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 혜 Jul 25. 2023

주도적인 아이 잘 키우기

5. 오늘의 미션은 '양육' 입니다. 어떻게 아이를 키우는 게 좋을까요? 아이가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게 좋을까요? 부모는 아이를 보호하고 아이에게 책임 지우는 것을 최대한 미루는 게 좋을까요? 아이의 성장을 위해서라면 국가가 제조업체들에게 유치산업 보호 정책을 추진하는 것처럼 보호 전략이 필요할까요? 과도한 보호는 아이의 자립성을 저해할 테고 문제 해결 능력을 떨어뜨릴지도 모릅니다. 주도적이고 책임감 있는 아이로 키우기 위한 여러분의 유치 보호 정책이 궁금합니다. 자유와 보호 중에 어떤 방법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손자와 손녀는 자기 주도적인 아이다. '주도적이다'는 말은 손자가 태어난 후 인지하였다. 손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관심도 없는 용어였다. 글을 쓰기 위해 '자기 주도적이다'의 의미부터 살펴볼 필요성을 느꼈다. 네이버 사전에는

'자기 주도적自己主導的:자신이 주동적으로 자신의 일을 이끌어 나가는 것, 자기自己 : 그 사람 자신. 주동적主動的: 어떤 일에 주장이 되어 행동하는 사람. 주장主張: 자기의 의견이나 주의를 굳게 내세우거나 중심이 되어 맡아서 처리함.'으로 정의하였다. 결론은 내가 어떤 일에 나의 의견대로 이끌려고 움직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손자와 손녀는 그들의 의지대로 움직이려고 하는 성향이 매우 강하다. 나의 손주를 지금껏 키우면서 '자기 주도적인 됨됨이'는 타고난다고 주장하고 싶다. 두 녀석은 산부인과에서부터 남달랐다. 특히 손자는 독특했다.


  경제학 레시피 118쪽을 인용하면 '경제적으로 뒤처진 나라에서 미성숙한 제조업체들이 더 나아지기를 기대하며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를 ‘유치산업론’이라 부른다. 경제 발달과 아동의 성장발달을 비슷하게 보는 관점에서 나온 용어다.' 120쪽에는 '그렇다고 해서 유치 산업 보호 정책이 반드시 성공적인 경제 발전을 보장한다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들과 마찬가지로 유치 산업 또한 잘못 키우면 ‘성숙’하는데 실패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이들의 성장발달과 유치산업론이 참으로 잘 어울리며 절묘한 관점이라 여겨졌다. 경제학자인 저자가 육아(어린아이를 기르고)와 양육(아이를 보살펴서 자라게 함.)의 경험에서 발전하였다고 사려됐다.


  저자의 글을 읽으며 음식에 대한 역사와 관련된 상식을 배운다. 또 경제와 연결하여 정리된 내용에서 고정관념과 편견을 타파하기 여념이 없을 정도다. 나는 우리나라 경제에서 나날이 멀어지고 관심도 없다. 우연찮게 손주 양육에 개입되어서 복작거리다 이 책을 계기로 경제를 살피기 시작하며 배워보려고 약간의 노력을 시도하는 중. 현재 저자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읽고 있다. 굉장히 유명한 저자의 사상이나 주변 상황을 살펴보려 펼친 책이 '경제학 레시피'와는 격이 달라서 진도가 잘나가지 않는다. 무관심에서 관심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는데 중점을 둔다.


  나의 딸은 육아 서적으로 손주를 키운다. 지난주 특강의 강사는 요즘 젊은 친구들이 육아 서적대로 아이를 키우고 있다면서 "육아 서적 안 봐도 돼요!"라고 말했다. 내 딸은 책의 내용을 손자에게 대입시키려고 하였다. 딸이 내게도 원하는 육아 방침의 책을 읽으라고 강권하여 그간 마찰도 심하게 빚었다. 현재도 엇박자로 걷지만 되도록이면 딸의 목표에 보조를 맞추려고 힘쓴다. 강사의 말처럼 나는 독서를 좋아하였으나 육아 서적은 거의 읽지 않았다. 내 딸과 비교한다면 무식한 어미이자 할머니다. 단순히 내 자식을 키우면서 잘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보완하여 손주에게는 자비롭게 포용하며 바른 인성을 키워주는 양육이면 된다는 배짱으로 버텼다. 그것은 손자가 내 뜻대로 움직일 때 통하는 무지無知한 할머니 주장이었다.


