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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서인간 Jan 20. 2024

164년 전 죽은 철학자가 인기를 끄는 이유

2024년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철학자는 쇼펜하우어다.

서점가에서든 유튜브에서든 쇼펜하우어의 인기는 연예인의 그것을 능가한다.

  

쇼펜하우어의 말은 냉소적이다. 신랄하다. 때로는 잔인하게 들린다. 

따뜻한 위로의 말을 갈구할 같은 현대인들이 왜 160여 년 전 작고한 괴팍한 염세주의자를 소환하는 것일까. 


쇼펜하우어 1788년 2월 22일 ~ 1860년 9월 21일 


쇼펜하우어가 쓴 에세이는 지금 이 시대 대한민국에 대한 메시지로 읽히는데 부족함이 없다. 

오늘자 신문 사설이나 잡지에 실린 칼럼이라고 해도 전혀 위화감이 들지 않을 정도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국가에 대하여 

국가는 경제가 발전하고 산업이 일어나면 국민의 소득이 향상되어 이전보다 더 풍족해진다고 말한다. 경제발전이 빈부격차를 해소하고 모든 이에게 공평한 수입이 돌아간다는 청사진만 남발하는 것이다. 하지만 경제가 발전한 결과로 국민은 더욱 이기적으로 변모했다. 가진 자는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눈에 불을 켜고, 못 가진 자는 가진 것이라도 빼앗길까 봐 난폭해진다. 계층과 계층이 분열되고, 세대 간의 의사소통은 오래전부터 단절되었다. 한 국가 안에 여러 개의 국가가 동시에 존재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부자들의 나라, 가난한 자들의 나라, 늙은이들의 나라, 젊은이들의 나라가 쉴 새 없이 충돌하고 비난하고 전쟁을 준비한다. 이를 관리해야 할 국가는 한발 더 나아가 능력이 없어서 못 가진 것이고 힘이 없어서 빼앗겼으니 부당하게 생각하지 말라며 법과 공권력으로 사람들을 위협한다.

▪교육에 대하여 

페스탈로치가 평생을 붙잡고 가르쳐도 백치로 태어난 아이는 현자가 되지 못한다. 백치가 그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이를 강요로 개조한다는 것은 사회평등으로 포장될 수 없는 엄연한 폭력이다. 그러므로 백치로 태어난 인간은 백치로 죽을 수 있게끔 기다려주고, 천재로 태어난 인간은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며 고독하게 죽어가도록 배려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교육은 기다려주지도, 배려하지도 않는다. 백치도 일정 수준 이상의 지적능력을 사회에 보여주어야 하며, 천재는 일정 수준 이상의 자기 능력을 함부로 표출해서는 안 된다. (중략)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 교육의 발생 원인은 성장이 아닌 개조에 있다고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다. (중략) 사람은 적어도 마흔 살까지는 교육에서 소외되어야 한다. 


▪명예와 체면에 대하여

명예와 체면. 기이하고 미개하며 우습기 짝이 없는, 인생에서 가장 쓸모없는 규범. 그것들은 인간의 본성과도 거리가 멀고, 본질과는 더더욱 가깝지 않으며, 정상적인 인간관계에서는 절대로 파생될 수 없는 편견의 악습이다. 가만히 있는 나를 두고 남들이 멋대로 떠들어댄 이야기 때문에 사회적 평가가 확립될 수 있다는 현대사회의 체면 중시 발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실수하고 미친 짓을 해서 명예가 땅에 떨어졌다면 이해가 된다. 하지만 남들이 이러쿵저러쿵 나에 대해 떠들어대는 헛소리 때문에 한 인간의 삶이 무참히 파괴될 수 있다는 공포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된다. (중략) 오늘날 체면과 명예가 그 사람의 전부인 양 절대적인 대접을 받는 이유는 이 시대의 인간관계, 혹은 권위와 신분이 편견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체면을 중시하는 까닭은, 내세울 인간성이 직분에서 얻은 명예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서다. 능력이 없으니 사람들의 존경을 받지도 못하고, 그런데 또 권력은 욕심나고, 그러니 스스로 자기 이름에 금칠을 해버리는 것이다.  

▪부모에 대하여

부모는 자녀를 개인으로 바라봐주지 않는다. 자신이 사랑에 빠졌을 때처럼 자녀의 속성이 자기 안에 갇혀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랑의 결과물이며, 자신이 사랑에 빠진 거룩한 대가로서 주어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녀 역시 타인과 마찬가지로 나와 구별되는 하나의 개인임을 인정하는 부모는 매우 드물다. 자녀를 개인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 자녀를 향한 애정이 없다는 식으로 오해하는 부모도 많다. 자녀를 나와 동등한 개인으로 인정해주지 않으면 자녀도 그에 대한 상호반응으로 보모를 개인으로 인정하지 못하게 된다. 부모도 나와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개인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자녀는 부모의 모든 것을 자기 소유로 인식해 버린다. 부모에겐 개성도 없고, 감정도 없고, 오직 나를 위해 일생을 내 노예처럼 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공급해 주는 하나의 물건으로 부모를 취급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모든 불행이 결국 누군가를 사랑하는데서 시작됐을 상기한다면, 사랑이야말로 한 사람의 일생을 추락시키는 가장 근원적인 불행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교제에 대하여

