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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박 Nov 13. 2021

이 말을 하고 싶어서.

한 번도 하지 못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연락을 받았을 땐 노르웨이는 아직 깜깜한 새벽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예상한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었고, 일말의 작은 미신 같은 힌트- 이를테면 평소 본 적 없는 까만 까마귀 떼를 집 주변에서 본다거나, 아버지 생각이 근래에 이유 없이 많이 난다 거나 하는- 도 없는 평범한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의 존재는 공룡의 잔해처럼 유년기 마른 기억의 땅에서 발견될 뿐이었지만, 그래도 먼지 같은 눈물이 났다.

아빠는 작은 아파트에서 혼자 외롭게 고독사 하셨다.


"아빠"란 말은 나에겐 써보지 않은 새 돈처럼 빳빳한 체로 세월과 함께 낡아갔었다. 아빠란 말은 늘 배고픈 단어였고, 쓰면 기분 좋아지는 향수 같았다. "엄마"란 말이 주는 수많은 기억과 따뜻함과 애증이 없던 아빠란 단어는 마치 외국어 같았고 , 유년시절 어느 시점에서 끊긴 기찻길 같았고, 결국엔 나에게 지구에서 없어진 단어가 된 것이다.


아빠는 늘 바빴다. 큰 배의 선장이었던 아빠는 늘 수평선을 넘느라 가족들에겐 닿지 않았다. 진주 촉석루 밑에서 한약방을 하시던 할아버지와 약국을 하시던 큰아버지의 식구들 틈에서, 남편이 늘 부재중이던 엄마는 그럴수록 더 밝은 웃음과 큰 목소리로 이야기하셨지만 외로우셨으리라. 결국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님은 이혼하셨었다. 부모의 이혼은 삼 남매인 우리에게 지구의 멸망 같은 것이었다. 어린 우리에겐 마치 살던 집 지붕이 태풍에 날아가고 바람만 모질게 부는 허허벌판에 버려져 보호막 없이 서있어야 하는 심정이랄까.


엄마는 우리를 잘 사는 큰 아버지 집에 맡겼다. 당시 진주에서 큰 약국을 하던 큰아버지는 첩과의 사이에서 세 아들이 있었고 그 집에 어린 우리는 맡겨졌다.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엄마는 왜 우리를 거기에 맡겼을까. 그 집에서 우리는 일제강점기를 보냈다. 무수한 핍박과 잔인한 체벌, 어린애들이 겪기엔 너무한 잔혹동화들의 나날들이었다. 그 얘기들을 다 하자면 아빠를 미워하게 될 것 같아 지금은 지나가야겟다. 그 집에서 보낸 일여 년 동안 조막만 했던 나와 언니의 손은 겨울 빨래로 동상이 걸려 고름이 나왔고, 그동안에도 아빠는 두어 번 다녀갔을 뿐이었다. 그때도 아빠는 멋지셨다. 아빠의 여자 친구는 올 때마다 바뀌었다. 엄마는 우리를 데려오기 위해 늘 일을 하셨다. 서울에서 포목점을 하신 외할아버지는 아들 셋과 외동딸로 엄마를 두셨다. 숙명여대 영문과를 나오신 서울내기였던 엄마는 자존심이 세셨다. 그래서 없는 소리 안 하시려고 더 많이 일을 하셨고, 결국 동상 걸린 언니와 내 손을 보고는 일 년 만에 우리를 데려오셨다.  엄마는 늘 아빠 욕을 하셨고, 아빠를 미워하던 마음은 버릇이 되다시피 한 엄마의 욕으로 많이 퇴색되어갔다. 그 이후의 스토리도 구구절절이다.


아빠를 마지막으로 본건 2019년, 한국에 갔을 때다. 기억 속에선 늘 바쁘고, 멋지고, 여자 친구가 맨날 바뀌었던 당신은 시간을 한 번에 가로질러 나와 하얀 백발로 변해있었다. 아빠는 웃었다. 나도 웃었다. 시간을 건너온 우리는 손을 잡고 걸었고, 나는 아빠란 말을 아껴부르지 않았다. 아빠, 왜 우리를 키우지 않았어라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 행복한 순간을, 누려 보지 못한 시간들의 질책이나 미움보다 아빠로 태어난 그와 그의 딸로 태어난 내가 만나 서로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우리는 그냥 각기 다른 삶을 살았을 뿐이었다. 당신도 태어나자마자 할머니를 여의고 사랑받지 못한 삶을 사셨기에 어쩌며 한평생 찾아다닌 게 당신의 엄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의 힘들었던 시간들과 또 어느 모퉁이에선 힘들지도 모를 남은 인생의 어느 날 중, 그날은 그냥 행복하게 웃고 싶었다.


노르웨이로 돌아와 간간히 이어지던 아빠와의 통화는 즐거웠다. 아빠와의 마지막 통화에서 당신은 러시아행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에서 헬싱키까지 여행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헬조선 한국이 싫다고 하셨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여행을 위해 돈을 모으노라고, 하얀 설경을 보며 유럽을 달리고 싶다고 하셨다. 그 후론 카톡이나 메신저에 대한 답장도 잘 안 하셨고, 생일 축하 메시지도 읽었다는 표시만 될 뿐이었고, 가끔 올라오는 아빠의 페이스북에는 추억의 노래 링크가 눈에 띌 뿐이었다.


당신의 마지막 흔적을 보고 싶어서 페이스북에 들어갔다. 외로움이 포스팅된 곳. 배경화면이 페북에서 1년 선물로 준 불특정 다수로 그려진 페북 피플을 표현한 일러스트였다. 유령 같았다. 그래도 아빠는 이런 글이나마 끄적거릴 수 있는 페북이 좋다고, 읽는 이는 없는 포스팅을 올리고 계셨다. 잉꼬 새들이 서로 부리를 비비는 포스팅을 여러 개 지나고 나오려는데... 유산처럼 내 사진이 포스팅된 게 보였다. 친구 아닌 친구... 아빠는 나를 그렇게 부르고 계셨다. 내게 평생 하지 않으셨던 사랑한다는 말 대신 거기에 좋아요를 누르셨다.

 

우리는 늘 어긋났다. 우리는 서로에게 고향이 되지못했고, 그렇다고 서로가 그립다고 말한 적도 없었다. 그가 떠나고자 한 곳은 아랫목이 추운 한국이었고, 내가 여기서 그리워하는 곳은 아랫목이 따뜻한 한국이었다.. 아빠의 마지막 포스팅은 30% 할인 티켓 가족 레스토랑이었다. 그 마지막 저녁을 같이 하지 못했다. 그래도 아버지...


그래도 아빠, 러시아행 열차로 닿은 그곳은 따듯한가요?

아빠.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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