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진 역할을 해내는 것은 내가 살아가는 데 엔진이었다.
두 자매 중 첫째 딸로 태어난 나는 기억이 존재한 순간부터 무거운 역할을 부여받았다.
“넌 우리 집안의 기둥이야.”
“엄마, 아빠 없으면 너가 가장이야.”
“너가 모범이 돼서 열심히 해서 나중에 동생 가르쳐 줘야 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이런 말들을 들었다. 아마 첫째 딸인 엄마도 그렇게 살아왔으므로 당신의 딸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셨으리라. 이것이 어떤 파급력을 가진지 모른 채.
흔한 K-장녀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K-장녀란, 코리아(Korea)’와 ‘장녀(맏딸)’의 합성어로, 한국 사회에서 맏딸로서 책임감과 희생을 강요받으며 살아온 여성들을 자조적으로 지칭하는 신조어. 주로 가족 내에서 쓸데없는 책임감, 양보, 겸손함 등 ‘맏딸 역할’을 자처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한다고 한다. 웃프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어릴 적 기억에는 항상 동생이 옆에 있었다. 친구들 생일파티에도 동생이 있었고,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놀 때도 있었다. 엄마는 어렸던 나에게 동생을 맡겨 목욕탕을 보냈고, 5천 원을 쥐여주며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갈 수 있었던 할머니 집을 보냈다. 그땐 대중교통 카드 환승제도가 없었다. 엄마와 다녔던 버스정류장의 이름을 기억하며 소라 한 컵을 사서 쪽쪽 빨아먹으며 창 밖을 바라보던 기억이 있다. 그때부터 난 길가의 상점들의 간판을 줄줄 읽었고, 내려야 하는 버스정류장을 놓치지 않으려고 정류장마다 노선도를 살폈다. 항상 긴장해야 했고, 혹시 실수할까 봐 불안했다. 무엇보다 동생을 잃어버리면 안 되었다. 말을 안 듣고, 나를 이기려 들 때마다 동생에게 울분이 터졌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볼거리에 걸려 턱 밑이 얼굴보다 더 크게 부어 있었다. 열이 나고 아파서 학교에 안 가면 안 되냐는 내 말에 엄마는 학생은 학교에 가야 한다며 아픈 나를 학교로 보냈다. 담임선생님이 집에 가라고 하셨지만, 엄마 때문에 못 간다고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엄마에게 전화해 데려가라고 하고 나서야 부리나케 학교로 데리러 왔다. 그 날, 날 데리러 오던 엄마의 모습이 선명하다.
방과 후 활동, 학원 등 학교 생활 외에 해야할 일이 많았다. 즐거웠던 기억은 없다. 내용들이 기억에 남지도 않는다. 한번은 서예를 배우러 가야했는데, 너무 가기 싫어 학교 운동장에 멍하니 앉아서 시간을 떼우고 집에 간 적도 있다. 열 살 때의 일이다. 내가 하고 싶어서 무얼 배운적이 있나 생각해봤다. 없다. 해야해서 배운것들은 아주 많다.
나에게 해야 하는 건 무조건 해야 하는 원칙이 생겼다. 과정과 밀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한다는 것이 우선이었다. 해야 할 일을 찾으려 주변을 살피는 일이 습관이 되었다. 그렇기에 예민해야 했다. 혹시 벌어질 안 좋은 일을 예측해 대비해야 했고, 안 좋은 행동을 하지 않는 아이가 되어야 했다. 말수가 적었고, 행동반경이 좁았다. 동네에서 골목대장을 했지만 놀기보다는 시키는 역할을 자처했다. 고생하는 엄마를 도와 설거지를 했고, 빨래를 널었다. 태권도, 수영, 발레, 서예, 피아노 등 엄마가 시켜 준 많은 취미활동 중 내가 선택한 것은 없었다. 엄마가 등록하면 가야 했다. 크면서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할 일들이 쌓여 갔다.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역할,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역할, 조직구성원으로서의 역할. 주어진 역할을 해내는 것은 내가 살아가는 데 엔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