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이민자, 여성 과학자, 여성 최초의 노벨 물리상 수상자, 최초로 노벨상을 두 번 받은 과학자, 여성 최초 소르본 대학 정교수. 마리 퀴리를 부르는 수식어는 많다. 그러나 그녀의 진짜 이름, 마리 스클로도프스카를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나 역시 마리 퀴리의 결혼 전 이름, 마리 스클로도프스카를 알게 된 건 2018년 뮤지컬 마리 퀴리의 초연을 보고 난 후였다. 사실 '마리'라는 이름도 어린 시절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그때는 퀴리 부인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위인전이 더 많았으니까. '마리 퀴리'로 위인전이 출판되기 시작한 것도 비교적 최근이 아니었던가.
여성들을 지우기 바쁜 역사 속에서, 그 이름을 분명히 남긴 마리 퀴리. 그리고 그의 삶에 대한 뮤지컬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드디어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이 나온다는 생각에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서둘러 예매해서 봤던 창작산실 버전의 초연은, 사실 조금 실망스러웠다. 나는 진심으로 이 공연이 오랫동안 올라올 수 있는 작품이 되기를 바랬었다. 여성 서사의 극을 찾기 힘든 공연계에서, '마리 퀴리'라는 여성 주인공의 이름을 타이틀로 걸고 올라오는 뮤지컬은 처음이었으니까. 그래서 초연을 보고 극장을 나오며 심란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과연 재연이 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초연은 어수선한 부분이 많았다.
그리고 1년이 지나, 마리 퀴리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발 초연에서 잘 고쳐왔기를 바라며 이번 재연을 봤을 때, 기쁘고 벅찬 마음에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초연에서 많은 부분이 변했고, 삭제된 부분도 추가된 부분도 많아 완전히 새로운 작품이 되었다. 아주 좋은 쪽으로, 긍정적으로 달라져서 공연을 보는 내내 배우들과 연출진의 노력에 고마울 정도였다.
감히 말하건대, 뮤지컬 '마리 퀴리'는 혁신이다. 공연계에 여성 서사 작품을 위한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와줄 시초다. 극장 안에서, 관객들은 마리 스클로도프스카와 그의 인생을 함께한 여성들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그토록 목말라했던 여성들의 이야기, 연대하는 여성들의 삶을.
*이어지는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뮤지컬 마리 퀴리는, 임종을 앞둔 마리와 그의 딸 이렌의 대화로 시작된다. 과학자가 아닌 엄마를 알고 싶다는 이렌의 말에, 마리는 자신의 지난날을 회고한다. 이때 장면이 전환되며 마리 역의 배우들은 한순간에 60대 노인에서 20대의 청년으로 변하는데, 개인적으로 볼 때마다 어떻게 저렇게 순식간에 시간을 연기할 수 있는지 속으로 감탄한다.
20대의 마리는 프랑스의 소르본 대학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안느를 만난다. 마리와 같은 폴란드 이민자인 안느는 마리가 수재들만 가는 프랑스의 대학에 입학한 것을 통쾌하다며 기뻐하고, 주기율표에 이름을 남기고 싶다고 하는 마리를 응원한다. 그리고 마리의 주기율표와 폴란드에서 가져온 자신의 길잡이 흙을 서로 교환한다. 마리의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친구를 만나는 장면이 그렇게 펼쳐진다.
마리와 안느는 서로를 응원하고 의지하며 지내왔지만, 마리가 발견한 라듐 때문에 안느와 함께 라듐 공장에서 일하던 동료들이 죽고 난 후, 탑 위에서 대립하게 된다. 직공들의 사인은 매독이 아니며, 내가 죽은 후에 꼭 모두의 앞에서 나를 부검해달라고 외치고 자살하려는 안느를, 마리가 필사적으로 말리며 탑 위로 따라 올라온다. 라듐이 위험하다는 게 알려지면 내 자리가 없어질 것 같았다고 우는 마리와, 나는 당신이 라듐을 발견해서 존경했던 게 아니라 마리 그 자체를 사랑했던 거라고 말해주는 안느를 보면, 나도 눈물을 참을 수가 없어진다.
당신을 당신이기 때문에, 당신 자체로 충분하다고 말해주는 친구가 있어서 마리는 얼마나 든든했을까. 그 끈끈한 우정과 연대 속에서 서로를 마주 보며 부르는 '그댄 내게 별'은 내가 이 작품에서 가장 좋아하는 넘버다. 이렇게 여성 배우들의 아름다운 하모니를 들려주는 넘버가 있었던가. 안느 역의 김히어라 배우의 말대로, '남녀 사랑 듀엣이 아닌 많은 것들을 겪고 버텨낸 인물들이 서로를 지지하며 믿고 나아가는 우정 노래'라서 이 넘버가 너무 소중하다. 이제껏 여성 배우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넘버라서. 이제야 나온 여성들의 우정 노래라서.