인간의 불행 중 상당수는 혼자 있을 수 없어서 생기는 일이다. 사교성은 도덕적으로 떨어지고 지적으로 우둔하거나 불합리한 사람과 접촉하게 만드는 성격이다. 위험하면서도 해롭다. 비사교적이라는 것은 사교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많은 것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므로 그 자체만으로 큰 행복이다. 인간이 겪는 모든 고뇌는 교제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건강 다음으로 행복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마음의 평정이 사교 때문에 위험해진다. 고독이 없었다면 인류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음식을 절제하면 몸이 건강해지듯이 사람과의 만남을 자제하면 영혼이 건강해진다. (중략) 나와 다른 사람들과 교제해서 무엇을 얻겠는가. 사람들과 어울리려면 자신의 본성에 깃든 가장 저급하고 비열한 부분, 즉 일상적이고 비속하며 천박한 부분을 매개로 끄집어낼 수밖에 없다. 공동체는 말 그대로 공동의 가치관과 동질성이 있어야 하는데 모든 인간이 같은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 집단의 정신 수준을 가장 어리석은 자에게 맞춰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성은 타인의 높은 수준에 맞춰 나를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가장 낮은 수준에 맞춰 나를 떨어뜨리는 행위가 된다. 고립과 고독은 아마도 이런 사회에 질려버린 인간의 영혼이 살기 위해 창안한 고급스러운 감정일지도 모른다. 

▪나이에 대하여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려면 적어도 마흔 살은 되어야 한다. 정신적으로 아무리 평범한 인간이더라도 나의 성숙과 경험의 결실만 있으면 인간으로서 과거의 자신보다 조금은 나아지기 시작한다. (중략) 생명은 서른여섯 살까지는 시간의 이자로 살아가고, 서른여섯 이후부터는 시간 그 자체를 갉아먹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젊었을 때에는 적자가 발생해도 미미해 보인다. 어차피 이자일 뿐이므로 지출이 과해도 걱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베푼 이자가 중단되고 원금을 사용하는 때가 오면 사라진 시간의 이자가 아쉽게 다가오는 것이다. 결국,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라는 생명의 원금이 계속해서 빠져나간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 젊은 시절보다 더욱 욕심을 내는 것은 시간을 상실했다는, 생명이라는 원금이 얼마 안 남았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국가나 사회, 명예와 체면은 물론 심지어 부모자식 간의 사랑에 대해서조차 지극히 회의적이다. 

인간이나 인간이 만든 문명과 관습이 원래 그리 대단한 가치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쇼펜하우어가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무엇일까. 

그는 건강, 겸손, 중용, 내면의 질서를 강조한다. 

그리고 진정한 친구와 신실한 우정을 상찬 한다. 


▪자의식에 대하여 

확고한 자의식을 갖춘 사람들은 타인의 칭찬이나, 재촉, 경멸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가 내게 무슨 말을 하든 상처받지 않고 타인에게 상처를 줄 말도 생각나지 않는다. 자의식이야말로 타인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이끌어나가는 힘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인간 상호 간의 관계 맺기에 서투른 까닭은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거나, 심술을 부리거나, 교만하거나, 질투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내 고집만 부리는 원인은, 나보다 훌륭한 사람을 만났을 때 그를 시기하고 어떻게든 깎아내리려고 고집을 피우는 원인은, 자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시선으로 나를 보기 때문이다. 내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나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자의식이 결여되었다는 것은 나와 나의 관계가 온전히 성립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나와 나의 관계가 온전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온전해지기를 바란다는 것은 욕심이며, 허영이며, 교만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나로 평생을 살 수는 없다. 사람들의 눈높이에 나를 맞추려는 데에서 모든 불행이 시작된다. 나는 어쩔 수없이 나다. 내가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사람들도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건강한 생활이란

건강한 생활은 육체와 정신의 조화를 통해 개선된다. 육체와 정신 양쪽 모두 건강한 성공적인 생활은 매우 드물다.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인간의 피로를 느낀다. 사사로운 움직임마저도 신체인 부담이다. 이를 견뎌내고 건강하고 활기찬 생활을 오래도록 관리하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좋은 습관이 그 대가라고 할 수 있는데, 좋은 습관을 기르는 습관이 있다면 그것은 인내다. 인내는 무조건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자기 몸이 견딜 수 있는 범위를 깨닫고 그 범위 안에서 유지하는 것이 진정한 인내다. 견뎌내지 못할 때까지 버티는 건 멍청한 짓이다. (중략) 생활에 정답은 없고 정해진 규칙은 없다. 규칙적으로 조용한 생활이 행복한 사람도 있고, 충동적이고 시끌벅적한 생활이 행복한 사람도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면의 질서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면의 질서가 유지되어야 한다. 스스로 정한 범위 내에서 자신의 상태와 성격이 조화된 최적을 규칙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우정에 대하여 

