고 다음의 반응. 여기에 촉발되는 감정과 긴장관계. 사람의 머릿속은 투명하지 않다. 이렇게나 가까이 앉아있는 사람의 머릿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안다고 생각해도 그건 전부가 아니다.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한 채로 사람들은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의 가면극이다. 예로부터 전해지는 사회적 동물의 가면극이다. <미드소마>에는 기괴할 정도로 거대해진 사회적 동물의 가면이 등장한다. 우리는 어떻게 그 거대한 가면이 얄팍한 힐링에 이르게 하는지 목격한다. 


 <미드소마>에는 환각제가 필요한 몇몇 순간이 있다. 첫 번째 환각제는 72세 노인들이 절벽에서 뛰어내릴 때 필요하다. 그리고 두 번째는 광기와 같은 호르가 사람들의 공감 표현을 보았을 때다. 즉 기괴하고 거대한 그들의 가면이 비로소 나타났을 때다. 한 노인은 절벽에서 뛰어내렸다가 죽지 못하고 다리만 산산조각이 난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노인을 앞에 두고 마을 사람들은 똑같이 그 고통을 느끼는 것 마냥 아파하는 표정과 함께 비명을 지른다. 연극배우처럼 과장된 제스쳐 역시 포함이다. 그들의 광기는 여기서 드러난다. 호르가 부족에게 ‘홀로’란 없다. 나는 나대로, 타인은 타인대로 남아있지 못한다. 공감이란 무엇인가? 한 가지 전제해야 할 것은, 우리는 타인의 감정을 온전히 다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마치 자신이 그 절벽에서 떨어진 것처럼 비명을 지르는 호르가 사람들. 그 기저에 깔린 광기를 알아보는 건 그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의 감정을 어렴풋이 느끼고 눈물을 흘릴지언정 어느 정도의 틈은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틈은 남겨두어야 한다. 밀려오는 감정을 그대로 느끼는 것은 타인이다. 공감을 통해 그 파도에 맞설 힘을 어느 정도 불어넣을 수 있지만, 파도 앞에 서야 하는 건 온전한 타인의 몫이다. 하지만 호르가 사람들은 모두가 타인의 파도 앞에 서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일말의 고립도 허용하지 않는다. 


 호르가 사람들이 만들어낸 가족은 질식할 것만 같다. 서로 다른 타인을 묶어주는 가족의 이름은 서로를 향해 너무나도 깊숙이 관여하고자 한다. 호르가 부족은 마치 자웅동체가 된 것 마냥 말하고 행동한다. 가족은 나와 너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혼합된 하나를 의미하지 않는다. 호르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빠져나갈 틈 없이 뭉쳐진 덩어리다. 이 열망은 기괴한 가면을 만들어낸다. 그들의 공감은 더 이상 마음에서 우러나온 자연스러운 공감이 아니다. 타인의 감정과 나의 감정에는 어느 정도의 틈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틈은 필연적이다. 타인과 나의 경계를 완전히 무너뜨린 호르가 부족의 공감은 어떤 측면에서는 의무적인 것처럼 보이며, 어떤 측면에서는 하나의 허상처럼 보인다. 누구나 혼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지나친 두려움은 광기로 변질되고 만다. 호르가 부족의 경우가 그렇다. 호르가 사람들이 고립을 피하기 위해 택한 것은 커다랗고 기괴한 가면이다. 지금 너가 느끼는 감정을 잘 안다 말하고, 마치 자신이 느끼는 감정인 마냥 분출한다. 그들의 거대한 가면은 어느 정도의 합의이다. 나도, 타인도 홀로 남겨져서는 안된다. 이 모든 것은 연극이다. 호르가 인들은 환각제를 마시고 커다랗고 이상한 가면을 뒤집어쓴다. 배우들은 항상 웃는 얼굴을 한다. 대본에는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는 얼굴만이 그려져 있을 뿐이다. 돌발상황을 위한 대본도 있다. 누군가 고통스러운 감정을 내비치면, 그 감정을 내가 느끼는 것처럼 연기할 것. 호르가 부족의 공감은 두려움에 그 근원을 가진다.



