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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술관 중독자 Aug 08. 2020

영웅과 팜므파탈, 사랑과 배신

몇천년 전 스파이, 들릴라

페테르 파울 루벤스, 삼손과 들릴라, 1609-1610, 내셔널갤러리, 런던

렘브란트 판 라인, 장님이 되는 삼손, 1636, 슈타델 미술관, 프랑크푸르트

막스 리버만, 삼손과 들릴라, 1902, 슈타델 미술관, 프랑크푸르트


프랑크푸르트의 한 지인 집을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포르투갈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자동차로 와선, 나와 나의 노견은 이틀은 뻗어 있었다. 그리고 좀 정신을 차리고 나서 찾은 곳이 슈타델 미술관이다. 7년전 왔다가 입장료는 입장료대로 내고 딱 한 시간 본 곳. -_-

자세히 얘기하자면 남편 흉보는 얘기라 생략한다.

워낙 후다닥 봐서 거의 기억에 남는 게 없었는데, 아, 렘브란트의 작품을 보고 한참을 그 앞에 앉아 있었다.

여기저기서 렘브란트를 직접 볼 기회가 있었지만 그리 좋아하진 않았었는데, 이 작품엔 완전 매료됐다. 난 피가 낭자한 그림을 좋아하는건가?

그래서 루벤스도 생각나고, 함께 슈타델에 있는 막스 리버만의 작품도 훌륭해서 적는 글.



여자는 고요히 잠든 남자를 바라본다. 흰 피부는 붉은색 옷에 대비되어 더욱 희어 보인다. 건장한 남자는 여자의 무릎을 베고 곤히 잠들었다. 자기에게 어떤 일이 들이닥칠 지 모르는 채로.

섬세한 손길의 한 남자가 잠든 남자의 곱슬머리에 가위를 들이댄다. 아직은 남자가 깨면 안 된다. 얼굴에 주름이 진 노파가 조용히 촛불을 비춰준다. 문 밖에선 무장한 사람들이 대기중이다.


구약성경 판관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삼손이라는 남자는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이 약속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는데, 머리칼을 자르면 그 힘도 잃게 되니 절대 칼을 대지 말라는 천사의 경고를 받았다. 삼손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배하던 필리스티아 사람들을 당나귀 머리뼈로 천 명이나 쳐 죽일만큼 장사였다.

그러다 들릴라라는 필리스티아 여인을 사랑하게 되는데, 이를 알게 된 필리스티아 제후들이 그의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아내라는 임무를 들릴라에게 맡겼다. 물론 금전적 보상을 약속하고.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삼손의 비밀을 알아낸 들릴라는 복병을 불러 놓고, 삼손을 무릎에 재운 다음 사람을 불러 그의 머리를 자르게 했다.

그의 적들이 그를 붙들어 눈을 후벼파는데도 그는 힘이 다 빠져나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이 그림을 그리기 얼마 전 이탈리아 여행을 했던 루벤스는 삼손의 근육질 몸을 그릴 때 벨베데레의 토르소, 파르네제의 헤라클레스 등을 참고했다. 삼손의 머리칼을 자르는 남자의 섬세한 손놀림은 보는 사람도 숨을 죽여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파르네제의 헤라클레스, 벨베데레의 토르소, 벨베데레의 토르소를 루벤스가 스케치한 작품.



그러나 나의 눈길을 가장 오래 잡아둔 건 들릴라의 표정이다. 자신을 사랑한 남자를 파멸로 보내기 직전인 여자의 표정엔 잠든 연인을 바라볼 때의 애잔함, ‘애초부터 넌 내 손아귀 안에 있었지’ 하는 자신만만함, 사랑 따위는 돈과 바꿔 버리고 마는 잔인함 등이 뒤섞여 있다. 삼손의 등에 얹은 손은 그에게 보내는 마지막 연민이면서 잠든 그가 깨지 않도록 다독이는 수단이다. 문밖의 병사들은 삼손의 머리가 잘려나가자마자 방 안으로 쳐들어올 준비가 됐다. 횃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병사들의 갑옷은 차갑다.









렘브란트의 그림은 삼손의 머리칼이 잘려나간 직후다. 우당탕탕 필리스티아 병사들이 쳐들어오고 몇 명이서 힘을 합쳐 삼손을 제압한다. 그의 힘이 셌던 건은 누구나 알았기 때문에 준비를 단단히 했다. 구부러진 칼을 든 병사가 삼손의 눈을 찌른다. 삼손의 눈에선 피가 튀고 온몸은 고통으로 뒤틀린다.

조금 전 삼손의 머리를 자른 들릴라는 한 손엔 가위를, 한 손엔 삼손의 머리채를 들고 몸을 피하면서도 얼굴을 돌려 자신의 연인이 어떻게 되는지 확인한다. 바로 앞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광경에 놀라면서도 해냈다는 승리감이 보인다. 병사 하나는 공격 태세를 갖추고 칼을 쳐들었지만 입을 벌리고 바라보기만 한다.

머리칼이 잘려나가 힘을 잃은 삼손은 두 눈을 뽑히고 감옥에 갇혀 연자매를 돌리는 신세가 된다.




독일 화가 막스 리버만이 20세기 초에 그린 삼손과 들릴라의 주인공은 자신만만한 들릴라다. 그녀에겐 연민이나 놀라움, 연인을 배신했다는 복잡한 심경은 없다. 축 늘어진 삼손 옆에서 그의 머리칼을 치켜들고 복병을 부르는 들릴라는 승리감으로 가득하다. 1877년에 생상의 오페라 삼손과 들릴라가 초연됐고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가 큰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 리버만이 거침없는 팜므파탈 들릴라를 그린 것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감옥에 있는 동안 삼손의 머리는 다시 자라났다. 필리스티아 인들의 연회에 불려나가 조롱거리가 된 삼손은 신에게 기도한다. 마지막으로 힘을 달라고. 수천 명이 모인 연회장의 기둥을 두 팔로 밀어내어 건물을 무너뜨려 삼손은 자신의 적 수천 명을 죽이고 자신도 죽는다. 걸출한 영웅의 사랑과 배신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들릴라의 훗날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에 없다. 그 연회에 와서 그 때 죽었는지, 아니면 제후들에게 받은 돈으로 어디 멀리 떠나 잘 살았는지, 모른다. 몇천 년 전 스파이의 삶을 막연히 상상해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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