  손자의 의사가 분명해지고 말문이 트이자 혼란스러웠다. 가장 시급했던 것이 대화 방법이다. 사회생활을 거의 하지 않는 나의 맹점은 상대의 말을 잘 들으려 않는 것(경청). 공감은 느리고 둔했으며, 일방적으로 나의 주장만 펼칠 줄 알았다. 손자와의 대화는 들어주어야 했고 공감을 표현해야만 주도적인 아이와 소통이 이루어졌다. 칭찬하는 것도 풍부하고 다양한 어휘를 연구해야 활용이 가능했다. 마음은 뻔한데 생각하는 만큼 말을 잘할 수 없었다. 말을 잘하는 것은 어릴 적부터 훈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내 아이 다 키운 연후에야 실감한 사람이다. 자식과의 벽은 겨우 허물었으나 손주는 주 양육자를 대신하는 할머니이니 다르게 대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주가 나의 스승이라는 말은 예서 나왔다.


  딸이 읽어라 하며 추천하는 책은 읽는 둥 마는 둥. 책의 내용과 내 손주는 달랐으므로. 하나 더 들자면 부모가 자식 교육을 전담하는 것이 정석이라며 할머니마저 들볶지 말라는 태도를 취했다. 대신 몇 개월 전 '비폭력 대화'를 거듭하여 두 번을 읽었다. 몇 년 전에도 읽었지만 붓다의 가르침을 활용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자만하던 때여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뒤에도 읽었지만 활용하지 않으니 남는 것이 없었다. 손자 바람에 다급해진 할머니가 밤마다 탐독했지만 나이 탓으로 머리에 남아주지 않더라고 변명만 앞세웠다. 몇 번 읽은 덕에 경청하고, 공감하며, 나의 감정을 전달하면서 긍정적인 표현으로 원하는 바를 진솔하게 말하는 것을 유념해두었다.


  손자는 태교로 어미와 소통하였다. 어느 날 밝은 별천지에서 듣지 못했던 목소리에 놀랍고 두려워 소리 지르며 울었다. 태내에서 들었던 엄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모든 환경이 낯설기만 하여 몸부림치며 외쳤다. 간호사들은 엄마를 찾는 신생아의 울음이 무척 별난 요주의 아기로 분류하여 구석으로 밀어냈다. 신생아가 울면 시간 맞춰서 분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이 병원 측에서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신생아 실로 면회를 가면 큰소리로 울어대는 아기는 손자뿐이었다. 일주일 후 귀가한 신생아는 신생아 실과 다른 집이 불안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거세게 울음으로 우리를 경계했다. 손자는 엄마의 젖을 먹으며 숨소리를 듣고, 손길을 느끼면서 열 달의 목소리를 인식하는 듯했다.


  글로써는 평범한 손자다. '평범하다'에는 편견과 고정관념이 내재되어 있다. 아이는 무난하게 커주는 것이 양육자 입장에서 가장 편하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까탈스럽다' '별나다' '한 성깔 한다' '황소고집'이라는 둥 온갖 부정적인 단어로 나열하였다. 나 또한 그런 사람이었다. 신생아가 무얼 알겠느냐고 치부하기엔 평범하지 않은 손자를 마주하며 통념에서 벗어나는 각성이 시작되었다. 딸에게도 손자의 까탈스럽고 별난 고집을 다른 각도에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우리 모녀는 지금까지도 아이를 평하는 용어들마저 긍정적으로 표현하면서 사고의 전환을 병행하고 있다.


  한 번은 말도 못 하는 손자의 새청 맞은 울음이 오래 들렸다. 딸과 사위는 아이의 고집을 꺾는다며 손자와 대치하고 있었다. 그동안 관찰했던 손자의 성향을 억누르기 보다 고집이 센 그대로 인정해 주며 긍정적으로 대처하자고 젊은 내외를 설득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자신을 방어하던 손자는 내 품에서 안정을 찾았다. 고집이 센 반면 포기하는 것도 무척 빠른 장점도 보였다. 장점이라는 것도 어른이 우선 편해지니 장점으로 보였는지도 모른다.


