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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열리 Jul 15. 2022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에 가다

[열리는 삶] #001


2022년 7월 8일, 회색빛 습도에 숨 막히던 오전, 상담을 받았다.

​​


시간이 들었다.


내가 우울증이라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언젠가는 상담에 가야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 병원에 방문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데에 몇 년, 상담 예약을 잡는 데에 몇 달의 시간이 들었다. 결심 이후 예약하는 데에 이토록 긴 시간이 걸린 이유는 대체로 많은 병원이 전화를 통해 예약을 해야 하기 때문인데, 그 간단한 통화 과정이 내게는 왜 그렇게도 어려운지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도 나도 해답을 찾지 못한 문제이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놀라우리만큼 답답하겠지만(물론 스스로도 그러하다), 어쨌든 오늘 나는 결국에 정신과에 발을 디뎠다.


​​

처음은 아니다.


대학에 입학하고 2학년이 되어서였나, 1학년 겨울이었나,


나는 불안장애와 우울증 진단을 받았고, 공황장애 증상이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때 다녔던 정신과 의사 선생님은 지금 생각해도 대하기 썩 편한 분은 아니다. 진료시간에 늘 혼나는 기분이 들어 자꾸 주눅이 들었던 탓에 몇 번 가보고 상담도 중단하고 약도 처방받지 않았으며, 심해지는 불면증은 아빠의 수면제를 훔쳐먹으며 버텨냈다.


한창 연예인들이 방송에서 공황장애가 있다는 고백을 많이 하던 때라 그렇게 낯선 단어는 아니었지만, 나는 연예인도 아닌데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지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또한 스스로가 한심함과 동시에 내가 그런 증상을 실제로 겪은 것이 맞는지조차 의심될 때도 있었다. 솔직하게 마음 한구석에서는 피해자 서사적인 경향도 있었는데, 지금 돌아봐도 꽤 자의식 과잉이 심했던 나이였다.




노력을 들였다.


병원을 고르는 것이 내게는 꽤 스트레스받는 일이었다. 내가 정한 조건은 그리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는데, 첫째는 서울지역 내, 현재 내가 사는 곳에서 가까워야 한다는 점이다. 멀면… 힘드니까…


둘째는, 여자 선생님이 계신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전에 상담받던 선생님이 별로였던 것은 그분이 남성이어서는 아니었겠으나, 이전 선생님과의 공통점이 괜히 싫었다. 또한 의사 선생님이 나와 같은 여성이라면 나 스스로가 여러 주제에 있어 솔직하게 마음을 열기 좀 더 편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셋째는, 병원 후기에 객관적인 나쁜 평이 없을 것이어야 한다는 조건이다. 여기서 객관적이라는 말이 중요한데, 쓰면서 보니 주관적이라고 쓰는 것이 더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부정적인 평가가 있어도 내 기준에서 문제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 항목을 넣은 이유는, 다른 종류의 병원에 비해 정신과의 경우 환자들이 의사의 작은 반응이나 병원 스태프들의 친절도에 대단히 민감하며, 이에 따라 개인의 평가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내가 선택한 병원도 한 블로그에서 테러에 가까운 수준의 후기가 있었으나, 그 사람의 다른 게시물들을 살펴본 결과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여 고려대상에서 제외했다.




예약일이 되었다.  


