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rei aber Einsam Apr 02. 2020

길 눈이 밝은 것이 변호사의 덕목은 아닙니다만

길치

방향치

평생 들어온 말이다.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다.

길 눈이 어두울 수도 있지. 무슨 길 눈이 어두운 사람을 세상 부주의하고 멍청한 사람으로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정말 서럽다.


서른이 훨씬 넘은 어느날, 무슨 책을 읽다가 '길치인 것은 어쩌구 저쩌구해서(과학은 어렵다) 유전적 소인이 크고 불치의 병(?)'이라는 내용을 발견했다.

갑자기 얼마나 기뻣는지 모른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겠지만, 노력해서 되는게 있고 안되는게 세상에는 있다. 예를 들어 다 큰 성인이 노력한다고 키가 10센치 커진다거나, 노력한다고 갑자기 손가락이 길어진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하물며 불치의 그 무엇이라니. 뭔가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길로 같은 병을 더 심하게 앓고 있는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길 눈 어두운건 못고치는 일종의 병이래. 그리고 그게 유전이래."

"아하.....그래 우리가 병이구나. 유전인 건 알았다. 자식중에 니가 날 제일 많이 닮았는데 너만 길치니까."

오해하지마라. 이것은 대학 수학과정을 모두 마친 두 모녀의 대화이다. ㅎㅎ


아빠와 나는 단 둘이 시골을 가면서 수다를 떨다가 고속도로를 잘못 들어서서 엉뚱한 곳을 간다거나, 무려 40년 전에 돌아가신후 한번도 옮긴 적이 없는 할아버지 산소를 둘만 갔다가 못찾아서 멀쩡한 길을 놔두고 낫으로 베면서 온 산을 다녀서(인디아나 존스 인줄 알았다. 그당시), 시골 큰고모가 몇 년을 놀림거리로 우려먹고 있는 등 에피소드가 많으나, 말할 수록 바보스러워 보이므로 아빠와 나는 무덤까지 가져갈 에피소드가 한 트럭이다.  


길 눈이 어둡다 보니, 불편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같은 경찰서를 두 번째 가는 길이었다. 두 번을 다른 루트로 찾아간 데다가,

"자, 가시죠."라면서 위로 올라가려고 했더니

"변호사님, 우리 지하에서 조사받았자나요. 지하입니다. 이래서야 원, 변호사는 어떻게 되셨어요?"

정말 억울하다.

일단 길 눈이 어두운 것과 변호사의 자질과는 1도 관련이 없는데, 길 눈이 어두워서 이와 같은 얘기를 들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뚜벅이인데, 희한하게도 같은 법원을 100번을 가도, 느닷없이 다른 역에서 내리거나 다른 방향을 탄다거나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는 일이 아주 많다. 나도 도통 내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는데, 길눈이 어둡다 보니, 아주 집근처를 가야 집인줄 알때가 많고, 친구랑 같은 곳에서 수년을 놀아도 새로울 때가 많아서 항상 신선한 마음으로 놀 수 있다는 장점도 물론 있지만, 주로 친구들이

"너 가만히 있어. 우리가 찾으러 갈께." 와 같은 말들을 하곤 한다.

물론 아주 가끔은 한 번에 길을 찾아가서

"내가 동물같은 감각으로 길을 찾아왔다. 움하하."

라며 어이없이 뻐기는 일도 있다.


의뢰인하고 만나기로 했다거나, 같이 일하는 공무원과 만나는 일이 있을때는 아무리 헤매더라도 길눈이 어두워서 헤맸다는 말을 잘 하지 않는다.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음에도 '길눈이 어두운 사람 = 멍청?' 이라는 의식이 뿌리깊은 것 같다.

뭐, 내 나름대로 변명을 하자면, 공부 잘했다고 운동 잘하는거 아니고, 운동 잘 한다고 음악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각 다른 영역에서 능력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유독 "길치"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바보스러운 것으로 인식을 한다.


대한민국 백만 길치인들을 대표해서 비분강개해 본다.

"우리도 길 눈이 밝고 싶습니다. 

어느 의학자가 길눈이 밝아지는 프로세스나 약물을 제시한다면, 당좡 그 약을 한뭉치 사먹고 싶다고요. 우리도 무척 불편합니다. 당신들은 멍청한 것으로 치부하고 비웃으면 그만이겠지만, 우리는 평생 길을 다닐때 긴장되고, 여기가 맞나 수십번을 생각하고 지하철에서 잠시만 딴 짓을 하다보면 엉뚱한 곳에서 내리고, 몇 번을 간 식당도 못찾는 불편함을 겪습니다. 그냥 던진 돌멩이에 길치는 맞아 죽을 수 있습니다. 너무 그러는거 아니에요."


휴, 독립투사 저리가라 싶은 비분강개였다. 아침부터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작가의 이전글 장미꽃을 그려보내던 아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