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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혜 Jul 03. 2023

내가 고집스레 집착하는 음식

1.  2022년 2월부터 브런치에 글을 올리지 않았다. 독서 에세이나 서평이라는 이름으로 몇 번 올리긴 했지만. 늦게 시작한 글쓰기는 무식無識이 용감한 수준을 넘어서 무모하게 덤볐다. 처음엔 그랬지만 갈수록 무모했던 만큼 글을 쓰는 것이 지금도 부끄러워서 선듯 나서지 못하겠다. 그동안 수필을 배우고 쓰면서 은연 중 생긴 버릇이 서두를 어떻게 시작할까, 어떤 내용으로 전개할까 등이다. 


  글머리가 명상을 하면 수시로 연상된다. 망상으로 치부하며 떨쳐버리고 한 생각으로 전환하기를 오늘도 하였다. 이렇듯 버리려니 미련이 남아서, 다시 도전하려니 진전없는 글에 대한 나의 글솜씨에 움츠러들었다. 오롯이 글쓰기에만 매진하여도 만족한 글이 써지지 않을 텐데 그러한 상황이 아니어서 많이 망설였다. 망설이는 것보다 생각을 표출하며 글로 다듬는 훈련을 새롭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 같아 감히 '불편한 글쓰기 1기'에 도전장을 내밀어 봤다.  


   첫번 째 과제가 '내가 고집스럽게 집착하는 어떤 음식 절대 변할 수 없는 나만의 기준이 되는 음식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 

왜 고집하는지, 왜 바꿀 의지가 없는지 누군가 새로운 음식을 나에게 추천하거나 권해줄 때, 내가 고집하는 음식에 대한 기준 때문에 그 추천을 배척한 적이 없는지 소개해 주세요.'다.


  이 과제를 보는 순간 '김치'가 떠올랐다. 나는 알맞게 익은 김치 하나면 다른 반찬이 없어도 된다. 잘 삭은 김치는 굵은 멸치만 넣고 김치찌개를 끓여도 시원하면서 맛이 있다. 찌개뿐만 아니라 수고롭지만 김치전, 하나 더 언급하자면 김칫국물에 국수를 말아 먹는 것. 멸치와 채소 우린 육수와 김치 국물을 체에 곱게 걸러서 함께 섞는다. 그 다시물을 국수에 붓고, 김치를 잘게 썰어서 볶은 참깨에 버무려 고명으로 올린다. 이 김칫국물 국수가 별미라고 여긴다.


  14쪽 각주에도 보면 "김치 국물을 먹는 경우도 있다. 김치 국물은 김치볶음밥의 간을 맞추거나 별 특징이 없는 국수 국물에 생기를 주는데 긴요하게 쓰이고, 다른 먹을 게 아무것도 없을 때 밥에 비벼 먹으면 별미다."


  김치 국물에 밥을 비벼 먹어도 정말 맛이 있다. 아마 장 하준 작가도 비벼서 먹은 경험이 있는 가보다. 각주의 내용은 식구가 분가나 독립을 하지 않았을 때 해당되던 이야기다. 현재는 김장을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내 손으로 담근 김치류가 냉장고에 한 두가지는 꼭 있다. 남편이 나를 김장에서 졸업시켰으니 대안으로 남편의 입맛을 충족시켜주어야 할 것 아닌가. 


  시대적인 상황이 언제나 같지만 않았고, 주관도 변화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무상함을 심각하게 마주하며 살고 있다. 김치는 내가 고집스럽게 집착하지 않으나 나만의 기준이 되는 음식임에는 틀림없다. 김치를 한 번도 안 먹을 망정 상차림에서 제외시키지 않으니까. 70년 세월이 김치와 함께 하였으니 습관적으로 뺄 수 없는 음식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근래 김치를 먹지 않고 넘어가는 예를 종종 감지한다. 김치가 없어도 큰 불편함을 느낄 수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단 맛이 강한 팥빵을 가끔 먹는다. 역시 위에서 받아들이지 못하여 반응이 나타났다. 나는 팥이 든 빵이나 떡은 되도록 피하고, 먹을 땐 소를 다 털어버린 뒤 거죽만 먹는 사람이다. 팥이 아무리 사람의 몸에 좋고, 단 맛을 가미하여도 속이 부대끼니 얼른 손이 나가지 않는다. 몸이 거부하니 자연스럽게 팥은 나의 주변에 두지 않게 되었다. 팥에 대한 부정적인 개념이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김치가 변화했다. 이미 오래 된 사실이다. 동치미는 초겨울 동지 전에 담가서 먹는 음식으로 알았다. 그동치미가 한 여름에도 톡 쏘는 맛이 나도록 담그는 방법이 유튜브에서 넘친다. 더하여 냉면은 겨울의 대명사였다. 예전에는 찬 음식으로 추위에 맞섰다면, 근래는 35도 이상을 넘나드는 한 여름의 열기를 내리기 위해 먹는다. 냉면은 이제 사계절 음식이 되었다. 음식의 변화는 주기적이었느나 어느적부터 늘 내 곁에서 상주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몇 년 전부터 손주를 돌보고 있다. 누웠을 때는 내 의지대로 아이들을 어느 정도 다룰 수 있었다. 두 녀석이 유치원과 어린이집을 다니는 현재는 날마다 '내가 변화하지 않으면 나와 손주가 힘들다'는 것을 깨닫는다. 고집스레 나의 주관대로 아이들을 대하면 우선 나부터 화가 치민다. 이내 아이들에게 잘못한 언행으로 후회하면서 사과를 한다. 기민하게 생각을 바꾸면 어투가 달라지고 이해의 폭도 넓어지면서 내가 편안하다. 사고의 변화가 주는 나의 변모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남편은 퇴임한 지 20년이 더 가깝다. 내가 손주 때문에 딸의 아파트로 출, 퇴근한다. 거의 남편 혼자 조석을 해결하는 편이다. 주말에 남편이 입으로 지시를 하면, 나는 그의 뜻을 따르려고 한다. 몇 년 경력의 주방장은 40년 경력자가 안중에도 없다. 그렇지만 변화를 수용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하였다. 남편은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자신의 뜻대로 하지 못하는 내가 못마땅하여 눈을 흘긴다. 