사람과의 관계를 보다 원활하게 이끄는 힘은 지속적인 우정에서 나온다. 우정의 성격은 차분한 한결같음이다. 변한다면 그것은 우정이 아니다. 들뜬다면 그 또한 우정은 아니다. 변하는 것은 계산이며, 들뜨는 것은 사랑이다. 내 친구는 그곳에 있고, 난 이곳에 있다. (중략) 우정은 두 개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 우정을 가진 자는 두 개의 영혼을 가진 자다. 한 영혼이 쓰러지더라도 곁이 있는 또 다른 영혼이 그를 일으켜 세운다. 어떤 경우에도 둘이 함께 쓰러지는 법은 없다. 삶이 인간에게 우정을 선물한 까닭이다. 우정은 다른 어떤 감정보다 인간을 현명하게 만든다. 우정만이 인간과 사물의 실상을 보여주며, 인간다운 정당한 삶과 방법을 말해준다. 인생을 살아가는 가장 현명한 방법을 생각하기 전에 내가 무엇과 친해져야 하는지,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어떻게 살고 싶다는 소원보다는 내가 사랑하는 그것을 위해 살고 싶다는 바람이 인간에게는 더 크고 위대하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친구를 찾는 법

좋은 친구를 찾는 법은 인간에 대한 판단이다. 이때 기준은 예의다. 예의가 바른 사람은 타인과의 의견이 대립될 때 타인의 입장을 고려해서 최대한 공정한 판단을 내리려고 노력한다. 그 같은 노력의 결과가 좋지 못하더라도 이런 시도가 우정을 형성하고 지속하는데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 예의가 바른 사람은 자기 생각이 옳은 것처럼 상대방의 생각도 그의 입장에서는 옳은 선택임을 인정할 줄 안다. 반대로 내면이 비천한 사람은 그가 스스로를 사랑하고 인정하듯 모든 사람이 자기를 사랑해 주고 인정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자들과 싸우느니 예의 바른 사람에게 시비를 걸어 다투는 편이 낫다. 내면이 비천한 사람의 행동 특성은 야비함이다. 그들을 공정하게 대우해 준다는 것은 그들의 먹잇감이 되는 행동이며, 그들이 우리에게 공평을 베풀리라고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에게 우정은 의무가 아닌 편의이기 때문이다. 

▪행복에 대하여

내가 청년들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은 뭔가를 얻기보다는 뭔가를 제거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으라는 것이다. 돈을 벌어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가난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건강해지려는 욕심을 버리고, 병에 걸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즐겁게 놀기보다는 욕을 먹거나 비난받지 않도록 한다. 이것은 다분히 현실적인 생활수칙이다. 이 수칙들을 지킨다면 작지만 확실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중략) 인생은 불행해지기는 쉬워도 행복해지기는 어렵다. 행복을 포기하는 것은 위선도 아니고 절망도 아니다. 가장 현명한 선택이다. 그 선택이 지혜의 시작이다. 인생의 지혜란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어떤 상태가 되더라도 크게 놀라지 않고, 크게 실망하지도 않고, 크게 기대하지도 않는 중용의 미덕이다. 크게 실패해도 크게 실망하지는 않는다. 크게 성공해도 크게 기뻐하지 않는다. 인생이라는 게 사실 크게 휘둘릴 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쇼펜하우어의 충고를 옮겨 본다. 

일상생활에서 정말 도움이 되는 말이다. 



▪잠이 최고다 

하루를 마치고 차분히 반성하는 시간을 갖는다. 지나간 하루를 돌아보며 반성하는 시간 속에서 얻어지는 감정은 나의 무능과 타인에 대한 분노. 결국, 또다시 우울해진다. 나의 한계에 분노하고 타인에 대한 원망으로 불쾌감이 치솟는다. 그 마음이 나를 어둠 속에 갇히게 한다. 모든 원인은 피로 때문이다. 반성하고 있다는 것은,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보고 있다는 것은, 자신을 한심스레 여기고 있으며, 타인을 증오하는 중이고, 영혼과 육신에 휴식이 필요하다는 신호다. 이럴 땐 그저 쉬는 게 최선이다. 자기 자신이 하찮게 느껴질 때 인간은 뭔가 반성할만한 건수가 없는지 두리번거린다. 뭘 해도 기운이 나지 않을 때 인간은 무턱대고 반성하며 자아를 성찰한다. 그럴 바에야 아무 생각 없이 잠자리에 드는 편이 낫다. 자신이 증오스러울 땐 자는 것이 최고다. 도박도, 기도도, 명상도 도움이 안 된다. 여행도 도움이 안 되고, 술을 먹어봐야 자기혐오만 짙어질 뿐이다. 잘 먹고, 잘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자기혐오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혐오스러운 오늘로부터 조금이라도 빨리 떠나는 것이 상책이다. 괴롭다면 평소보다 더 많이 먹고 평소보다 더 많이 자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그리고 내일 아침 일찍,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펼쳐나가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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