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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봉 Jun 30. 2021

통근은 장트러블을 남기고

좀 더럽나


편도 2시간 왕복 4시간짜리 통근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것은 보통 경기도민이 서울로 출근을 했구나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주 평화로운 지방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이다.


바야흐로 녹음이 푸르르던 여름날 그나마 견딜만하던 2번 환승을 하고 있던

작고 작은 소시민에게 팀 이동 명령이 떨어졌고,

다른 지부로의 출근은 견딜만하던 2번 환승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3번 환승이라는 출퇴근길 지옥이 열린 것이다.


출퇴근 시간이 길어도 환승 없이 한 번에 쭉 가는 루트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과연 천국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번을 갈아타느냐 타지 않느냐의 차이는

만성피로에 찌든 대한민국의 회사원에게는 천지차이와도 같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3번 환승은 나의 삶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교복을 입던 시절부터 입시를 거쳐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면서

타고난 집순이답게 의자와 바닥에서만 생활하며 그림을 그리고

과제를 하던 내게 강행군을 버틸 체력 따위는 없었다.

체력이 없으면 차를 사서 통근했으면 좋았겠지만

체력도 차를 살 돈도 긴 통근을 버텨낼 스트레스에 대한 높은 역치도

이것도 저것도 뭣도 쥐뿔도 나는 가진 게 없었다.

그래도 화장실을 오래 버틸 수 있는 단단한 장과 방광을 가졌다는

유일한 희망이 있었달까.


하지만 변비를 걸렸으면 걸렸지 설사나 장트러블은 겪어본 적도 없는

무디고 무뎠던 나의 장이 이 기나긴 통근길에 의외의 복병으로 등장했다.


길고 고된 통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왜인지 출근만 하면 살살 배가 아파오더니

변기와 나 사이, 그 작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폭풍을 견뎌내느라

아침마다 회사 화장실에 20분씩 갇혀있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 그렇게 믿고 믿었던 나의 장이...

출퇴근 길에 결국 빡쳐버릴 것일까

분노를 참지 못한 그는 과민성 대장으로 탈바꿈해버린 것이다...


그래도 아침에 출근해서 똥 싸면서 돈 버는 것의 실현이 아니겠냐며

나름의 정신승리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언제나 인생은 내가 방심한 순간에 어퍼컷을 날리는 법.

기모 맨투맨에 목도리에 코트까지 그득그득 껴입은 어느 겨울날

2번의 환승을 거치고 모 대학교 앞에서

마지막 환승을 기다리던 내게 극한의 쎄함과 함께 복통이 찾아왔고

나는 그 느꼈다.


‘이건 힘 풀 리면 끝장이야.’


시간은 8시 35분.

버스 도착 3분 전.


3분 후 도착하는 버스를 타지 못하면 지각이다.

하지만 버스를 타면 나는 ‘000번 버스 똥녀’로 내일 인터넷에 떠돌아다니겠지.

3분 안에 저 학교로 뛰어들어가서 처리하고 나올 수 있을까.

아냐 난 참을 수 있어. 지각할 수 없어 아아아아아앙아ㅏ아아악


온갖 생각에 시간을 허비하느라 1분도 더 지나버렸고

진심으로 지리기(죄송) 직전이라는 예감에

더는 생각이고 뭐고 눈에 보이는 제일 가까운 건물로 뛰어들어갔다.

인간의 위대한 생존본능은 처음 들어간 건물에서

한방에 화장실을 찾아냈고 발목까지 오는 코트(제기랄..)를

주섬주섬 끌어안고 일을 처리하고 나오는데

당연히 버스는 지나갔고(지각 확정)

고작 똥 때문에 인생의 위기를 겪고

수업을 안 나가면 안 나갔지

지각은 해본 적이 없던 내가 지각까지 했다는 수치심에 하루를 보냈다.


인생..

역시 인간은 기본적인 욕구를 이길 수 없는 것이었다.

나약한 인간...


다행히 통근하는 일이 없어지고 나서 장은 평온을 되찾았지만

방심하면 한 번씩 뺨을 쳐댄다.

얼마 전에도 지하철에서 내려서 회사로 걸어가다가

사거리 한복판에서 괄약근에 힘을 주고 심호흡하는 이상한 사람이 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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