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준비: 각종 서류
퇴사의 과정은 상당히 지저분했다. 꽤 많은 것들을 정리해야 했는데 그중 하나는 집이었다.
학교 다닐 때 키는 커서 항상 뒷자리에 앉았던 순둥순둥한 얼굴을 한 내 고등학교 친구는 필사적으로 부모님 집에 붙어살려고 노력했다. 대학 4년 동안 2시간 반이 넘는 통학시간을 견뎌내었고, 직장도 집과 가까운 곳으로 구해 나이차가 많이 나는 어린 동생을 돌보며 살고 있다.
"붙어있을 수 있을 때까지 붙어있어야 해. 그게 남는 거야"
아마 안정적인 둥지를 떠나 독립을 하게 되면 내야 하는 어마 무시한 월세, 각종 공과금과 생활비를 생각해 본다면 단연 수긍이 가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남몰래 내 공간을 만들겠다는 작은 소망을 품었다. 마침 내가 소속된 회사에 무이자 대출이 가능한 거주지 전세 지원 혜택이 있었다. 이 복지를 활용해 부모님으로부터의 독립을 시도했다. 회사에서 지원해 주는 주거지 기준은 꽤 까다로웠다. 집주인이 직접 그 건물에 거주해야 하고, 건물주가 대출이 없어야 하고 등등의 기준. 그에 부합하는 집을 겨우 찾았다. 회사에서 차로 15분 거리의 주택가, 8평짜리 원룸이었다. A4용지 반장 짜리의 조그마한 내창이 있는 1.5평 고시원에 살아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집 다운 집에 혼자 살아보는 건 처음이었다. 매트리스, 협탁, 테이블과 1인 소파 등 필요한 가구들을 장만하면서 내 공간을 꾸밀 생각에 잔뜩 부풀었다. 여행 다녀온 후 뽑은 사진으로 한쪽 벽을 꾸몄고, 친구들이 놀러 올 때 건네줄 술, 간단하게 해 먹을 수 있는 요리 재료들을 냉장고에 채워 넣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집은 점점 회사에서 끌고 온 일로 채워졌다. 밤에 자다가도 전화를 받고 출동을 하기도 했고, 미처 야근으로 끝내지 못한 일을 가져와 잠을 자면서도 일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꿈속에 상사가 나올 줄이야. 내가 책임지는 공사가 잘못돼서 혼자 처리를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악몽도 꿨다. 소리를 지르며 깨어난 적도 있었다. 머리만 대면 자던 나는 어디 가고 악몽에 시달리는 퀭한 나만 남게 되었을까.
2년 계약이 끝나갈 때쯤 집주인에게 나간다고 얘기했다. 물론 1년 계약을 추가로 한 뒤에 다음 입주자에게 승계해 주면 된다. 하지만 세입자가 안 구해진다면? 그게 더 복잡한 일이 될 것 같아 내린 결정이었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말한 지 일주일도 안 돼서 다음 세입자가 정해졌다. 영락없이 집을 비워줘야 했다. 집에서 출퇴근을 하기는 싫었던 나는 결국 고시원에 들어갔다. 1.5평짜리 방에 들어갈 짐은 많지 않았다. 몇 벌의 출근복, 가방, 화장품, 비상식량 조금만 남겨두고 원룸에 있던 짐은 고스란히 부모님 집으로 향했다.
아, 그렇게 끝이 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회사에서는 8천만 원의 전세금을 돌려달라고 독촉을 하기 시작했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이사 당일, 열심히 짐을 빼고 방을 치우고 나서는 우리를 지켜보던 주인아주머니가 신발 6켤레를 차곡차곡 넣으면 꽉 찰만한 크기의 가짜 대리석 현관 바닥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얼룩을 발견하고 얘기했다.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내라고 하셨다. 우리 엄마는 에이, 이게 무슨 얼룩이예요. 청소하면서 흘린 물자국이겠죠-라고 조금 우겨보려다가 집주인 화만 더 키워버렸다. '아니, 이 여편네가'부터 시작해서 '왜 욕이냐고' 두 사람의 목소리가 커져만 갔다. 나는 두 여자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당황하다가 한바탕 싸움이 날 것 같아 엄마를 돌려세웠고, 집주인에게는 곧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정리해서 현장을 떠났다.
집은 뺐는데 집주인이 회사에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았던 거다. 싸한 느낌이 들어 전화를 걸었다. 이사 당일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아 죄송하다며, 전세금은 제 돈이 아니라 회사 돈이니 입금 부탁드린다-고 이야기했지만 전 집주인은 화만 내고 끊어버렸다. 회사 경리팀에서는 예산에 구멍이 생기면 큰일이 나니 얼른 돈을 갚으라며 나를 쪼았고, 나는 업무시간에 수시로 전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 현관의 얼룩을 해결하라고 했고,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세입자가 들어와 있는 상황이라 내가 직접 가서 제거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여러 청소업체에 사진을 전송하고 문의를 해봤고, 현장을 봐야겠지만 기름이라면 10만 원에서 20만 원 사이의 금액이 나올 것 같다는 대답을 들었다. 일도 못하고 전세금 문제도 해결 못하고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집주인에 대한 앙금이 남아있던 나는 일주일을 버텨봤지만 경리팀의 압박에 결국 이 관계를 중재해 줄 공인중개사를 찾아갔다. 그녀는 집주인과 통화를 하고 난 뒤 나에게 한 번만 굽히고 들어가자-고 조언했다. 집주인이 사과가 듣고 싶은 것 같다며. 그 길로 나는 자존심을 굽히고 비타 500 한 상자를 들고 찾아가 죄송하다며 잘못했다고 얘기했다. 집주인은 한결 누그러진 표정으로 '엄마가 잘못된 얘기를 하면 네가 중간에서 잘해야지'라며 끝까지 훈계를 하고 내가 건네준 비타 500 상자를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돌아오는 길에 받은 문자 한 통.
"얼룩 제거비용 20만 원 입금하면 바로 전세금 보낼게요."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지 않나. 사과도 받고 돈도 받고 뿌듯해하는 집주인의 얼굴을 상상하니 괘씸했다. 이럴 거면 비타 500 상자를 왜 들고 간 걸까. 우리 엄마는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이런 취급을 당해야 했을까. 그때는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하지만 어쩌겠나. 20만 원을 그녀의 통장으로 입금하고 돌아오는 길에 펑펑 울었다. 엉엉. 집이 없다는 건 이렇게 서러운 일인가. 그렇게 한바탕 울고 나서 다 털어 버리자며 입사 동기를 만나 잠실에서 열리는 푸에르자 부르타 공연을 보러 갔다.
다음 주 월요일, 전세금이 회사 통장으로 입금되었다. 하. 맥이 풀렸다. 대출 상한 한도를 은행에서 확인했을 때보다 더 허탈한 소식이었다. 내 공간을 갖고 싶다는 소망이 이렇게 눈덩이처럼 불어나 나를 괴롭힐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게 돈 없는 자의, 전세살이의 설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