루이스와 마리의 관계도 그냥 넘길 수 없다. 그들은 단순히 과학자와 임상실험 대상자가 아닌, 연대의 관계로 나아간다. 마리가 루이스에게 너는 그저 환자인 어린아이가 아니라 나의 실험을 함께 할 동료, 연구자라고 말해준 순간 그들의 끈끈한 우정이 시작된다. 마리는 라듐의 위해성으로 고심하는 순간에도 루이스의 눈을 고치기 위한 실험을 계속하고, 루이스 역시 마리를 믿고 실험에 참여한다. 루이스가 마리의 작은 손짓으로도 그의 기분을 눈치채는 장면도 그 의미가 크다. 루이스가 그만큼 마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그를 믿고 이 실험에 참여한다는 걸 보여준다.
이렇게 서로를 이해하고 아껴주는 건강한 연대의 관계를 보여주는 극이 있었나. 관객들이 얼마나 이런 공연이 나오기를 기다렸는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재연을 너무 훌륭하게 올려주어 감사한 마음이다.
이 작품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캐릭터는 '안느'다. 안느는 단순히 마리와 연대하는 여성을 위해 나오는 역할이 아니다. 안느는 그 시절의 노동자들을 대표한다. 유리 공장에서는 가스로 인한 직공들의 건강 악화에 공장 측에 반기를 들다 결국 그만두게 되고, 언다크 공장에서는 라듐에 피폭되어 죽어가는 동료들과 자기 자신을 위해 진실을 밝히려 고분 고투한다.
안느가 자신의 죽은 동료들을 떠올리며 부르는 '죽은 직공들을 위한 볼레로'는 초연에서 그대로 가져온 유일한 넘버이며, 내가 개인적으로 초연에서 가장 좋아했던 넘버이기도 하다. 이 장면은 직공들의 피부가 어둠 속에서 라듐으로 환하게 빛나는 것부터 시각적으로 충격이라, 소름이 끼치면서 무섭고, 또 슬프고, 직공들에게 순식간에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싸우는 안느에게는, 현재에도 그를 위해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이 투영된다. 숨지 않고 당당하게, 무너지지 않고 단단하게 루벤에게 맞서는 제3라인의 유일한 생존자, 마리와 다른 방법으로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간 안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뮤지컬 마리 퀴리가 나에게 소중한 또 하나의 이유는, 주인공을 마냥 착하고 정의롭게 그리지 않아서다. 뮤지컬이든, 연극이든, 심지어 드라마나 영화와 같은 매체에서도, 여성들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었다. 남자 주인공의 무언가 (아내, 여자 친구, 가족, 내연녀 등)로 나와 그를 돕거나, 방해한다. 착하거나, 악하거나, 마리 퀴리는 이런 정형화된 여성 캐릭터의 틀을 깼다. 주인공인 마리는 계속 성장해나간다. 실패를 두려워하고, 성공을 위해 싸우며,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라듐의 위해성을 알면서도 임상 실험을 계속한다. 자신의 오랜 친구 안느도 한 때는 외면하면서.
탑 위에서 안느에게 두려웠다고 외치는 마리는,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며 눈물을 멈추지 못한다. 라듐의 위해성이 알려지면 내가 쓸모없어질 것 같아서 무서웠다고 우는 마리를, 누가 원망할 수 있을까. 여자는 출입금지라고, 그렇게 배척당했던 곳에서 겨우 자리 잡았는데. 그걸 버릴 수 없었고 버려질까 봐 두려웠고, 그런 감정들이 모두 이해가 되어서 그 장면이 더 슬프게 다가왔다. 그리고 결국 사람을 살리는 과학을 하고자 했던 마리는, 탑 위에서 안느와 약속한다. 라듐이 인류를 해치지 않는 방법을 찾겠다고.
남편인 피에르 퀴리가 마차 사고로 사망한 뒤, 마리는 라듐의 위해성을 알리기 위해 피에르 퀴리를 자신의 실험실에서 부검하고, 그 부검을 실험으로 기록한다. 실험체는, 피에르 퀴리.라고 자신의 슬픔을 억누르며 말하는 마리를 객석에서 볼 때마다, 내 마음이 다 미어진다. 남편의 부검으로 진실을 밝혀야 하는 마리의 심정은 어땠을까.