병원은 산뜻하고 시원했다(한여름이라 밖이 굉장히 습하고 더웠다). 물론 내 상태는 스스로 느끼기에 우울함의 정도가 그간에 비해 꽤 깊은 수준이었으므로 내가 배우라고 생각한다면 감정신을 촬영하기 딱 좋고, 가수라면 슬픈 발라드를 부르기에 딱 좋은 상태였지만, 곧 상담을 받는다는 사실만으로도 꽤 위안이 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10시 30분에 예약을 하고 미리 체크해야 할 사항들이 있으므로 10시까지 방문하라는 내용으로 통화를 마쳤는데, 데스크에서는 내 예약은 오후 4시 30분이라고 했다(두 개의 선택지 중 나는 오전에 방문하겠다고 말씀을 드렸었다). 직원분께서는 나에게 이따 다시 올 수는 없겠냐고 물었고, 물론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되니, 그냥 집에 가고 싶었다. 데스크에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물론 상황 자체에 언짢은 기분이 나기는 했다). 일을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 그저 일이 안되려니 이렇게도 안되는구나, 싶었을 뿐이다. 우울증에 걸리면 라면이 반으로 쪼개지지 않아 인덕션에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일만으로도 다 내던지고 주저앉아 울어버리고 싶은 상태가 된다. 어떻게 해결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게는 다행스럽게도 예약한 시간에 진료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상담을 받았다.


울지 말자고 다짐을 이백 번은 했을 텐데, 죽으면 무엇이 편할 것 같은지와 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지 않을 것인지를 물어보셨을 때 눈물 참기를 포기했다. 원래 나는 누구 앞에서 우는 걸 꺼려한다. 나약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쓰니까 좀 일본 애니에서 나오는 대사 같긴 하지만, 저 문장이 모든 이유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스스로의 감정에 너무 빠져있는 사람 같아 보인다고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내 증상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것 같아 미리 써갔는데,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다음은 내가 적어간 증상에 대한 내용이다. ​


1. 집중력 문제

- 문장 하나를 집중한 채로 읽지 못함

- 상황에 적확한 표현이 예전처럼 떠오르지 않음

- 문장을 읽고 무슨 뜻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순간적인 에너지를 사용해서 생각을 해야 함

- 공상, 상상, 망상이 일상화됨, 혼잣말로 튀어나오는 경우 있음

- 모든 것이 지루함과 동시에 불안함

- 열심히 하려고 하다가도 작은 어려움에도 다른 생각에 빠지게 됨

2. 감정적 문제

- 19살부터 공황장애가 있었음(22세까지 간헐적으로 병원 진료를 받음), 21세부터 23세까지 불면증 증세로 수면제를 복용함, 대중교통 이용 등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현재는 약간의 불편함만 있을 뿐 이상의 어려움은 없음

- 20세에 우울증 진단을 받고 상담센터에서 상담을 받음

- 사람이 많고 북적이는 곳에 가거나 그런 곳을 지나가는 것, 타인과 눈을 마주치는 것이 불편하고 피곤함

- 가벼운 증세를 제외하고는 약 1년간 공황과 같은 증세가 없다가, 올해 초(2월 말) 준비 중인 시험 중 갑작스레 공황발작을 일으킨 이후 우울감 및 무력감이 상당히 심해짐

- 길을 걷다가 갑자기 누군가 나에게 상해를 입힐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어 타인이 정면에서 가까이만 와도 심하게 놀람

- 자주 울음이 차오르고, 하던 것을 모두 내려놓고 울고 싶은 마음이 듦

- 사람들 앞에서는 잘 정비되고, 정돈된 감정상태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가능함

- 감정이 일정 수준 이상을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손톱으로 손등에 자극을 가함

- 늘 죽고 싶고, 어떻게 죽으면 좋을지를 상상하나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는 않을 것임

- 스스로의 감정이 어떨 것인지 예측이 불가능

- 약 1-2달 정도의 주기로 의욕이 넘치다가 무기력해짐

- 늘 우울함, 사고로 사망하고 싶음

  3. 생활, 신체적 문제

- 모든 일에 무기력하고 비정상적으로 잠이 옴, 정신이 깨는 것은 가능하나 몸을 일으켜 생활을 하는 것이 말도 안 되게 어려움, 강제적으로 눕거나 잘 수 없는 상황을 만들면 구토감, 극심한 피로감, 두통, 전신통증 등이 있음

