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고스 : Nobody & Somebody
*학교를 떠나 세계를 여행하며 보고 듣고 느낀 이야기
‘영혼은 비행기처럼 빠르게 날 수 없다는 인디언의 말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고 여행할 때 영혼을 잃어버리고 영혼이 없는 채로 목적지에 도착한다. (중략) 그다음에 나는 몇 번 비행기를 타고 오고 가고 했는데 도무지 내 영혼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그것이 여행자들은 왜 모두 영혼이 없는지에 대한 이유가 된다.’
영혼 없는 작가 | 다와다 요코
정말 영혼이 비행기보다 느릴까. 그래서 영혼이 없는 채로 목적지에 도착했기 때문일까. 여행을 하다 보면 이따금씩 내가 전과 다르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니까 종이컵이 스타벅스 텀블러로 바뀌는 느낌은 아니고 종이컵 안에 음료가 바뀌는 느낌이다. 부장님 손아귀에서 아메리카노를 담고 있다가, 짝사랑하는 그녀의 책상 위에서 라떼를 담고 있다가, 탕비실에서 텅 비어 있는 그런 느낌이려나. 맥락이 바뀌면서 의미가 달라지는 느낌이다.
한 번은 라고스 호스텔이었다. 수십 대의 요트가 정박한 항구를 지나 도착한 호스텔에는 특별한 디너파티가 있었다. 숙박한 사람들끼리 자기네 나라 음식을 직접 요리한 뒤 소개하며 나누어 먹는 단란한 행사였다. 포르투나, 리스본에서 혼자 식사를 오래 해왔던 터라 참석을 묻는 다정한 제안에 나는 흔쾌히 이츠 오케이라고 대답을 했다. 철저한 ‘노바디’로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방랑해야 하는 여행자에게 함께 식사하기란 정말 특별한 일이다. 매일 혼자 밥 같지도 않은 빵이나, 입에 맞지 않는 외국 음식을 먹다 보면 마주 보고 앉아 칼로 썰든 숟가락으로 퍼서 입에 넣든, 배를 채우며 하루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그립다. 한국에서는 이런 사이를 식구라고 한다. 같이 밥을 나누어 먹는 입. 가족을 식구라고 부르는 일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 그보다 다정하고 든든한 사이가 있을까. 물론 식구이길 거부하는 가족도 많다. 나도 그랬고.
그러므로 흔쾌히(실은 공손히) 참석 의사를 전했다. 물론 문제가 있긴 했다. 우선 내가 요리에 젬병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대표인 듯 한국 음식을 요리해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소개해야 한다? 상당한 부담이었다. 나 때문에 다채롭고 맛깔난 우리 요리가 폄하된다면 얼마나 가슴 아픈 국격의 훼손인가. 다행히 같은 날 입실한 한국 분이 계셔서 우리 무슨 요리를 해야 K-food의 명랑함을 알릴 수 있을지 의견을 모았다. 일단 우리가 가진 한식 재료를 공유했다. 신라면, 불닭볶음면, 참치, 김, 햇반 같은 인스턴트식품이 있었다. 느끼하고, 텁텁한 유럽 식탁에서 얼큰한 기운을 내기에는 너무나 훌륭한 여행자 보양식이다. 하지만 영양소가 고르고 다채로운 반찬과 곁들여 먹는 제육볶음이나, 미역국 같은 정찬에 비하면 정갈한 맛이 떨어지고 비빔밥이나 김밥처럼 한 음식에서 다양한 재료가 어우러지는 조화의 맛도 없다. 더군다나 k-food의 가치는 우리 흙에서 자란 신토불이 재료와 이를 버무리고 조리는 어머니의 손맛에 있는데, 이것 참. 불닭볶음면이라니. 뭐, 여행 중이니. 핑계는 만들었으니 물 조절을 잘하기로 했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자 주방이 붐볐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사람, 미국에서 온 사람, 독일에서 온 사람 너 나 할 것 없이 분주히 자기 요리를 준비했다. 누구는 토마토나, 양배추를 도마에 올려 썰었고, 누구는 냄비에 이것저것을 넣어 끓였다. 나는 외국인들 사이를 기웃기웃거리며 이국에서 이국의 향을 내는 외국인들과 어울렸다. 오늘 저녁은 뭔가 특별하겠구나.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손을 보며 알아차렸다. 나는 컵라면에 물이나 받으면 됐으므로 주방을 딱히 쓸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음식 문화 사절처럼 요리를 하는 외국인들을 보니 불고기라도 할 걸 그랬나 멋쩍었다. 누가 차려주는 밥상에 숟가락만 얻던 버릇이 이렇게 나를 민망하게 할 줄이야. 숟가락 얹기도 황정민 같은 사람이 해야 멋있나 보다. 컵라면에 물을 정량껏 담아 조심히 라운지로 들고 갔다.이라도 없으면 정말 침묵의 밤을 보냈으리라.
