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지속 가능한 육아
나는 원래 야행성이 아니었다. 굳이 나누자면 아침형 인간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늦게 자면 다음 날 너무 피곤해서, 10시에서 11시 사이에는 잠을 자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6개월 전 풀타임 책임 육아를 시작하고 야행성으로 점차 바뀌기 시작하더니, 코로나 바이러스로 유치원조차 못 가게 된 지금 12시는 넘어야 잠이 들고, 새벽 1~2시에 자는 경우도 종종 생겨났다. 아이들이 보통 9시에서 10시 사이에 자는데, 아이들이 자고 나면 아무리 졸려도 2시간은 인터넷이라도 해야 뭔가 답답함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슬기로운 마음을 고쳐먹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아침형 인간이 되고자 했으나,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과 해방감이 몰려왔다. 고생 끝에 오는 낙과 같았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아이들 재우고 나서 드라마를 밤늦도록 보던 아내에게 빨리 자라고 핀잔을 주던 사람이 바로 나였다. 맨날 피곤하다고 그러지 말고 잠이라도 푹 자라고, 체력도 안 좋은 사람이 아저씨의 원빈처럼 오늘만 사냐고 그랬던 내가 아내와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사람은 그래서 경험해봐야 안다. 지식은 경험에서 시작하고 개념은 실제적인 경험과 연결될 때 파악할 수 있다는 경험주의는 근거가 분명한 철학이다. 말로만 알던 육아를 직접 경험해 보니 그것이 얼마나 많은 노동과 시간이 투여되는 일인지를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삼시세끼 요리하고 밥먹이고 놀아주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은 일임을 절감했다. 수고와 헌신으로 아이들을 잘 키워낸 아내와 그리고 나를 잘 키워주셨던 엄마가 새삼 고마웠다.
그런데, 사실 내가 조금 더 이른 시간에 수면에 들지 못하는 이유는 아내의 공부 때문이기도 했다. 아내는 밤에 집중이 잘되는 전형적인 야행성으로 밤에 공부가 잘됐다. 내 풀타임 육아의 이유는 늦은 나이에 유학온 아내의 공부를 도와주기 위해서였던 만큼 나는 아내의 밤공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방이 2개라 일찍 자려면 아이들과 같이 자야 했다. 잠귀가 밝고 예민한 나는 아이들의 360도 전방위 몸부림에 숙면을 취하지 못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나도 자유시간도 확보하고 아내와 같이 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취침시간을 늦추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7시면 일어나 배가 고프다고 아빠를 깨우는 아이들로 내 수면 시간은 항상 부족했다. 잠이 부족하니 피곤했고 짜증이 났다.
전대미문의 코로나 바이러스로 이번 학기 동안 아내는 학교에 가지 않고 모든 수업을 온라인으로 듣게 됐다. 아이들도 5월 초까지 휴교령으로 유치원에 가지 않는다. 5월 말이면 여름방학인 데다 미국 코로나 확산 추세로 볼 때 아이들 역시 9월 새 학기가 시작될 때까지 집에 있을 공산이 크다. 벌써 한 달 이상 온 가족이 똘똘 뭉치고 붙어 있으면서 24시간 공동생활을 하고 있는데, 앞으로 5개월을 더 해야 한다. 묘책이 필요했다.
아내와 함께 지속 가능한 육아. 적어도 앞으로 5개월을 버텨낼 수 있는 육아에 대해 구체적 인대화를 나누었다. 언제나 그렇듯 아내의 그간의 고생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나의 무지와 몰이해에 대한 통렬한 반성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대화는 상대방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대화의 분위기를 좋게 만드는데, 그것은 상대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높이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도 그랬다. 그런 공감과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는 지속 가능한 육아를 위한 방안을 찾았다. 가장 핵심은 내가 5개월을 버티는 것에 있었다. 풀타임 책임 육아 6개월로 접어든 나는 부쩍 체력적인 한계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며 슬기로운 육아생활을 목표로 변화를 결심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슬기롭고 지속 가능한 육아는 아내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또한 현실이기도 했다.
아내는 나의 숙면을 위해 아이들과 함께 자기로 결정했다. 아내와 둘이서 자는 날이면 아이들은 논산 훈련소 불침번 당번 깨우듯 가장 졸린 새벽 3시~4시에 찾아와 엄마와 아빠를 구슬프게 부르며 잠을 깨웠다. 아이들끼리 자는 훈련도 중요하지만 내가 잘 자야 다음날이 무리 없이 돌아가니 당분간 그렇게 하기로 했다. 또 저녁을 아내가 책임지기로 했다. 저녁 요리에서 해방되니 한결 부담감이 줄었다. 삼시세끼 준비는 사실 나에게 버거웠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아내가 오후 2시간 아이들을 보기로 하면서 나만의 회복시간이 확보됐다. 이렇게 아내는 나의 수면의 질을 높이고 육아와 요리시간을 덜어주었다.
아내의 제안에 나는 진심으로 고마웠다. 아내의 도움으로 나의 육아시간은 14시간에서 12시간으로 줄었다. 아이들 평균 수면시간이 10시간 정도가 되니까 말이다. 그래도 사실 많다. 지속 가능한 육아를 위해 쌍둥이들이 둘이서 아빠 없이 서로 노는 시간이 필요했다. 친구이자 형제인 쌍둥이가 둘이 놀면 분명 아빠가 줄 수 없는 즐거움과 유대감이 있을 것이다. 독립심과 협동심을 기르기에 쌍둥이만큼 좋은 조건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아이들에게 미국에서는 과자를 사주고 나중에 한국 돌아가면 롯데마트에서 장난감 많이 사주겠다는 조건으로 둘만의 시간, 둘이서 노는 시간을 만들었다. 아내의 배려와 아이들의 협조로 슬기롭고 지속 가능한 육아의 시스템을 어느 정도 마련했다.
이제는 정말 나의 몫이다. 시스템을 제대로 돌아가게 하는 것도 그 시스템 안에 변화와 성장의 내용을 담는 것도 나의 책임이다. 하지만 조금 더 여유 있고 조금 더 기분 좋게 슬기로운 육아를 지속 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슬기롭고 지속 가능한 육아는, 나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족이기 때문이다. 가족은 생활 공동체고 마음공동체며 결국은 운명공동체가 되기 때문이다. 나의 생활과 아내의 생활과 아이들의 생활이 서로 연결된 것처럼 나의 마음과 아내의 마음과 아이들의 마음도 밀접하게 잇닿아 있다. 그렇게 가족은 하나가 되고 운명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