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이만큼 변했으니 부모님도 달라졌을 거라 믿었었나보다.
말 잘듣는 착한 어린아이에서 고등학생이 되니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도 될 일에 대해 생각이 잡히기 시작했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었다. 엄마는 넌지시 사무직이나 선생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난 과감히 연극영화학과를 선택했다.
하지만 대학교는 집에서 20분 거리에 있었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갓어른의 경험을 하는 것 이외에는 고등학교 때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 20대가 시작됐다. 등록한 헬스장에서 중학교 친구들을 마주치자 그 뒤로 가지 않았고, 선배와 동기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국토대장정을 한다고 했을 때도 그저 다른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 같았다. 타지에서 온 친구들이 술 한잔하자고 해도 주저되었다. 동생이 서울로 학교를 간다고 했을 때는 집안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한번 갇히지 시작한 시선과 마음은 나이가 들고 환경이 바뀌어도 열릴 줄 몰랐다.
그랬던 나에게도 동생의 서울 생활과 타지, 해외를 오가는 주변인들을 보니 나에게도 어떤 목표가 스물스물 피어올랐던 것 같다. 나도 무어라도 해보자는 마음이 생겼다.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동생과 함께 살기로 하며 상경했다. 일을 구했다. 돈이 벌리니 사고 싶은 걸 사고,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약속했던 국토대장정 프로그램을 혼자 다녀왔다. 20대 후반이 되면 외국 나가볼 생각을 절대 안 할 것 같아서 사람들에게 해외를 가게 됐다고 떠벌린 다음 필리핀&뉴질랜드 연계 어학연수를 갔다. 어쩌다보니 워킹홀리데이까지 하게 되어 9개월이 1년 10개월이 되었다.
외국문화를 직접 경험하는 삶, 외국인과 대화를 하고 친해지고, 한국이었으면 겪지 않았을 안 좋은 경험 조차 값졌다. 대학생들이었던 대부분의 연수생들에 비해 돈을 벌어온 소수였던 나는 누구보다 생활을 즐겼다. 정말 재밌었다. 덕분에 영어도 빨리 늘었고, 추억도 많이 생겼다. 한국에서 조용한 밤과 새벽,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해가 뜨면 잠이 들었던 생활과 달리 노력하지 않아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생활습관이 생겼고, 바이오리듬이 굉장히 좋아 컨디션 때문에 기분이 들쭉날쭉 하지도 않았다. 생계, 꿈, 취업, 내집마련 등의 걱정이 없으니 어디서든 마음이 편했다. 최선을 다해 즐기고자 했고 즐겼다.
역시 떨어지니 가족이 많이 생각이 나더라. 좋은 구경과 경험을 가족과 나누고 싶었고, 감사한 마음에 엽서도 써서 집으로 보냈다. 워킹홀리데이를 마치고 했던 유럽여행 중 스위스에서 인터라켄을 올라가는 기차를 타며 너무나도 눈부신 풍경에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났다. 돈 많이 벌어 여기는 부모님을 모시고 꼭 다시 오리라 다짐했다.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짐을 얼추 정리하고 나를 많이 그리워했을 부모님에게 줄 선물을 챙겨 부모님댁으로 향했다.
혼자만의 착각이었을까. 나도 이만큼 변했으니 부모님도 달라졌을 거라 믿었었나보다. 부모님댁에서 며칠 지내던 어느날이었다. 아빠와 엄마가 소파 아래 앉아 있었고, 난 소파에 누워 같이 티비를 보고 있었다. 내 손이 닿는 곳에 엄마의 어깨가 있어 가볍게 주물러 주고 있었다. 아빠가 눈을 흘기더니 안마기를 툭 엄마에게 던졌다. 휴게소에서 흔히 파는 한 손으로 결린 부위를 두들기는 그 안마기 말이다.
“존중받고 싶으면 존중받을 해.”
내가 차분하게 아빠에게 말했다. 눈에서 불꽃이 이는게 저런 거구나 싶었다. 아빠는 벌떡 일어나더니,
“니가 내한테 해준게 뭐가 있는데? 뭐 있나?”
얼굴이 시뻘개져 소리치더니 곧장 안방으로 들어갔다. 곧 다시 나오더니,
“니가 자식 교육을 이따우로 시켜서 내가 이런 말 듣는다.”
되려 엄마에게 큰소리쳤다.
“내가 말한 건데 왜 엄마 걸고 넘어져? 나한테 얘기해!”
나를 노려만보다 다시 방에 들어간 아빠는 옷을 갈아입고 나가버렸다. 아빠가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기에 그날 엄마와 난 찜질방에서 잤다. 약 2년 동안의 혼자 성장하고 다짐한 것들이 금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