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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직 Oct 03. 2023

향수병

캘리포니아 그녀 30화

89


"일기라니? 누구?"


장욱진은 뜨악하게 내뱉었다. 김선미는 아차, 괜한 참견인가 하는 뒤늦은 판단에 표정이 살짝 당황스러워하다가 이왕 엎질러진 물이라는 생각에 주섬주섬 자초지종 설명했다. 노을 속에 저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추모관이며 흔들리는 풀잎들, 끝없이 펼쳐진 들판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 좀처럼 오지 않는 버스 앞에서 내내 고여있는 울적한 마음 따위들을 두서없이 풀어놓았다.


"떠난 사람은 이미 떠났는데 굳이 달려드는 건 슬픔 때문이야? 살아 있다는."


김용덕은 쓸쓸한 표정, 시간이 손가락 사이를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별거 있냐? 철수 놈이나 우리나 다 거기서 거기지."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해. 주인공이라 믿지만 실은 조연이고 무대는 항상 떠난 배우는 기억하지 않는다는 거. 그만 놓아주었으면 좋겠어."


장욱진과 김선미는 주거니 받거니 했다. 나는 궁지에 내몰린 듯한 느낌에 뭐라도 변명해야만 하는 절박함에 마른 입술을 꼼지락거렸다. 단순한 호기심에 끌렸다고 하기엔 뭔가 석연찮고 지금은 알 수 없는 어떤 의무감이나 김용덕의 말처럼 슬픔이라고 하기에도 마땅찮았다. 굳이 말하자면 아무 이유도 없었다. 그저 마음 가는 데로 움직였을 뿐이었다.


"삶 자체가 별거 없는데 일기라고 대수겠냐? 눈앞에 있는 것들에 충실해야지. 그렇잖냐?"


장욱진은 비행기를 날렸다. 콩코드 여객기를 닮은 비행기는 미사일처럼 솟구치다가 장렬하게 땅바닥으로 돌진했다. 체육관 지붕은 고사하고 학생회관 그늘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살아 있을 때 알던 사람인데 너무 야박한 거 아니냐?"


김용덕은 장욱진을 보며 고개 설레설레 저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릴 떠난 사람이 인철수뿐이냐? 캘리포니아 그녀도 마찬가지야. 단지 방식이 다를 뿐이잖아?"


나는 불쑥 내뱉고 두 팔 크게 벌려 기지개를 켰다. 티테이블 한쪽에 밀쳐져 있던 문창 일지를 끌어당겨 펼쳤다.


"문창반에 와서 혼자면 늘 끄적거리잖아. 누군가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고 애당초 신경조차 쓰지 않기도 하고. 그저 지친 마음 덜어내기 위해 쓰잖아? 누군가 공감하더라도 뿌듯함은 언제나 읽는 사람의 몫이지 쓰는 사람은 아무 상관이 없어. 덜어낸 마음이면 족하지. 철수 일기도 그런 거야. 일기에서 뭔가 대단한 걸 발견하려는 건 아니고 그냥 덜어낸 마음은 무엇일까, 뒤적거리는 거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살았으니까?"


"맞아."


"있어? 덜어낸 마음이?"


"없어, 아직은."


"있더라도 없고 없더라도 있는 거겠지, 정확하게 말하면."


장욱진은 교열 기자답게 날카롭게 짚었다. 김용덕은 세 번째 비행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손가락은 익숙해진 방향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아까보다 쉽게 비행기는 모습을 갖춰갔다. 창밖에 구름이 떼거리로 몰려들고 있었다. 바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애하기 딱 좋은 날씨네!"


김용덕은 비행기 날개에 주문을 걸었다. 첫 비행기는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체육관 지붕으로 곧장 곤두박질쳤다. 두 번째 비행기는 체육관까지 갔다가 느닷없는 맞바람에 막히고 떠밀려 학생회관 상공으로 되돌아와 맥없이 꼬꾸라졌다.


"너도 읽어볼래?"


"관심 없다. 그렇지 않아도 읽는 게 직업이라 신물 난다."


장욱진은 다시 비행기를 접었다. 졸업하기 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풍경이었다. 시간은 움직이고 사람은 늘 제 자리에 있다는 짐작에 나는 조금 울적해졌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다가 느닷없이 되살아나는 기억을 마주쳤을 때처럼 마음 안에 쌓인 시간들이 무의미해졌다. 리셋할 수 있다면 다시 살아보고 싶은 욕구만큼 부질없었다.


"뒤포에나 갈까?"


"비행기의 항적을 따라가야겠지? 물론 바람이 이끄는 대로 가겠지만."


장욱진과 김용덕은 나란히 창가에 서서 비장한 얼굴로 바람의 방향을 가늠했다. 비행기는 사람의 의지에 따라 비행하지 않았다. 늘 날씨에 민감했다.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냐는 이강백의 자조적인 독백은 한낱 넋두리에 지나지 않았다. 거의 동시에 창문을 박차고 허공으로 뛰어오른 비행기 두 대는 사이좋게도 체육관 상공에서 몇 초 앞뒤로 추락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기다린다고 캘리포니아 그녀가 오겠냐? 할 일도 없는데 가자. 뒤포로!"


