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에서 사장으로 고속 승진.
작년 이맘때의 나는 반쯤 혼이 나간 상태로 난로 위의 물주전자처럼 삑삑 대며 일을 하고 있었다. 마감에 쫓겨 항상 상기된 얼굴. 예민해진 이목구비. 모니터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자세.
작은 광고회사에서 파트타임부터 정직원이 될 때까지 5-6년간 영상편집일을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고참이 되더니 급하거나/신경을 써야 하는 프로젝트를 주로 맡게 되었다. 거기에다 다른 편집자들이 내놓는 아웃풋을 검수하는 일까지. 으레 광고회사가 그렇듯 여러 프로젝트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평범한 아수라장 속이었다.
창을 등에 지고 일을 하다 보니 넘어가는 해를 놓치기 일쑤였다. 해가 짧은 한 겨울의 경우엔 온통 밤뿐인 시간들이었다. 운이 좋은 날은 등기를 부치러 사무실을 나설 수 있었다. 그럴 때면 괜히 산책로를 에둘러가며 우체국까지의 별세상을 만끽했다. 회사가 몸집을 키우며 직원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고 나는 '고급 인력'으로 불리게 되었다. 잡다한 처리를 위한 외근 업무로부터 자연히 멀어졌고 '고급 업무'를 처리하는 강철 로봇이 되었다. 녹이 슬어 삐걱거리는 목과 어깨를 외면하며 열심히 기름을 들이부었으나, 결국 해를 못 쬐었던 마음이 좀먹기 시작했다.
영상편집은 정제되지 않은 소리와 단절될 수 없다. BGM을 고르느라 취향도 아닌 음악을 하루 종일 듣고 있어야 한다. 영상의 호흡을 다듬을라치면 한 음절을 수십 번이고 듣고 또 듣는다. 소음에 가까운 사운드와 사무실의 잡다한 엠비언스. 거기다 급박한 프로젝트가 여러 개 쏟아질 때 만들어지는 신경질적인 높은 텐션의 소리. 모든 소리를 외면할 수 없다. 그것들은 계속 들려왔고 나는 들어야 했다. 시청각을 모두 소비해야 한다는 점에서 너무 고됐다. 예민한 기질을 가진 인간의 몸, 당연히 축날 수밖에.
그렇다면 영상편집일이 나와 맞지 않는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였다. 모든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나의 예민함과 영상편집에서 요구하는 감각은 잘 맞아떨어지는 콤비였다. 최대 장점이었던 빠른 작업 속도는 예민함이 주는 몇 안 되는 선물이었다. (예민함은 주로 나를 힘들게 하므로.) 직감적으로 판단하면 그 판단은 주로 맞았다. 매번 탁월하진 않았지만 일단 기본은 하는 일당백이었다. 빠른 손 까지 가졌으니 사실 나에게 영상편집은 천직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회사를 그만뒀다.
누구나 자신을 지탱하는 신념 하나쯤은 품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 무너져도 돌아올 곳이 있고 뿌연 안갯속에서도 한 발씩 내딛을 수 있다. 나에게 중요한 단어는 'Dignity'이다. 쉽게 말하면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정도 되겠다.
혹독한 유년/청소년기를 지나 후천적 온실 속 화초가 되면서 세상이 만만해졌다. 더 이상 나쁠 것도 없다는 마음이 한몫했다. 대학생활 5년 내내 영상을 만들고 지지고 볶는 것을 배웠으니 전공을 살려보자 싶어 처음 지원한 곳은 드라마 편집 보조의 막내 자리였다. 한 달에 240+a를 준다기에 바로 문자를 보냈다.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고 추석에 면접을 보러 갔다. 커피숍에서 간단히 대화를 한 뒤 다음 주부터 출근하라는 합격 통보를 받았다. 출근을 했다. 업무와 함께 편집방 하나를 내어줬다. 내게 촬영본과 콘티를 전달해주던 막내 언니는 도망갈 수 있을 때 도망가라고 했다. 어안이 벙벙한 채로 다음날이 됐다. 아침을 먹을 때도 점심을 먹을 때도 아무도 내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영락없이 또 밤을 새워야 할 판이었다. 불길한 기운에 휩싸여 나를 고용한 사람을 찾아갔다.
"혹시 언제 집에 갈 수 있나요?"
"왜?"
"계속 이렇게 일하게 되나요?"
"왜?"
"혹시 보수가 어떻게 되나요?"
"넌 열정이 없구나."
그렇게 잘렸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두 시간 동안 생각했다. 기분이 제법 나쁜데? 물론 오라 해서 온 건 나고, 가라 해서 간 건 나지만 이래도 되나? 다음번엔 이런 경우 내가 먼저 그만둔다고 말해야겠다. 돈이 궁해서 뇌동매매를 했더니 결국 손절하고 마는구나. 역시 확고한 자기 기준을 가진 자가 투자에 성공하는 법이야.
할 말은 하는 직장인으로 성장한 나는 가끔 호구라는 소리를 듣긴 했어도 Dignity가 훼손될 일 없는 직장생활을 했다. 나름 탄탄한 포트폴리오도 쌓이고 내 작업을 못하고 있다는 작은 죄책감 정도는 외면할 수 있을 정도로 돈도 벌었다. 이쯤 되면 나오는 그러던 어느 날.
"연장 계약을 하고 싶은데, 당신만큼 할 줄 아는 사람 뽑는 것보다 당신이 남는 게 낫잖아?"
두둥. 그날이 오고 말았다. 드디어 내가 먼저 그만둔다고 말할 수 있는 기회가!
그렇게
회사를 그만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