-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와 그 중요도를 알고 있음에도 실천하지 못함

- 청소, 샤워, 운동은 꾸준하게 진행(하려고 노력함)

- 버릇처럼 끊임없이 계획을 짜지만 수행하지 못함, 최근에는 계획을 짜는 것조차 고통스러워짐

- 살이 찐 스스로의 모습이 혐오스러움  

- 하지불안증 있음, 움직이지 않고 한 자세를 오래 유지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음

- 호흡이 조금이라도 어려운 상태가 되면 극도의 불안감이 듦(이전보다는 꽤 나아짐)

- 반복적, 규칙적인 소리(공사장 소음, 새소리 등) 및 특정한 소리를 참지 못하고 순간적인 분노로 이어짐, 소리에 예민하고 큰 소리를 통증으로 인식함

4. 관계에서의 문제

-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문제가 없으나 작은 대화에도 많은 에너지를 소모함

- 사람들과 같이 있고 싶으면서도 혼자 있고 싶고 힘든 마음에 울컥하게 됨

이렇게 써서 그렇지 사실 이렇게까지 엉망은 아닌 것 같기도 함… 꽤 괜찮기도 함..


나는 불안과 우울지수 모두, 특히 우울지수가 정상 범위에서 벗어나 있었다. 수치상에서의 결과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심각하여 조금 당황스러우면서도, ‘그래서 그랬군’하는 생각에 어느 정도 위안이 된 것도 사실이다.

상담을 받은 것만으로도, 내 이야기를 누군가가 차분하게 들어주고 내 증상을 봐주려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것 같다.



가기를 잘했다.


선생님은 차분하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셨고, 내 상황과 생각을 단정 짓지 않으셨으며, 무리하게 나를 위로하려고 하시지 않으셨다. 나는 친절한 사람은 좋아하지만 과도하게 친절하여 가까이 다가오려는 사람은 경계하는 편인데(골 때리는 성격이다), 정말 적정한 수준의 접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진이라서 그런지 상담은 30분 정도 진행되었고, 아마 재진인 경우에는 15분 정도인 모양이다.


상담을 끝내고 나와 진료 이전에 작성하던 설문지를 마저 작성하고 집에 돌아왔다. 병원에서 머문 시간은 한 시간 정도 되는 것 같다.


물론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한 번의 상담으로 나에게 이렇다 할 변화가 있지는 않았다. 큰 일을 해낸 것만 같은 기분에 점심은 맛있는 걸 먹겠다며 포장해온 파스타를 우적우적 먹었지만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우울감이 꽤 심해진 이후로 종종 있는 일이었다. 무엇이 이유인지 모른 채 눈물을 줄줄 흘리며 의미 없는 식사를 마쳤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희망이 뇌의 어느 구석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혼자 보낸 길고 축축한 낮과 밤 동안 나는 이것을 줄곧 바라 왔던 것 같아 스스로를 골짜기에 두었던 시간에 대한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처방을 받았다.


내가 처방받은 약은 웰정, 모사프로에스알서방정15mg과 환인클로나제팜정0.5mg이다. 첫째는 우울증 치료제이고 둘째는 소화제의 일종이다. 셋째는 신경안정제에 해당한다.


꾸준히 성실하게 치료를 받고 약도 복용할 생각이다.




글을 썼다.


처음이라 정갈하지 못하고, 깔끔한 레이아웃을 갖추지 못했으며, 지나치게 글이 긴 것 같기도 하다. 앞으로 계속 쓸지 안 쓸지 여부조차도 확실하지 않다. 또한 한 편의 글을 포스팅하고 스스로의 열혈독자가 되어 나 자신의 글을 반복해서 읽고 끊임없이 문장을 다듬을 나의 모습이 먼발치서부터 꼴사납다.


그래도 절반쯤은 기록용, 나머지는 우울에 일상이 잠식된 나와 교집합이 있는 타인을 위해 썼다.



나는, 낫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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