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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Feb 16. 2023

생으로 가득하길 진심으로 응원하는 사랑

<대니쉬 걸> 사회적 관념이 무너질 때 사랑은 아프지만 적확하다

나는 언제나 조금 모호한 선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훨씬 넓게 보고 싶고, 그래서 다양한 애정이 어린 마음 모두가 사실 결국엔 다 사랑이다 믿는다. 우정도, 그리움도, 정도, 애틋함도, 멀리서 보내는 응원도 모두. 사랑이란 감정의 선이 모호해질수록, 사랑을 느끼는 대상과의 관계를 정의할 말이 마땅하지 않을수록 (다른 말로는 관계에 정당성을 부여할 사회적인 약속이 덜 할수록) 나의 욕망과 사랑을 구별하면서 아프지만 좀 더 적확하게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제도 속의 사랑을 생각하면, 나는 그 사랑이 속박적이고 심심하고 사고의 편리를 유도하기 때문에 불편하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나는 결혼하기 전도 지금도 바뀐 게 없는 것 같으니까. 결혼의 의미가 정말 사랑의 결실인지 이 사랑을 잘 지켜나가자는 약속인지 그것이 사회 속에서 어떤 맥락과 메시지를 띄는지 매번 분명하다가도 혼란스럽다. 예나 지금이나 살아가는 문화권의 사회적 및 도덕적 관념에 기대서 판단하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편리한 (무서운) 방법이니까. 나는 계속 반항하고 싶고 모호하고 싶고 그 속에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찾고 싶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인 1926년, 지금보다 성관념도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도 훨씬 보수적인 시기에, 서로에게 완벽한 파트너를 만나 결혼 생활까지 잘하다가 이 모든 것을 뒤엎는 결정을 내린 커플이 있다. 그 당시의 사회적 도덕적 관념에 기대어 편리한 방식으로 판단하거나 다그치지 않고, 사회가 부정하는 결정을 내리는 남편을 지켜보면서도 남편을 온전히 그리고 최선을 다해 지지하고 사랑한 부인. 그래서 생각만 해도 내 살을 베듯 아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바라고, 그래서 하고 싶은 사랑은 무엇인가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 사랑의 의미를 다시금 돌아보고 되새기게 하는 영화, 나에게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이런 거구나 알려준 영화, 바로 <대니쉬 걸>이다.


<대니쉬 걸>은 1926년 덴마크 코펜하겐을 배경으로 '릴리 엘베'라는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다. 풍경화 화가인 에이나르와 초상화 화가이자 에이나르의 부인인 게르다는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예술적 영감도 나누는 둘 도 없는 파트너인데, 어느 날 에이나르가 드레스를 입고 발레리나의 초상화 대역을 하게 되면서 형용할 수 없는 새로운 감정과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느끼게 된다. 이후 에이나르가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깨달아가는 과정 동안, 게르다는 순간순간 남편을 잃을까 두려워하면서도 에이나르의 변화를 옆에서 지켜보고 여성으로서의 삶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응원하고 돕는다.


에이나르가 릴리로 성전환을 했단 사실 때문에 게르다가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이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고 절대 이야기할 수 없다. 에이나르와 게르다의 관계는 에이나르의 정체성과 상관없이 사랑이며, 이들의 관계를 편리하게 정의할 수 있는 사회적인 관념들이 모호해질수록 이들은 더욱더 애틋해진다. 성전환 수술을 하면서 덴마크 국왕이 이들의 결혼을 무효화시키고, 더 이상 남녀 간의 사랑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지만 이들의 사랑이 사랑이 아닌 건 아니니까. 그 누구보다 제대로 서로의 삶이 본인이 원하는 생으로 가득하길 응원하는 사랑이니까.


영화 <대니쉬 걸>을 보면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랑에 대한 제약들이 무너진다. 이성 간 동성 간의 의미도 모호해지고, 결혼에 대한 관념도 모호해지고,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란 어떤 것인지만 명확해진다. 사회가 내리는 '올바른' 보편적인' 사랑은 없는데, 진짜 사랑은 있다. 그럼 그 진짜 사랑은 뭘까 답하면 내가 내리는 답은 여전히 하나다. 너의 삶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사랑. 네가 생으로 가득 차기만을 바라는 사랑.


