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혁명 이후, 생태계와 그 구성원을 인류집단 ‘외부’에 있는 장소나 물질로 취급하며 둘 간의 유기적 관계를 인식하지 않는(못하는) 비-유기적 세계관과 문명이 세계의 주류가 되었다. 비-유기적 문명이 초래했고 초래할 것으로 생각되는 심각한 문제들을 자각하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대안으로 유기적 문명 또는 생태문명이 제안되고 있다.
생태문명을 주창하는 이들은 일종의 ‘패러다임 전환’을 요청하고 있다. 즉, 그들이 보기에 지금 필요한 것은 생태환경 보호 활동의 강화나 멸종 위기종 보호 또는 새로운 경제 정책 같은 것이 아니라 훨씬 더 ‘거대한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 생태문명의 옹호자들은 세계(자연, 우주)에 관한 관점, 생명에 대한 태도, 의미(가치) 있는 삶, 행복, 부(wealth)와 경제에 관한 생각, 삶의 원칙과 관습 자체의 전환을 요청한다. 즉, 비유기적 문명사회에서 보이는 것처럼 세계(자연, 우주)를 객체화하고, 생명을 자원으로 환원하며, 자연물을 철저히 자기 발아래 두거나 사회에서 발생된 폐기물을 자연에 투척함으로써 생태적 처리의 부담을 떠넘기는 식으로 행복과 부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근원적인 전환을 말하기 위해 이들이 ‘문명’이라는 용어를 동원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즉, 전환되어야 하는 것은 단순히 경제나 정치, 문화, 사회가 아니라 ‘문명’이다. 그렇다면 왜 이 용어가 동원되는 걸까?
‘문명(文明)’이라는 개념어의 뜻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 단어의 본뜻부터 살펴봐야 한다. ‘문명’이라는 한국어는 막부 시대 말기와 메이지 초기 일본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에이가쿠(英學, 영어를 통해 서양을 연구하는 학문) 학자들이 만든 ‘文明(분메이)’이라는 신조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즉, 이 단어는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같은 조선의 문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또는 다산 정약용은 이 단어를 전혀 몰랐다.
일본의 에이가쿠 학자들은 영어 단어 civilization의 번역어를 고심하다 끝내 ‘文明’이라는 한자어를 선택한다.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civilization이나 그 어원을 살펴봐도 한자어 文과 明과 관련된 뜻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이 영어 단어는 文에 해당하는 letter, literary, 明에 해당하는 enlighten, illuminate 등의 단어와 관련이 거의 없다. 따라서 ‘문명’이라는 한국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에이가쿠 학자들에 의존했던 역사를 치워버리고, 우리 자신이 에이가쿠(英學) 학자, 즉 영학자(英學者)가 되어 영어 단어인 civilization을 직접 탐구해보아야 한다.
영어 단어 civilization의 기원은 라틴어 형용사 civilis, 명사 civilitas이다. 이 라틴어 단어들의 뿌리에는 ‘시민’을 뜻하는 ‘civis’라는 라틴어 명사가 있다. civilis는 ‘시민과 관련이 있는’ ‘공적 생활과 관련이 있는/공적인’이라는 뜻이며, civilitas는 ‘예의 바름, 시민다움, 배려 깊은 행동, 절제, 정치’를 뜻한다.
이러한 의미 검토를 통해 다음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1) civilization이라는 단어는 ‘시민이라면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일련의 인간적 자질’과 관련 있는 개념어다. (2) 로마 시대에 ‘시민’은 시민의 자질뿐만 아니라 시민의 공적 삶, 공적 행동인 ‘정치’와 분리할 수 없었던 개념이다.
이와 같은 이해를 기초로 civilization이라는 단어의 본뜻을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시민’이라는 이름에 맞는 특정한 인간적 자질이 개인들에게서 충분히 발현되며, 시민에게 기대되는 (공동체를 위한) 공적 행동(즉, 정치적 행동)이 적절히 실천되는 상태나 과정
여기서 필자가 ‘개인’이라고 하지 않고 ‘개인들’이라고 한 것에 주목해야 하는데, civilization과 관련해서는 개인의 집합만이 유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civilization은 어느 개인의 시민다움이라기보다는 사회집단 내 각 개인의 시민다움의 총체를 뜻한다고 봐야 한다. 바꿔 말한다면, 사회집단 내 다수가 시민다움의 성질을 보일 때, 그 사회집단에 civilization이라는 개념을 적용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civilization은 사회집단 내 개인들의 자기성숙과정 또는 교양화 과정 또는 교육과 관련이 깊다. 즉, ‘시민’은 무엇보다도 교육의 산물이며, 충분히 교육받은 시민들이 주류가 된 특정 사회집단에 문명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하다.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civilization이라는 단어를 규정하는 사례를 우리는 세계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인정받고 있는 독일 백과사전인 『브로크하우스(Brockhaus) 백과사전』 제8판(1833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의 편찬자는 civilization을 이렇게 정의 내리고 있다.
