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업에 취한 아이들에게
“잘 보라고 한마디만 해주세요.”
쉬는 시간에 3학년 남학생이 도서실에 와서 한 말이다. 3교시 영어 시험을 앞두고 빼곡한 필기가 가득한 교과서를 들고 터덜터덜 들어왔다. 편의 상 그 학생을 곰돌이라고 해보자. “곰돌이 잘 볼 거야~!” 하고 당차게 말했더니 곰돌이 얼굴에 생기가 돌면서 예~라고 화답을 했다. 가끔 지독하게 피곤하고 지치면 오히려 까닭 없는 에너지가 돌 때가 있다. 조금 자서 피곤할 때보다 밤을 그냥 꼴딱 새워서 나사가 반쯤 풀린 듯한 취한 상태. 오늘 만난 아이들은 해탈의 경지에 오른 듯이 초점이 없는 눈으로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기말고사 첫째 날이다.
“곰돌이가 못 보면 전교생이 다 빵점이지!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걸 선생님이 똑똑히 봤는데! 1등은 따놓은 당상이야~!”라고 힘차게 말했더니 고단함에 취한 곰돌이가 와~라고 화답을 했다. 시험기간 내내 복도 입식 책상에서 자습하고 쉬는 시간엔 도서실에 와서 또 자습하고 다시 종이 치면 복도 입식 책상에 가서 자습했던 곰돌이다. “빨리 해치우고 싶지? 이제 그만 공부하고 싶지 않아?”라고 하니 지겨워 죽겠다는 듯 고개를 힘차게 주억거린다. “그만 보고 싶어요.”. 이미 공부했던 걸 다시 보고 다시 보는 중일 테니 당연히 그러할 것이다. 그렇게 충분히 준비된 상태에서 한마디를 얻고자 찾아온 곰돌이. 본인이 준비한 것이 시험에 나올까, 내가 뭔가를 놓치면서 공부하지는 않았을까 불안한 것은 시험을 앞둔 누군가에게는 너무 당연한 불안감이다. 가끔은 이렇게 타인이 확신에 가득 찬 말을 해줄 때 얻어지는 용기가 있다. 내가 준비한 것에 대한 불안감이 나를 잡아먹으려 할 때, 내가 그것을 준비한 시간과 노력을 까먹으면 안 된다. 내가 아이들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이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충분히 노력했을 것이다. 그래서 시험 당일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 시간과 노력을 까먹지 않게, 아이들보다 더 힘차게 이야기해주는 것. 때론 근거 없는 누군가의 확신이, 자신이 한 경험들로 근거를 만들어 내기도 하니까.
우리 학교는 고교학점제를 시행 중이어서 시험 시간표와 일정이 상당히 머리 아프다. 선택 과목이 많아 이동도 많고 대기하는 시간도 많다. 4일 동안 기말고사를 보는데, 어떤 학생은 2, 3일에 다 몰아서 보게 되기도 하고 어떤 학생은 4일 동안 자습과 시험이 잘 분배되기도 한다. 그래서 시험 시간표를 짜는 선생님이 고생이 많으시다. 쉬는 시간에는 가방을 메고 학생들이 대이동을 하게 된다. 교실의 개념이 예전과 정말 많이 달라졌다.
그래도 몇 안 되는 공통 과목들이 있다. 2학년에겐 영어 시험이 그렇다. 영어 시험 10분 전, 입실했다. 정신없이 교과서와 필기 노트를 보던 아이들에게 자리를 정리하고 자리에 앉으라고 말하며 주변을 정리했다. 공통과목을 치르는 교실은 다른 선택과목 시험장에 비해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예전보다 교실의 개념이 약해 반 친구들과의 진한 교류는 보기 드문 것 같지만, 그래도 같은 반 친구들끼리의 유대감이란 게 있다. 그래서 어쩐지 산만하고 유쾌한 기운이 흐른다.
