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는 무게감
'사춘기'
성장하면서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겪는 질풍노도의 시기이다.
나도 그때는 부정했지만 지나고 보면 나의 사춘기 시절 모습이 있었고, 내 인생에서 가장 합리적이지 못한 행동을 했을 때이다.
우리가 흔히 '무서운 중2' '중2병'이라는 시절, 내가 가장 크게 반항한 것은 당시 학교에서 벌어진 불합리한 상황에 대한 저항 정도였다. 우등생, 반장만 편애하는 선생님들을 골탕 먹여 줄 방법을 친구들하고 공작하고 심지어 내가 선동하는 여학생으로 찍혀서 퇴학까지 당할 뻔도 했지만, 그때는 마치 나는 자유를 억압하는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헌신하는 유관순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던 거 같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냥 웃으면서 그때를 추억해 보는 에피소드 정도로 남아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나는 엄마가 되었고, 그런 사춘기에 접어든 딸아이가 내 앞에 마주하고 있다.
사람들은 사춘기와 갱년기가 만나면 갱년기가 이긴다고들 하는데, 나는 불행히도 어린 나이에 딸아이를 낳아서 이제 30대 후반으로 아직 혈기가 짱짱하다.
내가 사춘기 딸아이 정도는 컨트롤할 만큼 기력도 있고, 정신력도 강하다고 생각했다.
내 착각이었을까? 아니면 내 오만이었을까?
내 딸은 그냥 누가 봐도 '착한 딸'이라고 할 정도로 워킹맘을 먼저 이해해 주는 배려심 많은 아이였다.
기저귀를 차고 셔틀버스에 올라가던 딸아이의 뒷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짠하다.
바쁜 엄마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은 유치원에서 보내고, 돌아와서는 돌봐주는 아줌마와 시간을 보내야 했고, 동생이 태어나고 나서는 그나마도 모자란 엄마와의 시간도 동생과 나누어서 지내야 했을 것이다.
가끔 '애어른'이 되어버린 것만 같아 더 맘이 아팠지만, 딸아이에게 나의 미안함을 티 내지 않으려 했다.
왜냐고?
나의 미안한 감정이 혹시 딸아이를 망칠까 봐 두려워서이다.
인생에 정답이 없듯이 '엄마'의 모습에도 정답은 없다.
엄마는 내가 선택해서 가지는 관계가 아닐뿐더러, 다양한 엄마의 모습이 우리 주위에 존재한다.
나는 워킹맘으로 일과 육아를 균형 있게 유지해 가는 최선의 방법을 찾기 위해 늘 노력했고, 이 두 가지 토끼를 다 완벽히 잡을 수 없다는 전제하에 나를 괴롭히지 않으려고 했다.
다들 나에게 워킹맘인데도 어떻게 아이들을 이렇게 꼼꼼하게 잘 챙기냐고 비법을 물어보곤 했고, 나 역시 나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겨왔었다.
그런데 난 지금 엄마의 무게감에 내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고 있다.
어느 날부터 딸아이 눈빛이 변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6학년 여름쯤, 생리를 시작하고 나서 딸아이는 무척이나 예민해졌다.
그 시기 예민하고 날카로워지는 것쯤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고, 주위의 사춘기를 먼저 겪은 선배 엄마들을 통해 들은 것들로 이미 간접 상상을 수십 번 했던 것이라 놀랍거나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딸아이의 주변 친구'
딸아이는 지금껏 누구와도 트러블이 난 적이 없었고 동성이든 이성이든 모든 친구들에게 인기 많고 다정한 아이였으며 친구 간의 선을 잘 지키는 아이였다.
아이가 사춘기라고 내가 인식한 다음부터 딸아이 주변의 친구들에게도 변화가 왔다.