“civilization이란 사교적 교제를 바탕으로 하는 개인이나 민족의 좀 더 높은 자기 수양으로서, 지금은 종종 ‘훌륭한 품성(Gesittung)’이라는 이름으로도 지칭된다. 그것은 자연 상태의 거칠고 본능적인 삶과 대립하며, 교양 함양을 위해 이미 제도로 정착된 수단을 전제로 한다. 이런 수단으로는 국가 교육기관 그리고 종교와 예술을 꼽을 수 있다.”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 문명과 문화』 외르크 피쉬 지음, 안삼환 옮김, 푸른역사, 143쪽에서 재인용. 번역문은 인용자가 부분 수정함)
다시 말해, 1830년대 초반 독일에서 civilization이란 공적 교육기관, 종교, 예술 같은 제도화된 수단을 통해 함양된 교양이나 인품(훌륭한 품성, Gesittung)의 상태를 뜻했고, 이 교양이나 인품의 주체는 개인이기도 하지만 민족 집단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사전편찬자가 말한 ‘훌륭한 품성(Gesittung)’이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걸까? ‘시민다움’이라는 단어로 환기할 만한 일련의 인간적 자질로 무엇을 손꼽을 수 있을까? 이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은, 로마인들에게 ‘시민’, ‘시민다움’과 ‘정치’가 분리될 수 없었던 연유와 관련이 있다.
분명한 점은, 시민다움을 보이는 개인이라면 사적인 만족이나 행복과 같은 ‘폭 좁은’ 목적에 자기 삶을 종속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민다움은 예의범절, 의례에 능통함(etiquette), 친절함 같은 가치를 포함하지만 여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시민다운 시민이 보이는 예의나 친절은 자기 이익만을 도모하는 상인이 처세술로서 몸에 익힌 예의나 친절이 아니다. 시민의 예의나 친절은 ‘폭넓게’ 삶을 살아가는 태도와 연결된, 타인을 대하는 일관된 태도의 한 가지일 뿐이다. 더 정확히 말해, 시민이라면 자신의 사적인 삶의 영역을 넘어 자신이 속한 공동체나 다른 사람들의 삶의 영역에 시선을 둔 채로 살아간다. 하지만 여기서 ‘시선을 둔다는 것’은 단지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경우 상황에 적극 개입한다는 것이다. 즉, 시민은 공적 문제에 대한 개입 행위(이것이 바로 정치적 행위다)에 흔쾌히 참여하는 개인이다. 달리 말해 시민은, 공동(모두)의 이익(공동선)을 자기 자신에게 가치 있는 것으로 인지하고 공동선을 위해 힘쓰려는 인간이다.
그러나 정치적 행위의 무대에는 자기와는 관점이 다른 시민들이 얼마든 등장할 수 있고, 한 가지 정답이 아니라 다수의 정답이 있는 상황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정치에 참여하려는 개인, 즉 시민에게는 자신의 논리에 따라 사태를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해석해내는 능력 또한 요청된다.
‘문명’이라는 개념어를 탐구한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이처럼 ‘시민 되기’ ‘시민 교육’이라는 과제와 만났다. 하지만 오늘날 요청되는 바람직한 인간은 단순히 시민이 아니라 세계시민, 정확히는 생태 소양(ecological literacy)을 갖춘 세계시민이다. 경제의 세계화 속에서 개인의 낱 선택이 다른 국가의 타인이나 지구 생태계에게 일정한 영향을 행사하고 있고, 문명의 기반인 지구 생태계의 훼손이 극심하여 문명 자체를 위태롭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오늘의 시민이 시선을 두어야 하는 공동체는 지역공동체나 도시/국가 공동체만이 아니라 인류공동체, 생태공동체, 지구공동체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이런 결론이 가능하다. (1) 재학습(재교육)을 통한 시민의 거듭나기만이 오늘날 문명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다. (2) 오늘날 생태문명은 문명의 한 가지 형식이 아니라 문명의 유일한 형식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