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다 더 중요한 것은 회복하는 것.
한국사람들은 빠르다. 나도 엄청 빨랐다. 아니 느린 것을 참지 못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빠름을 자랑으로 여겼다. 나의 취업 자기소개서에는 '빠름'이 장점 란을 온통 차지하고 있을 정도다.
그렇기 때문일까. 한국 사회에서 느림은 보통 행복과 함께 언급된다. 느림은 미학, 여유와 같은 단어들과 짝지어 등장한다. 많은 책 속에서 느림은 독립적인 역할보다는 행복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상생하는 관계로서 나온다.
나의 삶을 되돌아보면 단기간 내에 무언갈 이뤄내는 것을 중요시했다. 하루에 성취해야할 것을 1이라 하면 1을 빨리 끝내놓고 다른 1을 찾는다던가, 0.5를 미리 더한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취미 활동도 오직 성취 위주였다. "회사를 다니며 '이것'을 땄어요"와 같은. 그런데 그렇게 살아오니 흔히 말하는 번아웃이 더 빠르게 찾아왔다. 그래서 나는 한번에 놔버렸다. 한번에 놔버리면 후련할 줄 알았다. 헌데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퇴사하고 나서는 회사에 대한 꿈을 두 번이나 꿨다. 회사에 다닐 때는 가장 스트레스가 심할 때 회사나 상사에 대한 꿈을 꿨다. 그런데 그만두고 나서도 꿈을 꾼다니. 꿈에서 깨어나고 나서 씁쓸해졌다. '역시 그만두지 말걸 그랬나'하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지금은 '온전히 느림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일상의 루틴 속에서 살고 있다. 아침에는 원두의 그람수를 정확히 재서 갈고(비록 기계가 갈지만) 필터에 곱게 갈린 원두를 넣고, 그 위에 뜨거운 물을 부어 커피를 내리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아이스 커피를 마시기 위해 원두 10g에 물은 200ml로 맞춰 아주 천천히 추출한다. 빙그르르 원을 천천히 돌려, 필터 속 물이 다 빠지기를 기다렸다 아주 조금씩 다시 붓기를 반복한다. 물 200ml는 많은 양이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1인분을 내리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 꽤 긴 줄은 실제로 해보기 전까지 전혀 몰랐다. 원두가 든 봉지를 열 때 느껴지는 원두의 향부터 추출된 따뜻한 커피에서 나는 향기, 얼음을 넣어 차갑게 마시며 콧 속으로 느끼는 향기, 모두 같은 원두로 부터 나온 향이지만 향에서 느껴지는 촉감과 질감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느림 속에 있으니 알게된 사실이 하나 있다. 지나온 수많은 힘들었던 시간들, 물에 잠기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던 시간들, 남을 험담했던 시간들이 다 덧없게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당시에는 나의 삶에 중대한 문제가 될 만큼 크게 생각했던 일도 시간이 지나니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사소해지고 옅어진다.
하지만 의미 없던 시간들은 아니었다. 나의 가치관과 생각이 더 명확해졌으니까. 적어도 '그렇게 살지는 말아야지', '그렇게 사람을 대하진 말아야지',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지'와 같은 사실을 깨달았으니 말이다.
빠름과 느림에 정답은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빠르고 느리고는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만의 템포를 찾는 것이다. 나에게 맞는 리듬을 알고 있는가가 질문의 시작이어야 한다. 그런 관점 속에서 3X년을 살아온 나는 나의 템포를 이제야 찾아냈다고, 이제야 내가 누군지 명확하게 알겠다고 대답하고 싶다.
나는 다시 직장을 가야 할 것이다. 남은 인생을 살면서 고통받지 않기 위해서도 그래야 하고, 돈의 문제를 떠나서 내 삶 자체의 효용성을 찾기 위해서도 그래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나를 지키는 방법을 이제는 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나 자신보다는 다른 가치들을 지키기 위해 살아왔다. 이를테면 돈, 사회적 책임, 체면, 다른 사람의 시선과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나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으니 무엇을 하던지 방어를 전략으로 삼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생겨났다.
나는 느림을 행복이라 하지 않겠다. 다만 느림은 '회복'이 될 것이다. 지치고 아팠던 나의 상처가 흉터로 아물기까지 느림은 중요한 회복제 중 하나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