마지막 넘버에서 이렌이 읽어주는 안느의 편지를 통해 마리의 업적이 소개될 때, 벅차오르는 그 감정을 표현할 길이 없다. 여자 화장실조차 없던 대학교에서, 여자라면 기를 쓰고 배척하는 그 척박한 곳에서 마리는 어떻게 그렇게 꼿꼿하게 살아왔을까. 그는 여성 최초로 소르본 대학의 정교수가 되고, 노벨 화학상을 받고, 부상자 치료를 위해 전쟁터로 뛰어들고, 성별과 나이에 관계없이 연구소에서 많은 제자들을 키워냈다. 자신을 가로막는 벽을 온몸으로 부딪혀서, 이름과 업적을 남기고, 여성 과학자들이 걸어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준 마리가 경이롭게 느껴진다.
마리는 극의 초반부터 이름을 남기고 싶다고 말한다. 원소를 발견하게 되면 이방인이든 여자든 그 사람이 정한 대로 부를 수밖에 없다며, 주기율표에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꿈을 안느에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어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한 후에는, 라듐이 마치 자신의 이름인 것처럼 살아간다.
라듐을 발견하고 난 후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되었지만, 마리는 피에르 퀴리의 부인 정도로 알려지게 된다. 그래서 마리는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 라듐에 더욱 매달리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극 중 노벨상 수상 장면은, 가장 마음이 허탈해지는 씬이다. 라듐을 발견하고 행복해하던 마리가, 수상자는 피에르 퀴리, 라는 말에 자신의 이름이 사라진 것처럼 텅 빈 얼굴로 서있는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그 감정을 모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피에르 퀴리는 평생 몰랐겠지. 그는 마리의 그 얼굴을 보지 못했으니까.
그 후에 마리는 더욱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라듐이 자기 자신이라고. 라듐으로 인해 이렇게라도 내 이름이 불려질 수 있는 거라고. 라듐이 위험한 물질이라는 것을 깨닫고 '너는 누구, 너는 무엇, 너의 또 다른 이름은 나'라고 울부짖으며 라듐을 지켜내려고 하는 그에게서 그 마음이 온전히 느껴진다. 간신히 지켜온 자신의 자리를 놓을 수 없기에 라듐의 위해성과 가능성을 함께 알리려고 했던 마리의 마음. 임상 실험을 멈출 수 없던 그 절박함.
마리는 마침내 역사에 이름을 남겼고, 그리고 또 다른 이름들이 이 작품의 2막을 이끌어간다. 안느가 죽은 언다크의 직공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를 때마다, 마지막 넘버에서 그들이 마리가 폴란드의 이름을 남긴 주기율표에 한 명 한 명 올라설 때마다, 그렇게 벅차고 눈물이 날 수가 없다. 안느 코발스키, 마르진 리핀스키, 아멜리에 마예프스키, 폴 베타니, 조쉬 바르다.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이 공연에서 그 의미가 아주 크다. 이방인으로서, 여성으로서, 세상에 이름을 남기고 온전히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쉽지 않았으니까. 지금도 여전히 여성을 지우고 있는 역사 속에서, 그 이름을 남길 수 있다는 건 특별하고 벅찬 일이다.
극의 마지막에, 마리의 딸 이렌이 마리가 앉았던 실험실 책상 앞에 앉고, 마리와 안느가 각각 원소기호에 서서 끝나는 장면을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한다. 이렌이 마리의 길을 이어간다는 의미가 잘 전달되고, 또 앞으로 많은 이렌들과 마리들이 그 길을 이어갈 것처럼 벅차고 희망찬 엔딩이다. 실제로 많은 여성 과학자들이 그 길을 따라가고 있다.
마리 퀴리가 초석을 닦아주기는 했지만, 과학은 아직 여성이 바로 서기가 어려운 곳이라고 한다. 사실 어느 곳이든 여성이 일하기 쉬운 곳이 없다. 차별과 편견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공연계에서도, 그리고 내가 일하는 직장에서도. 뮤지컬 마리 퀴리를 시작으로, 공연계에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여성 서사가 주를 이루는 작품이 더 많아지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고 과학과 다른 분야에서도 여성들이 이름을 잃어버리는 일이 더 이상 없기를 바란다.
삼연은 2층석이 있는 극장에서 올렸으면 좋겠다. 조명 연출이 너무 좋아서 2층에서도 꼭 한번 보고 싶다. 바닥에 조명으로 쏘는 주기율표와 원소기호를 2층에서 보면 색다르게 다가올 것 같다. 그리고 층고가 더 높은 공연장이라면 탑도 더 높게 가져갈 수 있을 것 같고, 2층 객석에서 탑 위에서 부르는 마리와 안느의 아름다운 하모니를 눈높이에 맞추어 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고맙고 소중한 뮤지컬 마리 퀴리. 삼연, 사연을 넘어 10주년 20주년 공연까지 할 수 있는, 롱런하는 작품이 되기를 바란다. 언제나 다시 만날 수 있는 뮤지컬이 되기를.
*뮤지컬 마리 퀴리는 2020년 3월 29일까지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공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