“자, 이제 보던 거 가방에 넣고 책상에 필기구만 올려두세요. 가방은 칠판 앞으로 가져다 놓습니다. 딱 자리에 앉아서 정갈하게 기도해 애들아. 잘 보게 해 주세요-“
책상을 정리하던 아이들이 와하하 웃는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시험 불안 증세가 상당히 심했다. 매번 시험 날마다 탈이 나서 아침도 제대로 먹지 않고, 시험 보기 직전까지 화장실에 있고 그랬다. 그랬던 나에게 몇 안 되는 좋은 기억 중 하나는, 시험 감독을 들어오셨을 때 긴장을 풀어주던 선생님들의 농담들. 삶은 배움의 연속이고 배움엔 끝이 없지만, 마치 이 시험이 끝나면 다 팽개쳐도 될 것만 같은 말들. 공부하면서 수업하면서 참 별거였던 시험이 사실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들. 그런 말들이 주는 느낌이 좋았다. 나처럼 학창 시절을 보내고 그보다 더 한 세월을 쌓아온 어른들이 안심시켜주는 말엔 그런 힘이 있다. 내가 전전긍긍하는 무언가가 무너질 때 나까지 무너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힘. 그 힘엔, 기회는 한 번만 오는 게 아니라 다음이라는 것으로 또 올 수 있음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늘 처음을 살면서 처음부터 너무 잘하려고 애쓰는 조급함들을 털어낼 수 있었다. 오늘 아이들이 보여준 웃음에선 과거 내가 느낀 그런 비슷한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자리에 앉아서 조용히 하세요. 답안지 나눠줄 거예요. 앉아서 내가 지금까지 공부한 것들을 주마등처럼 쫘악 펼쳐서 생각하고 있어 봐 애들아.”
긴장을 풀어주려고 이런 이야기를 했다. 평소 개구지던 남학생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샘. 너무 캄캄해요.”
덕분에 나도 아이들도 긴장이 조금 풀렸던 순간.
“캄캄해? 시험지 보면 다시 밝게 빛날 거야 걱정 마!”
그렇게 시작된 시험. 모두 종이 치자마자 시험지를 일제히 펼치는 모습을 시작으로, 각각의 시간들이 펼쳐졌다. 열심히 시험을 푸는 아이들. 차분하게 문제를 푸는 아이, 맹렬하게 푸는 아이, 다리도 떨다 펜도 돌렸다 시계도 봤다 하며 부산하게 푸는 아이, 꾸벅꾸벅 졸다 정신 차리고 보는 아이. 정말 제각각이었다. 아이들에게 시험이 각자 어떤 의미일지는 모르겠다만, 이것 하나로 자신을 판단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수업 내용에 대한 시험이지 본인을 재단하는 시험이 아니니까. 자신의 가치가 이 시험의 점수로 표기되지는 않으니까.
중간고사, 기말고사, 다시 중간고사, 기말고사. 그 시험들을 거쳐 성적을 얻어내고 그 성적으로 원하던 대학을 가고 하고 싶던 공부를 해서 여기까지 왔다. 그래서 시험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시험만 중요한 게 아니다. 이 시험이란 게 앞으로 어떤 형태로 존재할지는 모르겠다만, 이것을 상대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음’이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 아닐까. 마지막인 것처럼 노력하다 보면 마치 이것이 마지막 기회처럼 인식되고, 이것을 망치면 마치 모든 것이 망쳐질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마지막인 것처럼 노력했다면, 그 노력한 시간들이 반드시 다음이라는 기회를 줄 것이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런 막연한 믿음을 한 사람쯤은 줘도 되지 않을까 싶다. 늘 열심히 하라는 말을 듣는 아이들의 빈틈없는 마음에 조금의 틈을 주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유머라는 말은 ‘Humanus’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라틴어로 액체를 뜻하는 말로 흐르다는 의미를 가진다. 어디로 흐를지 모르니 예측할 수 없고 그 흐름에서 우리는 예상 밖의 일들을 마주하게 된다. 아이들의 마음의 틈엔 그런 유머가 흘렀으면 좋겠다. 예상 밖의 일들이 반드시 즐겁거나 기쁘진 않을지라도. 빨강머리가 한 말이 떠오른다. 그 말로 글을 맺어야겠다.
엘리자가 말했어요,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져요.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는 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