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신변잡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포레스임 May 23. 2024

도시샤에서 동주를 마주하다

마음이 가는 대로 가는 길



 5월 중순, 아내의 생일이 있어 딸아이에게 휴가를 낼 수 있냐고 물었다. 아이는 어떻게든 내보겠다고 답했다.

나 또한 올해가 정년 마지막 근무이니 뭔가 특별한 추억을 만들고 싶기도 하고, 작년에 아내의 병고를 치르면서 가족여행이라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깊어졌다. 딸아이는 너무 멀지 않은 일본의 교토를 가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도쿄보다는 덜 혼잡하고 천년고도에 한적한 공원과 인공수로를 화면으로 본 적이 있어, 내심 적합한 여행지라고 생각했다.



 간사이 공항을 나와 교토행 전동차를 타고 역에 이르니 나의 생각과는 달랐다. 인구 대국답게 너무 혼잡하여 방향을 가늠할 수 없었다. 정해진 숙소에 여장을 풀고 가까운 곳으로 식사를 가자고 딸아이가 보챈다. 그리 먼 곳이 아니니 아내도 차 없이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푸념소리가 들리고 한낮의 볕이 너무 뜨거웠다. 근처의 할인점인 듯한 곳에 들어가 마땅한 식당을 찾는데, 아내는 두리번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쇼핑을 하는 것이 아닌가? 원래가 뭘 사는 것보다 아이쇼핑하는 것을 좋아하는 터에 이국에 왔으니 활기가 돋는 모양새였다.


 남자들이 흔히 그렇듯, 나는 쇼핑에는 별 흥미가 없는 취향이라 한 곳을 정하고 앉아 현지사람들의 동작을 응시했다. 들어오면서 본 장면 중에 노년의 경비원들이 많았다. 차나 사람들 출입하는 곳의 통로에는 어김없이 노년의 경비원들이 입초근무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인구 고령화로 인한 노인일자리 일환인 듯싶었다. 한국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고령화사회로 들어가니, 이들의 모습이 우리 미래의 자화상인 듯싶어 괜히 씁쓸해졌다. 1층으로 내려가자고 해서 가니, 마침 저녁 세일가로 이런저런 먹거리에 붙은 가격을 보더니 아내는 어린아이처럼 좋아라 했다. 결국 쇼핑한 것으로 저녁을 때우고 첫날의 여정을 마쳤다.


교토는 관광이라고 해봐야 절과 사원 그리고 신사가 전부이니 사찰 탐방부터 해야 했다. 그런대로 고즈넉한 곳의 절을 찾으니 그런대로 봄기운에 갖은 꽃들이 만발하여 볼만하였다. 하지만 신사(神社) 방문은 마뜩지 않았다. 입구에 서있는 특유의 문은 야스쿠니 신사와 같기에 별로 좋게 보이지 않았다.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기 때문인가 보다. 납봉(納奉)이란 글을 새긴 수많은 신사문을 통로로 만든, 여우신을 모신다는 후시미이나리 신사는 재물에 관한 그들의 관념을 엿볼 수 있었다. 주황색의 납봉터널을 지나서 나가자 머릿속에는 오면서 본 교토대의 전경이 생각났다. 근처에 도시샤 대학이 있겠다는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딸아이에게 도시샤대학을 가자고 했다. 거기에 윤동주의 시비(詩碑)가 있기 때문이다.


 국문학을 전공해서인지 나는 전부터 그곳을 꼭 보고 싶었다. 영원하고 순결한 청년의 상징과도 같은 그가 나날의 마지막을 보낸 학교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서시(序詩)가 새겨진 그 비석을 보기 위해서였다. 정문에 내리자 단아한 학교 이미지가 눈에 들어왔다. 기독교 재단으로 자유와 세계주의를 표방하는 149년의 역사를 가진 대학이라 고색창연한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윤동주는 당시에도 이런 학풍을 염두에 두고 정지용 시인의 권유에 도시샤를 선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청춘이 꿈을 꾸기에는 좋은 장소 같았다. 여느 대학과는 다르게 고즈넉한 분위기도 좋았고, 이전의 떠들썩한 관광객들이 밀집한 신사와는 다른  학교 정경에 아내와 딸애도 만족해하는 눈치다.


 청결한 시심을 가진이로서 동주는 너무도 험한 시기를 살다 갔다. 서슬 퍼런 일제 강압기말의 광란적인 조선어 말살정책이 극성이던 그 시기에, 혜성과도 같은 이 천재 시인은 우리의 글로 크나큰 울림을 주고 홀연히 시대의 십자가를 지고 형극의 길로 사라져 갔다. 그를 아쉬워하는 발걸음은 아직도 그의 시비에 꽃다발 행렬이 줄지어져 묘비인양 그의 시비를 지켜주고 있었다.


 먼저 온 젊은 가족이 있기에 우리는 뒤쪽 벤치에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들 둘을 데리고 온 부부는 아이들과 시비 앞에 옹기종기 무릎까지 꿇고 한참을 아이들에게 설명을 하는 듯했다. 그 광경이 나에게는 아직 윤동주는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비록 육신의 그는 이미 가고 없지만, 그의 글은 영롱히 남아 영원토록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어 살아있는 것이다.


그곳에는 두장의 태극기와 누군가의 꽃다발 그리고 한글의 방명록이 있었다. 무슨 내용이든지 적어놓고 가라는 안내의 글도 있었다. 그 한글로 시를 쓴다는 죄명은 반일독립운동으로 비화되어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감, 규슈대학 인체실험으로 생을 마감한다. 아이러니하게 그의 시는 일본의 국민시인인 '이바라기 노리코'의 노력으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비롯한 네 편의 시가 일본교과서에 올라있다고 들었다.


 그렇게 그의 시는 시대와 국적을 넘어서 아쉬움과 한탄이 교차하는 우리의 기억 속에 영원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순수청년 동주는 도시샤에서 그렇게 나와 마주하고 있었다. 많은 관광지가 있었지만 유독 그의 시비가 눈에 선한 것은 아직도 아물지 않는 내상의 흔적이 어딘가에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침 교토의 날씨는 우울하게 흐려지고 있었다.


 여행을 마치고 간사이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지난 기억을 애써 지우려는 듯 비가 오고 있었다. 난기류에 기체가 조금 흔들리긴 했으나, 구름 위로 올라간 동체는 저녁시간대의 석양이 구름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청주공항으로 갈수록 구름은 걷히고 멀리 보이는 우리의 산하가 그렇게 정겨울 수 없었다. 모처럼의 여행이 상쾌한 기억의 잔상으로 남아 여운이 짙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프리지아 꽃은 시들지 않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