  무상이라는 말. 없을 無에 항상 常. 항상하는 것이 없다는 뜻의 한자 말이다. 뭘 모를 땐 '허무하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모든 것이 항상하기를 바라지만 변화하면서 달라지는 현상을 대하게 된다. 그럴 때 밀려오는 괴로움을 알아차려야 했는데 몰랐다. 아마 손주와 대면하는 요즘처럼 그때도 알아차리는 속도가 빨랐다면 어리석은 행위는 덜 했을 터. 그랬더라면 사고의 깊이, 언행, 견해도 수승해졌으리라. 


  내 아이들이 가끔 뭘 먹고 싶으냐고 묻는다. 요사이는 유산슬을 말한다. 큰 이유는 없다. 알맞게 따뜻하였고, 촉촉하여 목넘김이 매끄러웠으며, 식감이 부드러워서 그러리라 짐작한다. 유산슬의 맛이 각 주방장의 솜씨에 달렸겠지만 조미료도 무시할 수 없다. 조미료에 의해서 맛이 좌우되는 것이 요즘 음식이다. 세계의 수많은 음식은 먹어보지 못하는 것이 더 많다. 우리나라의 음식도 또한 그렇다. 그런데도 고집스레 한 음식만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여건이 주어진다면 사고의 폭을 넓히듯 음식의 세계도 광범위한 것이 좋다고 사려된다.


  세월 따라서 입맛도 변했다. 어른들은 내가 신 김칫국물 마시는 것을 보면 몸서리를 쳤다. 그런데 나도 아주 신 김치는 밀어낸다. 알맞게 신 것이 적당하여서 선호한다. 좋아하는 것도 달라졌다. 딱딱한 누룽지를 무척 잘 먹었다. 이제 치아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가능해졌다. 치아 사이도 넓어져서 치곡을 메우는 음식물은 거부하지 못할 유혹이다. 나의 주관은 주어진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변하기도 한다.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은 진리 뿐이므로.


   언젠가 4식구가 대만을 다녀왔다. 시장을 돌아다니다 내가 강렬한 향신료 냄새에 두 콧구멍을 검지와 중지로 막고 입으로 호흡을 하였더니 남편과 아이들이 웃어댔다. 어떤 음식인지 이름은 잘 모르겠으나 냄새가 싫어서 그 음식을 배척한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먹지 않거나 지독한 향신료는 주문할 때 빼달라고

부탁하면 되기 때문이다. 


  28쪽의 '이탈리아나 프랑스처럼 원래 음식 전통이 강하고 음식에 대한 견해가 확고한 나라들은 변화에 대해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불안해하는 경향이 있다.'


  '~경향이 있다'는 말은 부분적이라고 해석해봤다. 나는 작가처럼 큰 안목으로 보는 능력은 없고, 단지 나의 주변을 둘러보며 그동안 살면서 관찰했던 것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공감하였다. 먹는 음식에 대해서 확고한 견해를 가진 사람은 타인의 변화는 보이지 않았고, 자신의 변화? 꿈도 꾸지 않았다. 변화를 두려워하면서 작가의 지적처럼 방어하는 태도를 표방하여 참으로 답답한 경우를 겪었다. 도전을 무서워하는 자에게 무엇을 해보자고 제안하는 것보다 내가 달라지는 것이 평화를 유지하는 지름길이다. 고로 긍정적인 변화는 나의 발전이다.   


  

사진: 정 혜.


대문사진 : 자연은 집착하는 것이 없다. 오로지 사유하는 인간만 집착하면서 괴로워한다.

2022년 12월 21일, 수원에는 밤사이 눈이 많이 내렸다. 눈 맞은 산수유가 인상적이었다. 


아래 사진 : 서울 용산 어디쯤 맛집에서 줄을 한 시간이나 선 뒤에 얼었는 손으로 마주 잡은 탄탄면이다. 두 개의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막아야 될 향은 느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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