모든 사람들이 작은 주방에서 요리를 하다 보니 만찬이 늦어졌다. 주방을 기웃거리면서도 호스텔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었는지 몰랐는데, 모아놓고 보니 작지 않은 라운지가 소란했다. 딸이 한국에서 유학 중이라는 포르투갈 국적의 여사장님이 앞에 나서 인사를 하시고 진행을 했다. 듣고 보니 호스텔을 오픈한 뒤 꾸준히 이어온 파티였다. 사장님은 오프닝 멘트를 마치고 노트를 두 권 꺼내셨다. 노트에는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그동안 자기네 요리를 어떻게 했는지 레시피가 적혀 있었다. 달리 명품이 아니다. 그동안 호스텔을 방문한 수많은 사람들이 남긴 저 레시피가 사장님에게 무엇보다는 빛나는 명품처럼 보였다. 명품이란 그 사람을 증명해 준다고 하지. 나는 저 레시피가 적힌 노트가 사장님이 어떤 사람인지를 증명한다고 생각했다. 레시피에 국적은 있어도 국격은 없었다. 누구나 자기 레시피를 적어둘 수 있는 노트에는 떠나온 사람들의 흔적이 있었다. 사장님은 밤마다 노트에 적힌 레피시와 함께 영혼 없는 여행자들의 사연을 담았으리라. 사장님의 세계가 얼마나 넓을지 가늠할 수 없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인사를 하고 각자 조리한 오늘의 양식을 소개했다. 그중에 어느 미국인은 한국 불고기를 요리해 내었다. 북한 요리라고 소개하길래 내가 한국 요리라고 알려주었다. 북한 요리나 한국 요리나 그게 그것일 테지만, 한국 대표로서 민망함이 있어 척을 하며 티를 냈다. 우리는 한국의 매운맛을 잘 느낄 수 있는 음식이라며 준비한 신라면과 불닭볶으면을 소개했다. 한국 음식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 사장님이 크레이지 한 맵기라며 한국 사람 아니면 못 먹는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모두가 소개를 마친 뒤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여행을 하면서 처음으로 외국인들과 식사를 하는 밤이었다. 거기에 우리가 직접 조리한 다채롭고 풍요로운 음식들이 거드니 흥이 절로 났다. 와인을 마시며 왜 여행을 왔는지 라고스는 어떻게 왔는지 물었고, 기타를 치며 비틀즈 노래도 불렀다.
black bird singing in the dead of night.
까만 새가 캄캄한 밤에 노래를 불러요.
take these sunken eyes and learn to see.
지친 눈으로도 보는 법을 배우려는 듯이.
all your life
평생 동안
you were only wating for this momnet to be free.
당신이 자유로울 이 순간을 기다려 왔듯이.
밤은 더할 수 없이 근사했고, 언제 내가 이렇게 외국인들과 거리낌 없이 지내고 있는지 놀라웠다. 나의 서투른 외국어를 겨우 알아듣는 외국인들 표정이 불편해서 거리를 두던 내가 맞나. 앞에서는 안녕 나의 세계라며 반가울 준비를 마친 것처럼 굴다, 뒤에서는 거리를 두지 못해 불편했던 내가 맞나. 생경했다. 나는 같은 사람인데 이렇게 다른 밤을 보낼 수 있구나. 라고스의 도착하기 전날 독일 여자와 리스본에서 촬영을 하기 위해 동행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긴장이 다소 풀렸을 뿐 친밀감은 아니었다. 나는 나의 전환이 문화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 위해, 메뉴를 고심하고, 주방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다 보면 가위 필요하니? 그릇을 내가 써도 될까? 묻게 된다. 자연스럽게 입을 트며 서로가 준비하는 음식의 향을 맡고, 부글부글 끓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우리가 같은 것을 지향하고 있다는 유대감이 절로 생겼다.
적잖이 마음을 스트레칭 할 수 있는 기회였다. 게다가 식사를 시작하기 전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돌아가는 자기소개 시간엔 우리는 서로에게 각인되었다. 노바디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섬바디였다. 종종 투숙객들 사이에 언어로 인한 지연이 생길 때가 있었다. 이럴 때면 4개 국어에 능숙한 사장님이 개입해서 말을 풀어주었다. 명품은 사람을 증명해 준다고 하지. 사장님을 정말 명품 같았다. 사장님을 떠올리면 나도 명품을 담는 종이백 쯤은 되는 것 같다.
