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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술관 중독자 Jun 01. 2020

때이른 더위에 겨울을 상상하다

17세기 네덜란드의 겨울 그림

헨드릭 아버캄프 Hendrick Avercamp,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이 있는 겨울 풍경, 1608년 경, 라익스뮤제움, 암스테르담


#1. 

마드리드 토박이 글로리아가 그랬다. “여름도 힘들고 겨울도 힘들지만 겨울은 여름이 주는 그런 즐거움이 없지.” 

서울 토박이인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녜요 글로리아, 겨울에도 재밌는 게 있어요. 뜨끈한 방바닥에 앉아 귤 까먹기, 김 모락모락 피어나는 오뎅바에서 오뎅 건져먹으며 뜨신 정종 한 잔 (혹은 여러 잔) 마시기-이때 마침 눈이 내려주면 금상첨화-, 스키나 스케이트 타기 같은 거요.” 


지금은 집값 땅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간 서울 한복판에도 공터가 많던 시절, 겨울이 되면 그 공터에 물 뿌려 만든 스케이트장이 생겨났다. 하루 종일 스케이트를 타다가 문 닫을 시간이 돼서야 다시 운동화로 갈아신고 집으로 가는 길, 내 발 밑의 땅은 얼마나 이상한 느낌이었나. 



#2.

가장 큰 붉은 건물은 맥주집이다. 나무 뒤에 반달 모양이 그려져 있는 간판이 걸려 있다. 건물의 2층에선 두레박을 얼음에 뚫어놓은 구멍으로 내려 물을 뜬다. 


추운 바람에 겉치마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종종걸음치는 여인이 지나가고 그 앞엔 강아지 둘이 신나게 뛰어다닌다. 그 중 앞에 있는 녀석은 혼령 멍멍이같지만 실은 물감 색이 바래서 그런 것이다.


그러나저러나 춥거나덥거나 볼 일은 봐야한다. 맥주집 옆, 바닥이 다 망가진 배가 지금은 뒷간이 됐다. 나무 밑이 볼일 보는 자리가 된 건 역사가 깊은 모양, 그 뒷편 나무도 엉덩이를 까고 쭈그려 앉은 사람이 보인다. 

 

얼음 위에 대자로 넘어진 사람, 손 꼭 붙잡고 스케이트 타는 커플, 줄지어 기차 행렬을 만들어 스케이트를 타는 남자들.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 챙이 넓고 납작한 모자는 유행이 좀 지났고, 기차놀이 중인 남자들 중 가장 앞에 선 남자의 모자 같은 뾰족한 모자가 최신 유행 모자였다고. 이 그림 곳곳에서 이런 뾰족 모자를 볼 수 있다. 

 

돈 좀 있는 마나님은 백마와 기사가 있는 썰매를 타신다. 팔토시를 낀 여인은 한 손은 짝꿍의 손을 잡고 나머지 한 손의 토시로는 코를 가린다. 춥긴 추운가보다. 긴 창을 든 남자는 장어를 잡는 중이다. 널빤지로 된 건물 벽엔 화가의 서명이 보인다. 



#3.

네덜란드 화가 아버캄프의 그림엔 겨울 풍경이 자주 나온다. 내가 겨울 풍경화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아버캄프의 풍경화엔 사람들이 있어서 더 좋다. 그야말로 남녀노소 인간동물 안 가리고 겨울을 즐긴다. 무엇보다 내가 아버캄프의 풍경에서 좋아하는 건 그의 나무다. 나무의 형상을 보기엔 잎이 다 떨어진 겨울이 제 때라는 얘길 들었다. 밑둥은 듬직하고 위로 갈수록 섬세한 겨울 나무. 아무리 추워도 새에게도 보금자리를 내어주는, 보고 있으면 괜히 믿음직스러운 생명체. 아마 나와 비슷한 마음을 400년 전 네덜란드 사람들도 품었기 때문에 아버캄프의 겨울 풍경화가 인기 있었을 것이다. 


#4. 

아버캄프라는 사람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리 많은 것 같지 않다.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지만 캄펜이라는 곳으로 옮겼는데, 그는 듣지 못하고 말을 못했기 때문에 캄펜의 벙어리라고 불렸다. 못 듣고 말 못하는 사람에게 그림이란 얼마나 중요한 표현 방법이었을까. 그런 그가 겨울 풍경을 유난히 자주 그린 것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밖에서 그림을 그리던 시절은 아니었지만, 추운 겨울날 검은 코트를 입고 자신만의 고요한 세계에서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 일하는 사람들, 뛰어노는 강아지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을 화가를 떠올리자면 같이 뜨거운 정종 한 잔 하자고 권하고픈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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