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로 복귀한 앵커 손석희의 시사 프로그램은 제목이 '질문들'이라고 한다. 왜 하필 '질문들'일까? 이미 눈치챈 분들도 있겠지만 이젠 질문을 잘해야 올바른 답을 얻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동안 인간이 만든 모든 기록은 AI가 찾아서 편집된 해답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직 발표되지 않고 대중이 궁금해할 만한 이슈들을 찾아, 관련 인물들을 출연시켜 궁금했던 질문을 하는 프로그램이 손석희의 '질문들'일 것이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관련 내용을 어느 정도 숙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는 질문자체가 있을 수 없다. 예전의 컴퓨터 프로그래밍은 코볼, 포츠란, 베이식 등의 언어를 입력해야 원하는 값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제는 AI가 인간의 질문을 분석하고, 기존의 문헌과 자료를 조사하여 보기 좋게 편집까지 해주는 세상을 맞이하게 되었다. 문제는 질문을 어찌할 것인가가 화두가 되었다.
질문은 생각의 시작이다. '왜?', '어떻게?' 등의 부사어는 생각을 촉발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질문은 두뇌를 활성화시킨다. 즉, 한 번의 질문으로 해답을 찾는다면 더 이상 생각은 진행되지 않는다. 답을 찾을 수 없다고 인지하면 생각을 포기하게 된다. 하지만 다양한 답을 찾고자 변형된 질문을 계속하게 될 때, 생각은 빅뱅의 확장을 하게 되고, 복잡하지만 두뇌는 격동의 시간을 갖는다. 또한 민감성과 호기심을 키운다. 민감성이란 사물, 현상, 환경 등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정도를 말한다. 호기심 또한 그것들에 관심을 지속시키는 것을 말한다. 호기심과 민감성은 단순한 것에도 의문을 가져 질문을 생성한다.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등의 수업을 참관해 보면 유아기, 아동기 때의 아이들이 단순한 것에도 수많은 질문을 쏟아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어찌 보면 우리의 교육은 청소년기로 갈수록 질문이 사라지는 잘못된 길을 걷게 된다. 입시라는 허울 좋은 관문을 넘기 위해 근원적인 교육의 정수인 질문을 사장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잦은 질문은 민감성과 호기심이 부족한 아이라도 환경적으로 두뇌를 활성화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질문'은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다. 즉, 해답이 목적이며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의 시발점이 질문들이다. 이는 질문이 없다면 어떠한 답도 찾을 수 없다는 의미와 통한다. 또한 질문의 질에 따라 해답의 질이 결정된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이 글은 '질문'을 해야 하는 학생들에게 필요한 소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나이가 들었다고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AI가 극도로 발전해 가는 시기에 모든 지식은 '질문'이라는 화두에 모아질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쳇 GPT나 뤼튼 등은 질문을 해야 답을 준다. 이용을 안 하자니 수많은 기록을 검색을 해야 하고, 그렇게 검색한 자료가 편중된 앎의 일부일 뿐이라는 불안감에 AI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어떻게 질문을 하여 내가 원하는 답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질문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장기 기억에 입력되어 가장 오랫동안 기억된다. 흔히 질문은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한 방편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변형된 질문을 통해 자신이 연구하는 학문을 더욱 예리하게 기억하기 위한 방편으로 외국의 대학에서는 상용화되어 있다. 토론식 수업과 교수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해대면서 수업은 진행된다. 미국 등의 나라로 유학을 가본 학생들이 낯설어하는 수업의 방식이다. 앎을 얻기 위한 학생들의 집요함은 끝없는 질의와 토론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경우는 이와는 반대로 대학에 들어서는 순간, 질문은 사라지는 이상한 수업 방식이 문화로 정착되어 있다. 심지어 외국의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국내 대학의 교수로 임용된 사람이 첫 수업의 부담을 선배 교수에게 토로하니, 강의 도중에 학생들의 질문은 일절 없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던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못내 우리 대학의 수업방식에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질문은 다른 사람과 소통을 통하여 관계를 유지하며 자신을 재발견하는 기회의 장이다. 다른 이들과의 소통은 질문이 기초가 된다. 일방적인 대화 서로를 알아가는데 하등의 도움이 되질 않는다. 대화란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데서 출발한다. 시의 적절한 질문이 계속되어야 대화는 완성된다. 묻고 답하는 과정 속에 원만하고 유기적 상호 간의 관계가 형성이 되기 때문이다. 서로 다양한 질문을 주고받다 보면 자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마음을 열고 생각을 교환하다 보면, 내가 아는 나와 상대가 바라보는 나 사이에 그동안 몰랐던 자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질문을 기초로 하는 '하부르타'라는 교육방법으로 인재를 키워내고 있다. 노벨상 수상자의 30%를 배출한 저력은 이러한 질문을 배경으로 한 교육방법에서 그들의 치열한 진리를 찾아가는 방법론적 교수법이 주효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모르는 것은 물어봐야 한다' 단순하고 명쾌한 이야기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넘어가기 일쑤다. 의문점은 있지만 굳이 남에게 물어서 해답을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태도는 일제강점기 시절의 유습이 고착화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 이전의 서당과 향교, 고등교육기관인 성균관에서도 토론학습이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가 되자 저들은 근대 주입식 교육을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학생은 가르치는 사람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가져야 하고, 모든 내용을 머릿속에 담아야 했다. 교사의 입장에서도 교수법이 편했을 것이다. 그렇게 식민지인들을 교화하기 위한 '근대교육'이라는 명목하에 학습법이 고착화되어, 일방적인 전수와 흡수하는 학생의 문화가 이어져 내려왔다. 해방 후, 우리는 무엇을 수습할 시간을 갖지도 못하고 이념에 찢기어 6.25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전후복구와 경제개발에 매달리는 사이 많은 착오를 겪고 있다. 즉, 프랑스와 미국에서 전후복구의 일환으로 일었던 68 운동 등이 우리의 뒤안길에는 전무했던 탓에, 아직도 그 여파는 만만치 않게 우리의 삶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일방적인 교수법과 성적지상주의 폐해로 성장하여 소통할 줄 모르는 인사들의 정치참여로 한국은 내홍을 겪고 있는 것이다.
질문은 단순히 모르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다. 질문을 통해 다른 이의 생각을 접하고, 같은 주제를 다른 사람들은 어찌 생각하는가를 접하는 귀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최상의 해답을 찾아가는 격렬한 토론'은 원래부터 우리의 문화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권위주의와 일사불란 함을 강조하는 사이에 우리의 민주주의는 시들어갔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목하에 자유라는 비둘기는 조롱 속에 갇힐 뿐이었다. 세상은 바뀌어 간다. 우리가 주도한 것은 아니지만, 모든 앎은 질문으로 귀착되어 간다. 삶의 방식에 의문을 갖지만 어떠한 해답도 토론도 없는 사회에 젊은이들은 숨죽여 방 안에 틀어박혀 있다. 결과는 세계 최고의 출산빈국으로 전락하여 앞날에 대한 어떠한 가능성도 점칠 수 없게 되었다.
386세대인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모든 분야의 현역에서 물러날 때 즈음, 세상은 바뀔 것이다. 민주화를 위한 여정에서 가장 앞장섰던 세대라지만 가장 오염이 심한 세대이기도 하다. 세대는 흐르고 느리지만 인식의 틀인 패러다임 또한 문화를 변하게 할 것이다. 치열하게 묻고, 답하며 다른 이들과 소통하는 온라인상의 문화가 오프라인에서도 이어져 또 다른 기회의 장이 열리길 간절히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