숙소에 머무른 셋째 밤에도 파티를 했다. 그 밤엔 네덜란드에서 온 옌틀과 옆자리에 앉았다. 옌틀은 다른 일정 때문에 조금 늦어서 음식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며 멋쩍게 웃었다. 그녀는 꾸밈없이 자박한 미소를 잘 지었다. 옌틀은 같은 미소로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내가 말을 뱉기 위해 단어 하나하나를 떠올리느라 답이 늦어도 상냥히 기다려주었다. 시제나 능수동을 틀려도 이츠 오케이. 옌틀의 입김이 닿으면 서투른 내 영어도 꽃처럼 피었다. 서투를 땐 서투른 사람이 서투른 자기를 더 잘 안다. 따라서 누군가 이 서투름을 탓하지 않고 기다려주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너 잘 웃어줘서 고맙다고 했더니 옌틀이 자기 이름이 젠틀이란 뜻이라며 팔에 새긴 이름 타투를 보여주었다. 젠틀이란 단어가 사람이 되면 이런 모양이겠구나 은유를 알았다.
서로 모어는 달랐지만 상호 간의 취향은 비슷했다. 그녀는 필름 사진을 좋아했다. 여행 오기 며칠 전엔 아이들을 대상으로 사진 강의도 했다며 그녀가 촬영한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을 보니 정형한 아름다움을 쫓는 사람 같진 않았다. 오롯이 자기 시선으로 순간을 분할한 그녀의 세계에는 할머니, 강아지, 그녀의 친구들이 자주 등장했다. 장면마다 그녀의 정서와 애정이 간섭 없이 잘 묻어 있었다. 사진으로 나누니 말로 나눌 때 보다 서로의 생애를 이해하기 편리했다. 음표나 색, 맛과, 움직임, 감정과 사유를 전하는 매체가 풍부할수록 관계가 두터워짐을 체험했다. 라고스에 오길 잘했다. 옌틀과 대화하는 동안 마지막 밤이 잘 지났다.
‘그러지 말고 라고스를 경유해서 세비아로 가기는 어떠세요?’
라고스는 파리부터 포르투까지 동행한 세창 씨가 알려주었다. 리스본에서 세비아로 직행한다는 계획을 듣더니 만류하며 다른 선택지를 제시했다. 내 여정이 직행을 하기엔 부담스러운 거리다. 더욱이 리스본에서 세비아로 갈 때 이러나저러나 포르투 남부를 경유하는데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름다운 도시가 많다. 동선을 낭비할 일도 없도 없으니 풍경도 좋고 여유로운 휴양 도시에 잠시 머무르면 어떻냐는 조언이었다. 라고스? 생전 들어본 적이 없는 도시였다. 그런 곳이 있어요? 가서 무엇을 하지. 미지는 언제나 불안이다. 하지만 포르투갈 여행 경험이 많았던 세창 씨 조언은 늘 효력이 있었으므로 신뢰의 증표로 삼아 떠나기로 했다. 라고스에서 근사한 밤을 보내는 동안 낯선 도시를 알려준 세창 씨가 고마웠다.
성인이 되었지만 어른이 되지 못한 나는 노바디로 지내기가 좋았다. 누구도 나에게 책임을 강요하지 않으므로. 하지만 노바디란 영혼이 비어 있는 상태는 아니다. 그저 관계가 단절되었을 뿐. 책임이 사라지면 그 자리에는 공허가 찼다. 하루하루 여행이 길어질수록 노바디로 지내는 기간도 길어졌고 그만큼 공허는 깊어졌다. 공허가 깊어질수록 섬바디로 지낼 수 있는 식구가 그리웠다. 마침 리스본에서 열차를 타고 떠난 라고스에서는 섬바디로 지낼 수 있었다. 비행기가 아니라 열차를 타고 갔으니, 영혼은 열차보다도 느린 걸까. 은유가 타당한지 모르겠지만, 라고스에서 그랬듯이 낯선 세계를 찾아 걷다 보면 종종 낯설어진 나를 보곤 했다.
때로는 섬바디로 지내지만 노바디인 듯 살 때도 있다. 하늘을 지는 형벌을 받은 아틀라스처럼 무너지는 일상을 버티다 보면 영혼이 사라지는 듯하다. 일상의 미덕은 반복이라지만 네 탓이든 내 탓이든 불편한 우울이 지속되면 그냥 미워하다 얼어 죽는 게 날 듯싶다. 그래도 어쩌나 미워한다고 겨울이 봄이 되는 건 아닌데. 스트레스의 찌꺼기만 늘어난다. 그럴 땐 아주 무책임하게 아주 무쓸모하게 떠나버리는 것도 방편인 것 같다. 영혼이 따라오지도 못할 만큼 정신없이 떠나다 보면 되려 내 영혼이 어디에 머물러야 할지 보이는 거다. 혹은 기능을 못하는 지난 영혼이 새것으로 대체되거나. 결정적 순간이다. 물론 일탈 없이 일상에서 결정적 순간을 발견할 수 있다면 더 나은 방편이다. 무엇보다 일탈할 수 없는 이들이 서로를 알고 안아주기란 가장 훌륭한 방편일 터다.
*라고스는 포르투갈 최대 노예 무역항이었다고 한다. 사람을 물건 취급하던 곳에서 사람다움을 느꼈으니, 도시도 여행을 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