이 영화는 내가 과분하게 받는 사랑과, 과분한 만큼 돌려주고 싶은 형태의 사랑과 (그게 누구를 향하든) 그 사랑을 감내하는 만큼 돌아올 슬픔과 상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사랑을 담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지 않고 혼란도 변화도 제대로 받아들일 용기를 가진 에이나르도 멋지지만, 파트너의 변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로 인해 오는 상실과 두려움과 아픔을 안고서도 여전히 파트너를 진심으로 응원하는 게르다와 그녀가 하는 사랑이 너무 숭고했다. 게르다는 정말 진심으로 에이나르 / 릴리의 삶이 생으로 가득하길 바라고, 그래서 게르다는 에이나르의 생이 사회적 편견이나 물리적인 제약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마다 최선을 다해 에이나르의 편이 되어준다. 누군가의 삶이 그가 원하는 생으로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아파도.


제도적으로 더 이상 그들을 정의할 수 있는 바운더리는 없지만 그래서 그들의 사랑이 더 의미 있어지는데, 게르다는 처음 에이나르와 키스를 했을 때 마치 그 느낌이 자기 자신과 키스를 하는 것만 같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만큼 서로 닮아있고, 서로를 가장 신뢰하고 믿는 관계. 그렇기 때문에 에이나르가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의 소용돌이를 겪을 때, 성전환 수술 후 다른 남자를 만나고 돌아와서 속상하다고 게르다 앞에서 심통 부릴 때, (리뷰에서는 에이나르가 너무 이기적이다라는 평이 많던데) 나는 그게 서로가 서로를 정말 많이 사랑하고 신뢰했다는 것의 반증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결혼이 무효화되었다고 서로가 서로를 덜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에이나르가 릴리가 되고서도 게르다는 친구처럼 함께한다. 서로 각자의 파트너가 생기고 다른 생을 살아갔다고 해서 그들이 서로에게 향하는 사랑이 끝났다고 할 수도 없어.


나와 파트너도 자주 나누는 이야기 중에, 서로가 어떤 삶의 변화를 겪든, 그것이 혹여 새로운 사랑을 만나고 경험하고 그로 인해 나를 발견해 나가는 과정이라도, 숨기지 않고 서로에게 이야기해 주기를 다짐한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갈라서게 되더라도 오랜 친구처럼 서로를 자라게 한 자양분이니까 응원해 주길.


내가 성장하는 오랜 시간 동안 내 파트너는 나와 함께 했고, 어떤 연유로 연인의 사랑이 지고 서로를 연인으로 고려하지 않는 상황이 오더라도 오랜 친구로 지내리라 의심치 않는다. 내가 성장하면서 겪는 다양한 경험을 모노가미라는 개념 속에서 끊임없이 포기하고 선택하면서 살아가고 싶지 않고, 내가 그런 만큼 내 파트너도 삶을 충만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연인과 사랑과 욕망의 영역이라도, 나에게 그걸 저지할 권리는 없어. 그건 나의 욕망이고 욕심인 거니까.


매일 용기를 낸다. 그럴 수 있길. 삶의 터전이 바뀌고 함께 하는 게 현실적으로 힘든 순간이 올 때, 내가, 네가, 또는 우리가 포기해야 할 것이 많으면 그러지 않고 서로를 잘 놓아줄 수 있도록.


나는 너를 신뢰하고 사랑해. 네가 어떤 삶을 충만하게 살기 위해 선택을 하더라도 나는 최선을 다해 용기를 내고 응원할게. 나의 사랑을 전부 태워서라도 온전하게 너를 보내줄 수 있도록 노력할 거야. (그래도 그래야 하는 순간이 오지 않는다면 좋겠어)


나에게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이 (그게 연인이든, 친구든, 가족이든, 심지어 반려동물이든) 가장 자신다운 모습으로 삶을 살 수 있도록 바라는 삶인 것 같다. 나도 에이나르 같은 사랑을 나 자신에게 주고 게르다 같은 사랑을 내가 아닌 사람들에게 하고 싶다. 내가 생으로 가득하게 살게 도와준 내가 사랑하는 모두에게, 당신들의 생이 가득하게 최선을 다해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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