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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열리 Jul 15. 2022

뜻했던 변화를 맞이하다

[열리는 삶] #002



며칠 전 우울증 치료의 서막을 연 뒤, 우울증이 형성한 내 일상에는 지각변동이라 부를 만한 변화가 있었다. 그 사이에는 나의 부단한 노력이 한 자리를 차지했지만, 일상이 어렵지 않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평범한 일들로 느껴질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 대청소와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집을 완전히 뒤집어 청소를 하고 나면 이전과 다른 집인 것처럼 그 분위기마저 바뀌는 것 같지만, 매일의 인간 활동과 공기 중의 미세먼지를 비롯한 많은 요소들로 인해 다시 야금야금 먼지가 차오르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다.

그래도 한 번의 환기가 주는 산뜻함이 있으니, 세균 같은 내 우울은 며칠간은 꽤 괜찮은 정도를 유지할 것이다.




계획을 재개했다.


계획대로 수행하는 것은 둘째 치고, 계획을 짤 힘조차 없던 최근의 날들을 청산했다. 요즘 자신을 소개할 때 제일 대표적인 지표가 된 MBTI를 통해 나를 설명하자면, 나는 극강의 J로 스스로를 칭하고, 또 그렇게 불렸다. 인생의 각 단계는 물론이거니와 매년, 매 달, 매주, 매일, 하다못해 외출 준비를 할 때도 메모장에 준비 순서를 적는 날도 허다했다. 계획은 행동의 동기가 되기도 하며 일종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모든 과정이 불가능해졌다. 그날의 날짜를 확인하는 것조차 고통이었고, 지금이 몇 시 인지를 아는 것이 불쾌했다. 나는 시간 위에 둥둥 떠 축 늘어져 부유하는 해조류가 되어 긴 시간을 보냈다.


의욕이 나도록 도와준다던 약(웰정) 때문인지, 플라세보 효과인지, 위기감이 들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플래너를 채우고 리스트를 하나하나 체크해가며 시간의 흐름을 밟아나갔다.


물론 상담 후 며칠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원래 공부는 정각부터, 운동은 내일부터, 새 사람이 되는 것은 월요일부터 하는 게 세상의 규칙이다…



주변인에게 밝혔다.


주변인이라고 하기에는 소중한 사람들이다. 어쩌다 보니 가족이 아닌 친구에게 제일 먼저 우울증 진단을 받고 상담에 다녀왔다는 소식을 전하게 됐다. 내가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친구들 중에서도 가까운 친구다. 그리고 따로 살고 있는 언니에게, 오늘은 엄마에게 전화로 이야기를 전했다. 내가 처음 상담받던 날은 부모님이 2박 3일간의 여행을 출발하시는 날이었기 때문에, 기분 좋은 여행길에 내 진단명을 투척하고 싶진 않아 며칠을 미루었다. 특히 엄마는 왠지 당신 탓이라고 생각하실 것만 같아 가장 가까움에도 괜히 아무 일도 아닌 척하며 말하는 전략을 세웠다.


이제 제일 중요한 것은 주변 사람들의 당연한 이해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내 상태는 내 것이고, 그들의 도움과 배려는 결코 당연하지 않다. 또한 우울증이라는 사실을 방패로 어떠한 무례함이나 상처 주는 행동을 정당화해서도 안된다. 동시에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는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은 정말로 끔찍하다.


물론, 도움을 준다면 기꺼이 감사하게 받을 것이다. 조언을 한다면 들을 것이고, 위로를 한다면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증상이 결코 나의 핑계가 되지 않도록 스스로 마음을 자꾸 가다듬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환경을 바꿨다.


나는 목표하기로는 하루 12시간 이상을 공부로 채워야 하는 수험생이다. 공부를 시작할 즈음에는 집에서도 공부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었고, 오히려 혼자 편하게 공부하는 방식이 더 편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기력에 갇힌 이후로 공부는커녕 허리를 세우고 앉는 것조차 힘들었기에, 이제는 환경을 바꾸어 독서실에 출석하기로 했다.


사실 지금 다니는 독서실은 상담 일주일 전에 등록한 곳인데, 공부를 해야겠다는 의무감에 결제는 해두었지만 가는 둥 마는 둥 하여 환불을 고민하던 곳이다. 그래도 새 다짐으로 시작한 덕분인지, 교시 제로 운영되는 덕인지 내키지 않아도 해당 교시가 끝날 때까지는 자리를 지키다 보니 어느새 하루를 꼬박 출석하게 되었다.


정리와 물건 배치에 약간의 강박이 있는 터라 환경 변화를 선호하는 편은 아니지만, 꽤 널찍한 책상과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을 사용한 인테리어가 새 공간의 많은 단점 중에도 돋보이는 장점이 되어주었다.




그럼에도, 매시마다 성실하게 나를 찾는 우울함은 초단위로 나를 좌절하게 한다. 또 상담받은 사실은 전했지만 ‘당뇨병 환자의 췌장이 인슐린을 과소 분비하듯, 내 뇌도 적정한 기능을 하지 않고 있을 뿐이야’ 하고 얼마 전에 읽은 책의 한 문장을 내 문장의 끝에 재빨리 덧발랐다. 그러니까 나는 마음은 전하지 못했다. 나는 그럴 자격은 없는데, 그래도 꽤 우울하고 힘들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어디가 아픈지 모르는 채로 영문모를 울컥함을 견뎌내는 날들이 다 끝나고 나면, 그때에 내가 오래 앓았던 적이 있다고 지금을 추억할 어떤 미래가 오기는 할지, 아직은 모르겠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내 작디작은 성과가 소중하게 쌓인 하루였다고 정리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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