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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loiam Dec 30. 2022

초등학교 선생님 그만두고 세계여행

리스본, 호카곶 : 끝이 특별한 이유


바이런이 찬란한 에덴이라고 칭송했던 신트라에서 버스를 탔습니다. 그리고 서쪽을 향해 포르투갈 시골길을 30분 정도 달렸습니다. 포르투갈 시골길은 평온했습니다. 좁은 길은 작은 마을과 마을을 지나 이어졌습니다. 한 번은 학교 앞에서 정차했습니다. 학교 옆 정류장에선 아이들이 넉넉히 탔습니다. 저들끼리 짹짹거리다, 집이 가까운 친구는 일찍 내리고, 집이 먼 친구들은 늦게 내렸습니다. 선생님을 시작한 첫 부임지가 육 학급 시골학교였습니다. 먼 나라 시골 마을 아이들을 보니, 어렴풋한 옛일이 낮잠 오듯 느긋하게 쏟아졌습니다. 시간은 잘도 갑니다. 마을을 지나다 보니, 신트라-카스카이스 초원 너머로 바다가 보였습니다. 저 어딘가 세상의 서쪽 끝이라는 호카곶이 있겠구나. 그 너머로 대서양이 있고, 그 너머로 아메리카가 있겠구나. 세상이 끝과 끝을 타고 넓어졌습니다.


 세상이란 유라시아를 의미합니다. 호카곶은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입니다. 극동 아시아 끄트머리 제가 살던 곳에서 약 10,000km가 조금 넘게 떨어진 서쪽 끝은 바람이 거세게도 불었습니다. 걸으려고 한 발을 내디디면 그 발이 그대로 바다로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바다를 등지고 초원을 향해 걸으면 바람을 타고 날아온 모래가 몸에 박히는 듯했습니다. 어떤 여성은 걷다 엉덩방아를 찧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유쾌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다가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광활하게 펼쳐진 대서양 수평선에는 파랑이 위아래 경계 없이 빛났고 절벽으로 밀려온 파도가 흩어질 땐 눈결 같았습니다. 이런 풍경에서는 바람이 아무리 거세도 악의를 느낄 수 없습니다.

 풍경이 이보다 덜했어도 호카곶은 특별했을 겁니다. 끝이니까요. 끝은 특별합니다. 모든 것을 닫기 때문입니다. ‘어쩌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류의 이야기든, 눈알을 뽑고 방랑하다 죽은 오이디푸스의 비극이든, 화양연화처럼 사랑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결말이든 끝은 이어온 이야기를 닫습니다. 정수리는 내 키를 닫고, 잠은 지끈한 하루를 닫습니다. (그래서 잘 자야 합니다.) 호카곶은 서쪽을 닫았습니다. 유라시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이야기는 이곳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지는 노을이 좋아 따라 걸으며 하루에 마흔네 번 보았다는 어린 왕자도 여기서는 노을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끝이니까요. 어린 왕자가 B-612 소행성이 아니라, 리스본에 살았다면 아마 서혜진의 시를 좋아했을 겁니다. ‘받아들이면 된다, 지는 해를 깨우려 노력하지 말거라, 너는 달빛에 더 아름답다.’


 호카곶에는 십자탑이 하나 있습니다. 그 탑에는 16세기 카몽이스의 시구가 하나 적혀 있습니다. ‘여기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 끝은 특별하고, 끝을 아는 이는 더욱 특별합니다. 지는 해가 아니라 달빛에 더 아름답기를 바라는 사람이나, 바다가 잘 지내는지를 아는 이들은 모두 끝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마 육지와 바다처럼 경계가 선명하지 않은 곳에서도 바람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어린 왕자가 끝을 아는 이와 함께 했다면 마흔네 번의 노을이 아니라, 마흔네 번의 달빛을 보았을 테고, 마흔네 번 오후 네시를 기다렸겠죠. 그런 이와 함께라면 어린 왕자도 B-612 소행성에서 잘도 사랑했을 겁니다. 삿포로에 가자는 말이 사랑이라는 것도 곧잘 알아들었을 겁니다. 끝과 끝을 이어간 뱃사람들처럼, 혼자 떠나지 않았을 겁니다.


 바람, 로카곶의 바람은 정말 특별했습니다. 끝을 알려주는 것은 바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바람이 있어야 나아가고 향합니다. 바람과 바람이 동음인 건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김광석 노래가 끝없이 불리는 것도 우연이 아닐 테죠. ‘너의 목소리가 그리워도, 뒤돌아 볼 수는 없지.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라며 흥얼거리는 그의 목소리도, 끝을 아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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