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생각 그만

내 자신이, 나에게 너무 벅찬 존재였다.

by 생각주머니

그렇지 않아도 생각이 많은데, 온갖 위험하고 폭력적인 장면들이 떠올랐다. 길을 걸으면 예기치 못한 사고가 나는 장면을, 놀이기구를 타면 안전바가 툭 풀려버리는 예상을, 불편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과 논쟁을 벌이는 상상을 늘상 하게 됐다. 머릿속에서 누군가와 싸우기 바빴고, 위험에 대처하기 바빴다. 과거의 불편했던 순간으로 돌아가 원인을 끊어내거나, 상대방을 한방 먹이는 멘트를 하는 나를 그렸다. 벌어지지 않은 미래의 상황으로 나를 데려가 좋은 상황이든, 나쁜 상황이든 드라마 주인공처럼 멋지게 헤쳐나가는 나를 상상했다. 그럴 때마다 현실과의 괴리를 느꼈다.


단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책과 영화, 드라마를 많이 접했기에 생각의 모음들로 소설을 쓰기도 했고, 중학교 때 수업시간에 쓰던 소설을 들켜 문학영재로 선정되기도 했다. 소설을 쓸 때면 배우들의 동선과 장면 묘사를 생각하다 보니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게 되었고, 결국 그것이 나를 영화 현장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창의적인 생각보다는 현실을 부정하는 생각들에 빠져들었다. 책상 앞과 학교가 세상의 전부였던 내가, 세상의 복잡한 얼굴들과 마주했다. 불공정한 일들이 내 안의 질서를 무너뜨렸고, 불평등한 현실이 내 생각의 결을 뒤틀었다. 생각이 나를 삼키고, 나는 생각이 되어갔다. ‘생각하지 말자’ 되뇌어보기도 했고, 뇌가 원하는 만큼 생각하게 내버려두기도 했다. 모두 부질없었다. 나는 간절히 뇌의 스위치를 끄고 싶었다. 할 수 있다면 잘 때 뇌를 꺼내놓고 싶었다. 노력을 해도 안 되는 것은 분명 존재했다. 24시간 풀가동하는 공장 같은 뇌를 나는 어찌할 수 없었다.


2024년 상반기, 일이 없을 때 인스타그램에서 그랜트 카돈의 영상을 보게 되었다. 그는 마약중독자에서 8,000억 자산가가 된 사람이다. 불안해지거나 부정적인 생각이 들면 극단적으로 긍정적인 말을 빈 종이에 갈겨 쓰고, 괜찮아지면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했다. 동기부여 유튜브 채널 <드로우앤드류>에서는 매일 아침 2분씩 긍정 확언을 외친다고 했다. 나도 나를 위한 긍정 확언 영상을 만들었고, 매일 노트에 적으며 100일 챌린지를 했다. 소용없었다. 내 삶이 꽤 괜찮다는 걸 몰랐던 건 아니다. 그런데도 과거와 부정적인 상황에 나를 얽매는 내 자신이, 나에게 너무 벅찬 존재였다.


2020년, 해외 촬영이 필요한 작품을 했을 때 구인 조건은 ‘영어 회화 가능자’였다.함께 하게 된 팀원들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부모 밑에서 자라 어릴 적부터 해외에서 생활했고, 기본 세 개 국어를 했다. 학비가 비싼 좋은 대학을 나온 이들도 많았다. 그들과 달리 나는 일찍이 영화 현장에서 돈을 벌며 어학연수와 워킹홀리데이로 영어 실력을 쌓았다. 그 결과 그들보다 높은 직급과 페이를 받았다. 도움 없이 스스로 일궈낸 결과물에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들이 당당하고 자신 있어 보일 때면 왠지 모르게 의기소침해졌다. 나의 부모는 풍족한 재화를 베풀지 못한 것에 미안해했지만, 나는 갈대처럼 마음의 가난으로 흔들렸다.


“부모 탓하지 말아라.”
“언제까지 과거에 묶여 있을 거냐.”
“현재를 살아라.”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해라.”


누구보다 당사자들이 벗어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벗어나려고 발버둥쳐도 제자리인 그 기분은,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온 후 마주한 부모의 모습은 꾹꾹 눌러둔 불운했던 과거를 다시 폭발시켜 현실처럼 느끼게 했다. 희망적이었던 세상을 회의적으로 보고, 도전적인 정신은 묻어두며 안주하는 삶을 살았다. 나에게 투자하려던 다짐은 통장 잔고로 묶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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