  손자가 9월이면 네 돌이 된다. 손녀는 6월에 두 돌을 넘겼다. 두 녀석은 어른의 고정관념으로 오빠와 동생이다. 나는 21개월 차이나는 이 유아들에게 오누이라는 굴레를 씌웠다고 생각지 않았다. 작은 딸이 통념으로 아이들을 대하지 말고, 오누이 관계를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고정관념을 적용하기보다 오누이의 관계를 정하고 싶었던 것 또한 편견이자 고정관념이다. 70 밑자리를 깔고 앉은 내게는 작은 딸처럼 사고전환이 빠르지 않았다. 붓다는 내게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친다. 경제학 레시피에서도 쓸모없는 이 두 가지를 버리라고 한다. 소득 없는 집착심은 떨쳐버리고 손주가 자유롭게 자랄 수 있도록 모범을 보이는 것뿐이다.


  손녀는 손자가 올해 3월에 엄마와 유치원 갈 때 나와 함께 어린이집으로 갔다. 삼 일 간 적응 기간을 마치고 한 주는 울며 나에게서 떨어졌다. 울며 들어간 어린이집에서 서서히 말문이 트였다. 두 아이가 주도적인 만큼 영특하다. 손녀는 밥을 먹다가도 "안 먹어" 하면서 고개를 돌리면 입을 벌리지 않는다. 억지로 먹여보려면 이를 앙다물고 정면을 쳐다보지 않는다. 손주는 식탁의자에 앉아서 서로를 유심히 쳐다본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손자는 손녀를, 손녀는 손자가 하는 행위를 흉내 낸다. 21개월 먼저 태어난 오빠도 유아, 뒤에 만난 동생은 영아 시기를 지나 유아기에 들어섰다. 말은 오빠, 동생이지만 똑같이 유아기를 보낸다고 해야 정확하다.


  양육자는 아이의 수준에 맞춰서 생각하고 공감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정서적으로 안정된 아이로 자란다. 주도적인 아이는 어른이 아이를 따라가는 것이 현명했다. 손자는 하원하여 집에서 어떻게 놀자고 나에게 제안을 한다. 같이 놀면서 손자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어눌한 내가 수시로 놀란다. 책에서 읽었던 내용에 상상력을 붙여서 대상이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대화를 하며 나를 이끈다. 손자의 말에 호응해 주면 신이 나서 끊임없이 창의력을 발휘하였다. 그런데 손녀가 꼭 오빠의 무르익은 분위기를 깬다. 손자가 짜증을 내면서 할머니가 보이지 않으면 주먹질도 하고, 구석으로 끌고 가 동생을 꼼짝 못 하게 하는 모습을 봤다.


  손자는 정적이고, 손녀는 동적이다. 늘 대립하는 양상이다. 나는 두 아이와 함께 하는 동안 공손하고 긍정적으로 말하는 방법에 치중한다. 손자가 장난감을 뺏을 경우 "동생아, 장난감 빌려줄래? 가지고 놀다가 줄게" 그렇게 말하면 동생은 "오빠, 가지고 놀다가 돌려줘"라고. 두 녀석이 가르쳐 준 것을 자주 써먹지는 않으나 잊지 않고 얼른 내뱉는 경우를 본다. 그때 내가 손뼉을 치면서 그렇게 표현하는 거라며 칭찬을 해준다. 숫기가 적은 손자는 칭찬의 위력이 즉시 나타나는 아이다. 손녀 또한 손자를 곧잘 흉내 낸다. 손주는 할머니의 조언에서 좋은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을 감지하였다. 나는 두 아이를 믿고 기다리는 것만 하면 된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했다. 자식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막무가내로 부모에게 들이대면, 세월을 앞서간 부모도 겪었던 과정인지라 뒤로 물러나며 져주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막무가내가 부모 입장이 되어 2세를 키우면서 정신이 성숙해지니 물러나는 지혜가 생긴다. 3세에게는 숙성된 지혜를 관조하는 능력이 더욱 커져서 매사 여유로운 것이다. 그래서 손주를 돌보며 진퇴양난의 고비를 빨리 벗어날 수 있었다.




사진 : 정 혜.


대문 사진 : 육아 서적이 사진보다 더 많다. 책을 좋아하는 손자가 책의 겉 표지는 모두 벗겨내어 따로 꽂아서 정리되어 있기도 하다. 책의 위치가 날마다 바뀌어서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아래 사진 : 딸의 집에는 티브이가 없다. pc로 한글 용사 아이야를 며칠 전부터 세 편씩 본다. 나는 옆에서 빨래를 개키며 같이 시간을 보내려고 애쓴다.




#고정관념  #편견  #주도적인  #양육자   #자율   #과보호

작가의 이전글 니까야 독송 함께 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