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인들에게 가끔 좋아하는 계절이 무엇이냐 물어본다. 몇몇 이들이 여름을 가장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더운데 여름이 왜 좋아?"라고 물으니 "사실은 추운게 싫어", "차라리 더운 게 나아"라는 대답을 하는 것이다. 여름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아닌, 추위를 피하기 위해 선택한 결과라는 것을 알고 나니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나는 추운 겨울이 좋다. 뼛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화끈한 눈바람이 부는 겨울이 좋다. 아침에 나올 때 코로 들이키는 첫 공기에서 느껴지는 그 겨울 냄새가 좋다. 겨울이 왜 좋은지 생각해보니 크리스마스로부터 생겨난 학습된 감성이 아닐까 싶다. 9월부터 캐롤을 들으며 12월을 손꼽아 기다리고, 명동거리를 밝히는 불빛을 보러 바쁜 와중에도 꼭 시간을 낸다. 이런 내 모습을 보면, 내가 좋아하는 건 어쩌면 겨울 그 자체보다는 겨울에 스며든 크리스마스의 따뜻함일지도 모른다.
지난 10월 말, 일본 삿포로로 여행을 떠나 조금 이른 겨울을 맞이했다. 겨울을 좋아하는 내게 삿포로는 최고의 여행지다. 추울수록 매력적인 풍경을 자랑할 뿐만 아니라, 영화 '러브레터'의 감성을 충만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10월은 삿포로에서도 첫눈이 내릴까 말까하는, 겨울이라기엔 이른 계절이었지만 그당시 한국은 더웠던 터라 추운 공기를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사진은 2016년 겨울의 오타루 오르골당이다.
삿포로 근교의 작은 도시 오타루는 겨울의 낭만을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다. 볼거리가 많은 도시는 아니지만, 운하를 따라 펼쳐진 거리가 참 낭만적이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오르골당이다. 포근한 온기가 느껴지는 이곳은 내게 겨울의 감성을 고스란히 안겨준다. 왠지 초록색, 빨간색이 섞인 알록달록한 니트와 털 모자를 쓰고 가야할 것 같은, 산타 할아버지가 있을 법한 장소랄까.
오르골당의 내부. 가을임에도 포근한 겨울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오르골당의 아기자기한 감성과 따뜻한 분위기가 어쩐지 내 마음 속 깊은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초등학교 시절 크리스마스 선물로 오르골을 받은 적이 있었다. 빨간색의 빈티지스러운 화장대 같이 생긴 오르골이었는데, 화장대의 거울 부분을 들면 열려서 안에 반지 따위의 작은 물건을 넣을 수 있었고, 밑에 붙은 나사를 돌리면 '엘리제를 위하여'가 흘러 나왔다. 그 소리를 들으며 크리스마스의 설렘과 따뜻함을 느꼈던 기억이, 지금 내가 겨울과 크리스마스를 사랑하게 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반면, 얼마 전 친구들과 함께 여행한 베트남 호치민의 크리스마스는 나에게 낯선 감정을 남겼다. 그 곳은 기온이 30도를 가볍게 넘을 정도로 무척 더운 곳이다. 그런데 시내의 백화점에 가보니, 외관이 눈꽃 모양의 조명으로 꾸며져 있고, 배경 음악으로 캐롤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여름 나라의 크리스마스라니, 그 풍경이 나에게는 생경하게 다가왔다. 눈꽃 조명과 캐롤은 익숙했지만, 그 배경에 깔린 더운 공기와 반팔 차림의 사람들 때문이었을까. 크리스마스의 포근함과 설렘 대신 어색함이 마음속에 남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좋아하는 건 단순히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추운 겨울의 한가운데서 따뜻함을 느끼게 해주는 크리스마스라는 사실이었다.
크리스마스 테마로 꾸며진 호치민 백화점의 모습
이런 더운 나라의 크리스마스를 경험해보니, 한국에서 크리스마스를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계절을 산다는 데 감사함을 느끼는 요즘이다. 겨울의 냉기와 크리스마스의 온기가 만나며 비로소 완성되는 나만의 계절. 내가 좋아하는 겨울이, 그리고 그 속의 크리스마스가 매년 변함없이 찾아와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