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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on Apr 20. 2020

“쌍둥이 아빠의 풀타임 육아기 - 슬기로운 육아생활”

5. 웃는 아빠가 되자! 우주에서 아빠가 제일 좋아!

쌍둥이에게 경쟁은 숙명이다. 물론 터울이 있는 형제나 자매에게도 경쟁은 존재한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쌍둥이들의 경쟁은 본능적이고 직접적이었다. 밥 먹을 때는 누구에게 먼저 밥을 주었는지부터 똑같은 양의 분배가 이루어졌는지 신경전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누가 반찬을 조금이라도 더 먹는 낌새가 보이면 곧바로 이의를 제기했고, 상대방 남은 밥을 확인해 가며 더 빨리, 더 많이 먹기 승부를 펼쳤다. 응가든 쉬든 화장실을 갈 때도 똑같이 갔다. 한 명이 가면 나머지 한 명은 그냥 따라가는 식이었다. 나오든 안 나오든 일단 가고 본다. 한글 공부를 할 때도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어나서 잘 때까지 이 둘의 경쟁관계는 멈추지 않는다.   

   

경쟁의 장점은 효율성이고 성과다. 아이들이 식사 때마다 경쟁하니 반찬투정 없이 다 잘 먹고 영양상태가 좋다. 배변과 배뇨습관도 좋다. 공부할 때도 한 명이 그만둘 때까지는 버텨야 하니 집중력이 좋다. 물론 단점도 있다. 속도와 능력의 차이로 발생하는 비교의식과 열등감이다. 쌍둥이다 보니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절대로 비교하지 않는다. 혹시나 아이들에게 편애로 보일 수 있고 또 아이들이 자신에 부정적 이미지를 형성할지도 모르는 염려에서다. 하지만 둘은 쉽게 비교한다. 그리고 속상해하면서 종종 나는 아무것도 못한다며 울기도 한다. 그럴 때,  너희들은 각자 잘하는 것이 다르고 엄마 아빠는 너희들이 잘해서가 아니라 너희들 모습 그대로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알아듣지 못한다. 그래서 여전히 억울하고 속상해한다.      


쌍둥이들의 경쟁은 나도 지치게 했다. 내가 개입해서 시비를 가리고 중재에 나서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선책으로 우선권 2부제를 도입했다. 홀수 날은 형이, 짝수 날은 동생이 그날의 모든 선택과 행동의 우선권을 갖는 제도였다. 짝수 날에 시행했다. 첫째는 홀수가 짝수보다 앞선다는 사실에 수긍했고, 둘째는 자신이 먼저 혜택을 보게 되므로 불만이 없었다. 우선권 2부제의 시행으로 선택과 결정의 순서가 정리되니 불필요한 경쟁과 싸움이 줄게 됐다. 그래도 아이들의 비교의식은 여전했다. 1분 늦게 태어난 동생이 더욱 심해 의도적으로 첫째를 낮추고 둘째의 장점을 부각해서 칭찬하고 둘째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노력을 기울기도 했다.      


그러다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얼마 전에 아내가 아이들의 앞머리를 잘랐다. 삐뚤삐뚤하게 바가지 모양으로 머리를 깎았는데, 아내의 서툰 솜씨 탓에 둘째는 웃긴 머리를 하게 되었다. 머리를 깎고 샤워를 하는데, 둘째 모습이 귀엽고 웃겨서 눈물이 나도록 둘째를 보고 웃었다. 그랬더니 둘째는 왜 웃냐고 말하면서도 나의 박장대소하는 모습을 보고 기분이 좋아져 샤워 중에 노래를 하고 춤을 추고 더욱 웃긴 표정을 지었다. 그날이 홀수여서 첫째가 먼저 몸을 닦고 나갔고, 곧이어 둘째를 닦아주는데, 둘째가 엄마한테도 엉아한테도 얘기하지 말라면서 아빠한테 할 얘기가 있다고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화장실 문을 닫고는 내 옆으로 와서 귓속말로 “나는 우주에서 아빠가 제일 좋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너무 행복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나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을 놓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웃음이고 표정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많이 웃어주지를 못했다. 풀타임 전업 육아를 시작하고는 더 그랬다. 아이들을 돌보고 함께 보내는 시간을 업무처럼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나는 주말도 없고 퇴근도 없는 육아라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웃음은 사라지고 표정은 굳어지며 의무만 존재했다. 어쩌면 아이들은 내 무표정한 얼굴을 통해 스스로가 충분히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며, 또한 부족하다고 느끼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더 경쟁심이 발동하고 그래서 더 비교의식을 가지게 됐던 것은 아니었을까?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는 인간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살아가고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이는 자라면서 먼저 엄마 아빠를 통해 형제자매를 통해 세상을 경험하고 관계를 체득하며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게 된다. 아빠가 육아를 책임지고 있는 지금의 우리 아이들에게 나의 웃음은 바로 둘의 존재감을, 만족감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지도 모른다.      


다시금 육아의 본질을 생각하게 됐다.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아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그 행복은 신체적으로 균형 있게 성장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되며 지적으로 필요한 호기심을 충족해 갈 때 채워질 것이고, 이를 떠받치는 부모의 사랑은 얼굴로 웃음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한다는데, 세상에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다만 아이가 그 사랑을 확인할 수 있도록 웃어야 한다.      


아주 가끔은 배꼽을 잡고 눈물이 쏙 빠지도록 숨이 멎도록 웃어야 한다. 웃자. 또 웃자. 계속 웃자. 볼펜을 물고 입 꼬리를 올리고 웃는 표정만 지어도 진짜 웃을 때 나오는 행복 호르몬이 분비된다고 하지 않는가. 웃으면 복이 오고, 웃으면 아이들이 행복해지고, 웃으면 슬기로운 육아가 된다. 그리고 웃으면 나는 우주에서 제일 좋은 아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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