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핸드폰 화면에 뜬 번호는 얼마 전 나의 베프 현진과 함께 장롱 속에 기어들어가 한참을 나오지 않던 숏컷의 예쁜 얼굴을 가진 여자아이, 세진이었다. 하나, 둘, 셋, 넷.. 나는 속으로 숫자를 헤아리고 최대한 무심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나 세진이야.”
“응. 웬일이야?”
“그냥…, 궁금해서 뭐 하는지.”
“그냥 있어.”
“혹시 이번 주 금요일에 우리 집에서 비디오 볼래?”
나는 현진이 속한 무리와 함께 종종 세진의 집에서 비디오를 보거나 춤 연습을 했다. 세진과는 둘이서만 만나서 논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괜히 어색해 얼굴에서 열이 났다. 세진의 초대에 기분이 이상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의 베프인 현진과 세진은 둘도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며칠 전, 학교 복도에서 현진이 세진에게 실내화 가방을 세차게 던졌다. 확실히 선을 그어버리려는 사람처럼 거칠고 막무가내로 화를 내는 모습이 이상할 정도였다. 지금 그런 상황에서 내가 세진의 전화를 받고, 세진과 따로 약속을 잡는 것은 해서는 안 될 금기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세진과 만나고 싶었다.
“몇 시에 갈까..?”
“오후 4시쯤 올래?”
“알았어.”
그 후 나는 세진과 종종 만나서 시간을 보냈다. 현진을 만나면 세진에 대해서는 일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왜 둘의 사이가 틀어졌는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슬며시 떠보기도 했다. 하지만 현진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것도 묻지 말라는 듯한 냉담한 표정을 짓곤 했다. 나는 그렇게 현진과, 현진이 속한 무리 속에서 거짓말을 하고 같은 척을 했다.
세진과는 주로 금요일 오후에 만났다. 그날은 세진의 생일이었다. 그녀의 집으로 가기 전 교차로에 있는 꽃집에 들렀다. 예쁘고 화려한 꽃들과 파릇파릇한 잎을 가진 나무들이 가득했는데, 유독 붉은 꽃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름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향기가 나지 않는 붉은 꽃이었다. 나는 그것으로 포장을 부탁했다. 그리고 세진의 아파트 입구로 들어가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현진이었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현진이니?”
“응 뭐 해?”
“나 그냥 있어, 넌 뭐 해?”
“나 그냥 심심해서 전화했는데 지금 만날까?”
“아.. 실은 엄마 심부름으로 이모 댁에 가는 길이야.”
“에이… 아쉽다. 알았어. 내일 학교에서 보자.”
“응응 내일 봐!”
밝고 경쾌한 여자 아이 특유의 톤이 끊어지고 이내 적막해졌다. 속이 울렁거렸다. 마치 바다 위에 조각난 배 위에 누워있는 것처럼 흔들렸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붉은 꽃으로 코를 가져갔다. 냄새를 맡아보려 했지만 아무런 향이 나지 않았다. ‘참 향이 없는 꽃이랬지…’ 나는 세진이 살고 있는 102동의 현관벨을 눌렀다. 이내 문이 열렸다.
나는 언제나처럼 그 문으로 들어갔다.
브런치 주간 연재 | 화요일의 초단편 소설
브런치를 통해 일주일에 한 편씩 초단편 소설과 함께 그림을 발행하는 개인 프로젝트입니다.
매주 화요일 마다 한 편씩 업데이트됩니다.
목차
/ 배경에 속한 사람
/ 하루종일 잠만 자는 사람의 이야기
/ 여름 토스트
/ 붉은 꽃
/ 두더지
/ 고양이
*발행 순서는 상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