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에 생긴 구멍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모습을 키웠다.
아빠는 육 남매 중 다섯째이자 둘째 아들이었다. 드센 경상도 누나들의 기에 눌렸고, 멋대로 살아버리는 형과 세상 물정 모르는 동생 사이에 낀 애매하게 착한 둘째 아들이었다. 성인이 되자마자 돈을 벌어 부모님에게 드려야 했고, 부모가 몸져 누웠을 땐 누나 셋은 이미 시집을 간 지 오래였고, 형은 집에 없었으며 동생은 외면했기에 병수발을 아빠가 다 들었다고 한다. 그건 엄마에게도 맡기지 않았다고 했다.
아마도 그런 것들이 켜켜이 쌓였기에 본인이 제일 힘들었고 억울했던 아빠는 주사가 심했다. 토요일 밤만 되면 만취해 들어와 온 집안을 들쑤셔 놓았다. 엄마에게 해서는 안 될 말들을 했고, 그 말들은 고스란히 나와 동생의 귀에도 들어왔다. 그렇게 한바탕 집안을 뒤집어 놓고는 천둥소리 같은 코골이를 하며 잤다. 그리고 한 주의 유일한 휴일인 일요일에 일어나 밥을 챙겨 먹고, 다시 자고 일어나 밥을 먹고 자고 월요일이 되면 출근을 했다. 다시 토요일이 되면 만취해 들어왔다. 공휴일이나 기념일 전날이면 어김없이 만취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와 나와 동생은 거실에서 TV를 보다가도 터, 벅, 터, 벅 계단을 올라오는 아빠의 발소리가 들리면 쏜살같이 방으로 들어가 죽은 듯이 자는 척을 해야했다. 큰소리치며 우리 방 앞을 서성이는 아빠를 엄마는 필사적으로 막았다. 이불 아래 숨어 든 나와 동생은 울분과 분노를 삼켜야 했다.
중학생이 되고 덩치가 좀 커지니 아빠에게 힘으로 밀리는 엄마 앞에 서서 맞서기도 했고, 고생했다며 빨리 자자며 살살 달래보기도 했다. 여전히 혼자만 힘들었던 아빠는 변함이 없었다. 우리는 노력했다. 엄마와 나와 동생은 좋은 시간을 보내면 바뀌려나 싶어 외식을 하러 나가자고 해봤지만 피곤하다며 집에 있는 걸 먹겠다고 우겼고, 영화 보러가자고 해봐도 조금 지나면 TV에서 해준다며 밖에 나가지 않으려고 했다. 우리도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묻지 않게 되었다. 엄마는 그런 아빠에게 매끼니 5첩 이상의 상을 차려주었다. 아빠 입에서는 매번 반찬 투정이 나왔다. 같이 밥을 먹을 때면 모두들 시끄러운 TV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언쟁과 같은 말이 잠깐씩 오갔다. 자기감정에 빠져 가족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아빠가 싫었고, 그런 아빠를 경제적 이유와 가족의 형태를 놓지 못하는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우리는 수차례 엄마에게 이혼요구를 했지만, 겁이 난 엄마는 자신을 위해서도 자식을 위해서도 선택하지 못 했다.
엄마는 4남매의 셋째이자 장녀였다. 돈을 벌기 위해 학업을 마치지 못 했고, 마찬가지로 돈을 벌어다 집에 드렸음에도 마음적 보상을 받지 못 했다. 사랑이 필요했던 엄마였지만 돈이 많은 줄 알고 아빠와 결혼했던 엄마는 자식 둘에 대한 책임감으로 무장해 살았다. 아빠가 만취해 들어와 집기를 깨부시고 비난을 일삼고 다정한 말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아빠 밥을 항상 차렸고, 집안일을 했고, 일을 했다.
우리가 아빠의 행동에 비난하거나 예의없게 굴면 “아빠한테 그러면 안 된다, 아빠는 가장이고, 미워도 가족”이라는 말을 했다. 그런 엄마의 이중적인 모습에 혼란스러웠다. 어린 우리들 앞에서 아빠의 잘못된 말과 행동에 대해 비난하다가 다음날 해가 뜨면 가장으로서의 아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엄마의 말과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순간들이 오기 시작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엄마의 이야기 창구였다. 엄마가 얼마나 외가를 위해 희생했는지, 아빠가 얼마나 엄마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지, 어떻게 친척들이 엄마를 서운하게 하는지 들어야 했다. 어리고 여렸던 나는 엄마의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물들었으며 엄마의 슬픔은 곧 나의 슬픔이었다. 나도 모르게 착한 딸과 엄마를 돕는 딸이 되었다. 그러나 엄마는 남의 이야기를 하느라 나를 볼 겨를이 없었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던 엄마는 엄마에게 완벽하지 않았던 딸이었던 나의 성격이나 외형을 남들 앞에서 깎아내렸다.
내 마음에 생긴 구멍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모습을 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