이 시기 '친구'는 내 목숨과도 같이 소중한 시기이기에 부모형제보다는 친구관계를 더 소중하게 아이들이 생각한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 나이 정도면 이제 부모가 아이의 친구관계를 관여하거나 의도적 관계를 맺는 시기가 아니기 때문에 아이들 스스로 자신과 맞는 친구들과 그룹핑되어 지내게 된다.
내 딸아이 주변의 친구들이 내가 알지 못하는 아이들로 바뀌면서 딸아이와 공감하는 부분이 크게 줄기 시작했다. 딸아이의 sns 대화 내용을 슬금 볼 때면, 친구들과의 대화는 모두 'ㅋㅋㅋㅋ'로 시작해서 'ㅎㅎㅎㅎ'로 끝나는 게 대부분이라 도통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친구가 바뀌었다는 것은 내 딸도 바뀌었다는 것인데 난 그 사실을 미쳐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엄마로서 어리석고 후회스럽다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또 하나 변화는,
딸아이는 예전에 하지 않는 행동들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게 바로
'남과의 비교'였다.
'난 왜...' , '누구는....'이라는 시작의 말투가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외적 환경 : 주변 친구 변화) + (내적 변화 : 남과의 비교) = 모녀의 불화
이런 공식이 딸아이와 내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한 배경이다.
이때 딸아이는 어떤 질문에도
'몰라' '됐어' '알았어'로만 대답하였고, 그런 딸아이가 밉기까지 했다.
대화를 하지 않으면서 소통 단절이 되었고 딸은 나를 오해하고 나는 딸을 불신하게 되었다.
사춘기 이전의 우리는, 딸아이와 나는 정말 다정한 모녀였었다. 나는 나를 이해해주는 딸아이에게 늘 고마웠고, 사회생활을 하는 커리어우먼의 엄마를 자랑스러워하는 딸이었다.
그런 우리 관계는 딸아이의 사춘기라는 소용돌이 과정에서 산산조각 나듯이 쉽게 무너져 버렸다.
딸은 내가 자신을 압박하며 상처를 줬다고 '정서적 아동학대'로 엄마를 고소했고,
영화나 소설에서 있을만한 상황에 나는 처했다.
어디 가서 이 억울한 상황을 소리 내어 항변하고 싶어도 엄마이기에 그럴 수도 없다.
내가 상상하지 못한 상황들을 딸아이 사춘기 과정에서 나도 겪고 있다.
딸은 여전히 사춘기라는 과정에 놓여있고, 아직 엄마의 입장이나 남을 배려할 만큼 성숙하지 못하였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해 줄까..?라는 걱정마저 지금은 들게 한다.
부모와 자식이라도 왠지 우리 둘 사이의 감정의 골은 다시는 건너지 못하는 강을 건너고 있는 것만 같다.
나는 이 상황을 슬기롭게 해결해 보고자 전문가 강연도 듣고 책도 읽고 주변 엄마들과도 사춘기 아이들의 경험을 공유해 본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반론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엄마가 된 게 죄는 아니잖아요'
왜 다들 엄마가 변화해야 하고, 엄마가 잘못하고 있고, 엄마가 몰라서 그런 것이고, 엄마가.... 라면서 엄마를 압박한다.
엄마도 내가 처음 겪는 역할이고 나도 엄마로서 신입이다.
물론 실수도 많고 부족한 게 많고 배워야 할 것도 많다.
그렇지만 신입에게 무조건 지적만 한다고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걸까?
신입도 누군가의 응원과 칭찬, 격려도 필요하다.
엄마이기에 마땅히 감수해야 할 상처 따위는 사람들이 개의치 않는다.
'사춘기 딸'은 어떤 행동과 말을 하여도 우리가 이해해야 하고 용납해야만 하는 것 같다.
나도 이제는 내 딸이지만 '사춘기 내 딸'은 무섭다.
사춘기라는 공포의 폭풍이 지나가면 무지개가 그림 그리는 청렴한 하늘이 언젠가 올 것이라 믿고 오늘 하루도 버티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