 하지만 때로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 우리를 위로하는 순간도 있다. 그것은 패스트푸드와 같은 위로다. 순식간에 허기를 채우지만 추천할 만한 포만감은 아닌. 대니를 따라 가면극 <미드소마>는 호러 영화에서 소위 말하는 힐링 영화로 변모한다. 대니의 숨막히는 세상을 그려내는 전반부는 공포영화와 다를 바 없다. 정신적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곳, 가족은 한 순간에 사라졌다. 남자친구와는 가면을 쓴 채 서로를 대한다. 그 가면들은 서로를 질식하게 만든다. 대니는 그 사실을 직시하려 하지 않는다. 알면서 모르는 체한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관계를 위한 자신의 노력이 한계가 있다는 사실 자체로도 대니에게는 호러 영화가 된다. 대니는 그 가면 뒤에 가려진 남자친구의 표정을 알고 있다. 오히려 아주 우스꽝스러운 호르가 사람들의 가면이 대니에게 위로가 된다. 모든 관계는 가면을 필요로 한다. 모두가 쓰고 있는 가면이라고는 하지만, 호르가 부족의 가면은 너무나도 거대하고 기괴하다. 그래서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자신이 상대의 감정을 느끼는 것 마냥 울부짖는 그 모습에서 진짜 그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가 무엇을 느끼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차라리 대니에게는 그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대니가 호르가 부족의 일원이 되기로 결심한 결정적인 요인은 공감 의식(ritual)이다. 남자친구의 성관계 의식을 목격한 대니는 울음 섞인 비명을 내지른다. 부족 여자들은 고통스러워하는 대니를 둘러싸고 대니가 내는 것과 같은 비명을 지르며 공감을 표현한다. 실로 대니는 이 이상한 공감 의식에서 위안을 얻는다. 온 몸으로 공감을 표현하는 이 사람들에게서 대니는 그들이 가진 진짜 얼굴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자신의 슬픔에 아파하는 사람들의 진짜 얼굴은 대니에게 중요치 않다. 지금 이들이 표현하는 아픔이 진짜일지 가짜일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가면 뒤의 얼굴이 완전히 가려졌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남자친구가 불타는 모습을 바라보며 웃는 대니. 그 미소에서 우리는 비로소 이 영화가 힐링 영화로 변모했음을 알게 된다. 


 대니는 공감 의식에서 위안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찜찜한 감정을 끝내 지울 수 없다. 호르가 부족의 공감 의식은 어딘가 불편한, 언캐니한 감정을 불러온다. 감춰진 익숙함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사회적 동물의 가면은 누구나 가지고 있고 그만큼 친숙한 것이지만, 우리는 평소에 그 가면을 자각하지 못한다. 프로이트의 언캐니는 ‘두려운 낯설음’이다. 언캐니란 “‘친숙했던 무언가’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며, 이것이 낯설고 두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오랜 시간 자아가 그것을 ‘억압’해 왔기 때문이다.” 가면 너머의 얼굴은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 모른다. 상대방의 진정한 얼굴을 알지 못한 채 우리는 유대감을 느낀다. 나 자신도 관계에서 가면을 쓰기 때문에 이는 친숙한 사실일 수밖에 없다. 정작 우리는 관계를 맺을 때 그런 가면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다. 전환점이 될 만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비로소 그 진짜 얼굴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누구나 고립을 두려워한다. 누구나 혼자라는 사실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미드소마>는 우리의 가면을 눈에 훤히 보이게끔 들이밀며, 아직 가면 너머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는 친숙한 사실을 일깨운다. 그로 인해 ‘혼자’라는 단어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 불편하고 불안한 감정은 여기서 촉발된다. 영화의 운명론적 세계관은 이 언캐니한 감정을 증폭시킨다. 호르가 부족은 광기 어린 지금의 삶을 자신의 숙명이라 여긴다. 기괴한 가면놀이는 그들의 숙명이다. 그리고 대니의 숙명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도 가면이 우리의 숙명임을 안다. <미드소마>가 그려낸 가면극은 영화 밖의 우리 모두가 배우임을 상기시킨다. 






<참고 자료>


유현주. "두려운 낯설음 - 프로이트, 호프만, 키틀러 그리고 언캐니 밸리." 브레히트와 현대연극 23 (n.d.): 203-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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