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부재가 생일에 미치는 영향
생일 전 날, 친구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고 음료 주문을 했다. 춥지만 따뜻한 눈이 펑펑 내리는 한겨울이었다. 논알콜 뱅쇼를 주문하고 자리에 들어오는 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평소에도 스팸전화가 많이 오는 탓에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잘 받지는 않는다. 그냥 무시하려다가 출국이 일주일 남았다는 생각이 스쳐 혹시 몰라 전화를 받았다.
- 여기 XX 대학병원 응급실입니다.
- 네?
- 혹시 ㅇㅇㅇ님 따님분 되세요?
- …네.
철렁했다. 순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빠가 다쳐서 응급실에 왔다는데 얼마나, 아니 어떻게 다친 건지 설명 하나 없이 중환자실로 옮겨야 한다며 유선으로 서약서만 받고 끊어버렸다. 담당 선생님이 오시면 전화드릴게요-라고 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전화는 오지 않았다. 뭘 해야 할지 몰라 초조히 보내던 시간은 한 시간, 두 시간이 흘렀다. 이 소식을 아는지 모르는지도 모르는 엄마가 걱정돼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전화를 걸었다. 담담히 엄마도 안다고, 아침에 아빠랑 통화를 직접 했다고 했다. 휴, 그렇게 한숨을 골랐다.
엄마는 아빠가 아침에 직접 응급실에 찾아가 엄마와 통화를 한 뒤 연락이 계속되지 않는다고 했다. 얼른 집으로 돌아간 뒤늦은 밤에 응급실로 전화를 걸었고, 석연치 않은 안내에 몇 번이고 다시 걸어 아빠 상태에 대해 물었다. 자세한 건 알려줄 수 없지만 머리를 다쳐서 중환자실에서 상태를 보고 있는거라며 내일 면회 오라고 했다. 왜 환자 상태에 대해 얘기해줄 수 없는 건지, 보호자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에 대한 안내는 없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도 사고 후 직접 병원에 찾아갔고 머리를 다쳐서 중환자실에 있는 거라니, 정말 다행이었다. 감사하다는 생각 뿐이었다. 이튿날 아침 엄마와 부랴부랴 준비해서 지하철을 타고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했다.
- 언제 오시나요?
- 지금 가고 있어요. 한 시간 반쯤 걸릴 것 같아요.
- 아, 너무 늦게 오시는데. 그럼 코로나 검사를 하면 결과가 밤 9시에 나와요. 그리고 면회는 안 돼요. 상주 보호자만 코로나 검사하고 일반 병실로 옮겨서 병원에서 지낼 수 있어요.
겉으로는 담담한 척 하지만 경황이 없어 보이는 엄마를 혼자 보낼 수 없어 함께 고속버스를 타고 병원에 가기로 했다. 도착하자마자 엄마는 코로나 검사를 받았다. 다음날 새벽에 출근해야 하는 나는 검사 결과가 나오는 밤 9시까지 엄마와 함께 있다 서울로 올라가기로 했다. 우리는 밥도 제대로 못 먹어서 근처 빵집에 들어갔다. 빵과 차를 마시면서 엄마를 오랜만에 마주했다. 부모님이 이사를 가고, 시한부 판정을 받은 우리 집 막내 솜이가 엄마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밖에서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빵도 주문했는데 먹으면 양치해야 한다고 안 먹는다는 엄마에게 투정을 부렸다. '오늘 나 생일인데!' 엄마는 그제야 빵을 한 조각 집어 들었다.
자연스럽게 2개월 전 무지개다리를 건넌 우리 집 막내, 솜이 이야기를 했다. 솜이를 보내고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바쁘게 살았다. 일부러 부모님을 보러 가지도 않았고 통화도 하지 않았다. 솜이가 더이상 여기에 없다는 사실을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집에 있던 솜이 물건을 간직하고 싶은 옷 딱 하나 빼고 다 버렸는데 엄마는 집을 청소하다 보면 어디선가 솜이 물건을 하나씩 발견한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오열을 한다고 덧붙였다. 아빠가 퇴근하고 돌아오실 때까지 밥도 먹지 않고 엉엉 운다고, 울다가 지쳐 힘이 다 빠져버릴 때쯤 아빠가 엄마를 데리고 나가 밥을 먹고 솜이가 묻힌 곳으로 그 늦은 시간에도 한 시간 반을 운전해 간다고 했다.
- 내가 이렇게 정신 못 차리고 있어서 나 때문에 아빠도 일에 집중 못해서 사고가 났나 봐.
내 눈을 보고 덤덤히 얘기를 하는 엄마를 보고 그간 참았던 울음이 왈칵 터져 나왔다. 엄마가 많이 힘들어할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막상 마주하니 속상하고 또 후련했다. 가족이지만 가끔 보던 나도 무기력에 침잠한 상태로 시간을 겨우겨우 견뎌내고 있는데 솜이가 가고 남겨진 엄마의 마음을 감히 나는 헤아리지도 못했다. 더 늦지 않게 쏟아내 준 엄마가 고마웠다. 우리는 빵집에서 나와 하릴없이 병원 접수대 앞 의자에 앉아 소식을 기다렸다. 8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나는 홀로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엄마는 조금 더 기다리다가 음성 결과를 받고 상주 간병인 자격으로 병실에 들어갔다. 온몸에 호스를 꽂고 누워있는 아빠를 보고 놀란 엄마 마음을, 편의점 핫바로 저녁을 때운 엄마를 생각하며 서울로 향했다. 그대로 집에 들어가긴 싫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대로 친구네 집으로 향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강아지와 살고 있는 친구가 아이스크림 케이크에 초를 꽂아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는데 그 앞에서 또 엉엉 울어버렸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오고 나니 그제야 참 길고도 힘든 날이었다고, 괜히 서러워서 울음이 났다. 생일, 그냥 1년 365일 중 하루일 뿐인데. 괜히 태어난 날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생일'이라는 단어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나는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테지. 기억하고 기념하고 반성하기 위해 의미부여를 하고 또 기록을 남겨 내 고마움을, 행복을, 감사함을, 찌질함을 확인하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