장욱진은 비행기에 미련 두지 않고 씩씩하게 말했다. 이제는 까마득하게만 느껴지는 몇 년 전 여느 날 오후처럼 우리는 문창반 동아리방을 빠져나와 길고 지루한 복도 지나 학생회관을 나섰다. 그 사이 빗방울은 더욱 굵어져 인정사정없이 화살처럼 땅바닥에 내리꽂혔다. 변함없이 시간은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90


용덕이 떠난 뒤 일주일가량 지독한 향수병에 시달렸어. 아침에 눈 뜨면 울적함이 몸을 짓눌러 아무 짓도 하고 싶지 않았어. 침대에 누워 정신은 말똥말똥한데 세상 모든 게 귀찮아져. 사진전 때문에 신경 곤두세우다가 끝나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어. 긴장이 풀어지고 단단했던 마음이 흐물흐물해지면서 절절 끓는 아랫목이 절실하게 그리워져.


캘리포니아에는 온돌이 없어. 물론 휴전선 따위도 없어. 하지만 문화원과 늘봄식당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철책선이 있어. 응옥찐의 얘기가 생각나. 입국 심사는 까다롭지만 그다지 오랜 시간은 아니었대.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완고함을 빼다 박은 아버지가 하필이면 베트남이냐고 핀잔하긴 했어도 응옥찐은 고집을 꺾지 않았대. 공항을 빠져나와 가장 놀랐던 일이 사람들 모두가 자신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사실이었대. 그 놀라운 발견으로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대. 사람들 속에 섞여 있으면 누구도 쉽게 자신을 찾아낼 수 없는 신기한 경험, 캘리포니아에서는 죽었다 깨도 느낄 수 없는 신선한 충격이었대.


거리와 산과 호수, 하늘마저도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대. 맞아. 문화원과 늘봄식당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러. 아저씨의 1인 시위도 사진전도 끝났지만 상처는 오래도록 기억될 거야. 문화원 원장과 아저씨의 우스꽝스러운 결투를 뭐라 할 수 있을까. 삿대질과 고함과 성난 표정을 주고받으면서 두 사람은 과연 무엇을 얻었을까. 더욱 기괴한 풍경은 한국말로 상대방에게 퍼부었다는 것. 길거리 지나가는 사람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해도 치열하게 열심히 노력하는 결투, 백인 경찰은 빤히 보면서 어리둥절해 하고.


내가 왜 창피하고 부끄러웠을까. 김철수가 아파트에 오면 나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줘. 눈치 보지 않을 수 없잖아? 처음엔 그냥 있었어. 멜라니와 김철수가 침실로 들어가자 기분이 이상해졌어. 난생처음 느껴보는 야릇하고 수상한 느낌들. 침실에서 들리는 멜라니의 가느다란 신음이 날카롭게 가슴을 후벼 팠어. 왜 내 몸이 달아오르는 걸까. 밖으로 나왔어. 더 이상 거실에 있을 수 없었어. 거리는 지저분했어.


슬럼가 쪽에서 퀴퀴한 바람이 불어왔어. 길 건너편 블루 보틀에 들어갔어. 사치이긴 하지만 원두커피를 마시지 않고선 배길 수가 없었어. 막연히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연인 사이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에 까닭 모를 허탈과 아쉬움이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어. 블루 보틀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보았어. 젊은 흑인을 보면 곧잘 조셉이 아닐까, 다시 살펴.


감옥도 사람 사는 곳인데 험악하고 지켜야 할 규정이 많다고 하더라도 잘 견디고 있을 거라 생각해. 의정부 교도소에 면회 갔던 때가 떠올라. 짧게 깎은 머리카락이 왜 그렇게 우스워 보이는지 실실 나오는 웃음 참기 위해 무척 안간힘 썼어. 물론 두 번째 면회 갔을 때는 교도소 담벼락에 기대어 한참 웃은 뒤에 면회실로 들어갔지. 다른 건 기억나지 않아. 오직 박철수의 짧은 머리카락. 지금 생각해보면 슬픔을 참기 위해 웃었던 건 아닐까.


대구로 내려갔다고? 그만큼 했으면 할 만큼 했으니 자신을 돌볼 때가 되긴 했어. 나랑 싸웠던 모든 말도 이젠 훌훌 벗어던지고 홀가분하게 고향 집으로 돌아갔겠지. 다만 조금이라도 세상은 좋아졌다고 믿길 바래. 욕심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거리는 낯설어. 응옥찐의 말처럼 거리 속으로 숨을 수 없어. 동양 여자는 금방 눈에 띄니까. 블루 보틀 안에서도 동양 여자는 나뿐이야. 모두 몰래몰래 힐끔거려. 한국인처럼 대놓고 보진 않아.


아주 천천히 커피를 마셔도 금방 바닥이 드러나. 슬그머니 일어나 아파트로 향했어. 김철수는 없었어. 욕실에서 물소리. 거실 창가에 서서 거리를 내려다보았어. 어디에도 김철수는 보이지 않아. 대충 몸을 닦은 멜라니가 욕실에서 나왔어. 거실 전신 거울 앞에서 가만히 자신을 들여다봐.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가. 어깨에서 찰랑거리는 젖은 금발과 부드러운 잘록한 허리, 풍만한 가슴 꼭대기에서 빛나는 핑크빛 젖꼭지.


그런데 나는 왜 문화원 앞길에서 서로 삿대질하며 목청 높이는 두 사내가 자꾸만 떠올랐을까. 응옥찐의 말처럼 눈에 금방 들어오는 동양 남자 둘이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어쩌면 멍멍 짖는 소리로 들리거나 혹은 신경질적인 앵무새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는 한국말을 쏟아내면서 핏대 세우는 두 사내가 떠올랐을까, 멜라니의 싱싱한 핑크빛 젖꼭지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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