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도서관의 풍경
<1학기>
점심시간 도서실이 바글바글하다.
작년 시험문제 원안을 공개하던 날.
의자를 두고도 아이들이 바닥에 앉아서 여기저기 널브러져서 본다.
옆 학교 선생님이 방문하셨을 때
“애들은 바닥에 앉는 걸 더 좋아해요”하고 한 말이
이제야 그 장면에 적용되어 이해가 간다.
바닥에 부자재 튀어나왔는데 빨리 고쳐줬으면 좋겠다.
청소도 열심히 해야겠다.
코로나로 인해 제한 두었던 대출과 열람시간을 해제했다.
그동안 정해진 시간 외에 학생들이 들어오려고 하면 단호하게 “안 돼.”라고 했었다.
한 명을 허용하면 규칙이 손쉽게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순순히 돌아나가는 학생들에게 미안하고 얼마나 고마웠는지.
그래서 시험문제 원안 공개 날에 학생들이 바글바글 할 때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도서실을 활짝 개방했다.
마스크랑 손소독제만 하면 출입할 수 있는 도서관은 아이들을 환영할 준비를 마쳤다.
그동안의 강경책 때문인지 며칠 쓸쓸하던 도서관은 점점 훈훈한 공기가 돌기 시작했다.
기말고사 끝나고 여름방학 전 어수선하고 나른한 시기였다.
여름방학에 대출을 많이 해가라고 특별 행사도 준비했다. 자의 반 타의 반이지만 어쨌든 정신없이 기획하고 결재받고 품의 올려 진행하니, 나보다 아이들이 더 좋아하고 열정적이라 기분이 참 좋았다. 가끔은 예리한 질문을 던져 멍청한 나를 들켰지만, 그래도 감사하다고 인사해주고 가는 아이들이 있어 뿌듯했다.
점심시간 도서실엔,
나에게 말을 걸려고 온 아이들
책을 찾아달라고 하는 아이들
알아서 대출 반납 일을 하는 도서부 아이들
서가 재정비로 해야 할 일을 지시해야 하는 도서부 아이들
학급 윤독도서를 반납하고 배부받으러 온 각 반 대표 아이들
현재 진행 중인 독서 행사에 대한 중구난방 한 질문을 하는 아이들
따로 시간 내기가 어려워 점심시간에 간이로 행해지는 독서 프로그램 시상의 시상자 아이들
수업 과제물 늦게 제출해서 꾸중 들으러 온 아이들
그리고 재미있는 책 없나 보러 온 아이들
도서실에서 수다 떨러 온 아이들
수행평가 책 빌리러 온 아이들
그냥 사서쌤 구경하려고 온 아이들
이 있다.
내가 꿈꾸었던 시끌벅적한 도서관이 그대로 담겨 있는 공간
<2학기>
여름방학이 끝나고 아이들에게 나는 동년배 느낌의 선생님이 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개학 첫날부터 약속 지키러 온 아이 한 명과, 보고 싶었다며 수다 떨러 와준 아이들이 있었다.
어떤 날엔 집에 있어도 그냥 출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날 찾아와 준 아이들의 모습에, 그 생각은 어떤 면에서든 틀림이 없다는 게 증명되는 것 같았다.
내가 선택한 이 길은 정말 마음에 꼭 맞게 사랑스러웠다.
사실 도서관은 사람이 차지하는 부분이 많은 공간이라, 내가 선택한 이 길에서 사람을 빼놓고 사서 업무가 좋아서냐 도서관이라는 시설이 좋아서냐 라고 굳이 물으면 별로 할 말이 없다. 나는 그 모든 것이 포함된 공간에 선생으로서, 이용자로서, 학생으로서 내가 있는 도서관이 좋았다. 도서관이라는 공간, 만나는 사람들, 나누는 대화 모든 것. 그래서 사서쌤을 보든 책을 보든 일단 도서관으로 찾아오는 학생들이 사랑스러웠다.
이 공간 자체는, 아이들이 찾아주지 않으면 운영이 되지 않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도서실에 방문한 아이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제 마음에 이끌려 제 발로 걸어서 와준 것이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그런 아이들에게 웃어주지 않거나 인사하지 않는 일은 아주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꼭 나 혼자서 모든 것을 만들어내고 진행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많은 독서 행사를 진행하면서, 도서부 또는 참여하는 아이들이 이럴 땐 어떻게 하는지, 아니면 이렇게 하면 어떠하냐든지, 유의미한 의견을 많이 주었다. 그때마다 바로 반영해서 수정하는 내 모습이 부끄럽고 멍청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서너 번의 행사를 진행하면서 겨우 태어났다.
그 학생으로 인해서 더 행사가 원활하게 진행되는 것에 대한 기쁨을 느끼면 되는 것이었고, 그 학생에게 배워서 고마워하면, 학생은 선생님보다 더 쑥쑥 자랄 수 있는 것이었다.
아이들과 도서관은 함께 성장해나가고 있었고, 교사도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고 있었다.
행사를 많이 진행하다 보니 초콜릿이나 과자들이 많아졌다. 간혹 폐기 업무나 서가 밀치기 같은 힘겨운 일을 도와준 아이들에게 하나씩 건네주곤 한다.
그런데 난데없이 와서 배고프다고 먹을 걸 달라는 아이들도 있다. 책상 위에 보란 듯이 올려놓은 내 탓도 있겠지만. 그럴 때 매정하게 돌려보내지 못하는 것은, 먹어도 먹어도 계속 배고팠던 그 시절을 나는 아직 너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가끔 1학기 때 논리학 수업을 했다는 거드름을 피워보곤 한다. 초콜릿을 달라는 너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제시해봐, 하면 아이들은 나름대로 제 딴에 일리 있는 말들을 열심히 나열한다. 성장기 남자 고등학생에겐 급식이 매우 모자라다, 매점도 문을 닫았는데 학교 밖으로는 못 나가게 한다, 후배들이 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어떻게 밥을 더 달라고 해서 많이 먹을 수 있냐, 등등. 한바탕 같이 웃고 친구랑 나눠먹으라고 주면 홀라당 가버리지만, 가끔 과자가 생기면 도서실에 쿵쾅 거리면서 와서 반쪽이라도 나눠주고 가는 녀석이다.
아이들의 그런 모습이 좋다. 도서관을 제 집처럼 드나들며 친근하게 찾아오는. 이 공간을 딱딱하다거나 숨 막히는 공간으로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적어도 내가 있는 도서관은 아이들이 투정도 부리고, 과자도 거래(?)하러 오고, 수다도 떨러 오는, 그런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점심시간 도서실엔,
구분 띠지에 따라 서가 별로 척척 반납된 도서를 꽂는 도서부 아이들
여러 가지 독서행사에 참여하러 온 아이들
옆 체육관에 계신 체육선생님도 같이 참여하자고 끌고 온 아이들
만화책을 보러 온 아이들
장기 연체 도서 반납하면서 자수하는 아이들
내가 보고 싶어서 왔다는 아이들
자기가 직접 구운 쿠키를 주러 온 아이
아까 내 인사를 못 본 게 미안했는지 4교시 내내 졸아서 그랬다고 말하러 온 아이
자기가 추천한 책 읽었냐고 확인하러 온 아이
재수할 생각을 나에게 이야기하다가 1시간을 같이 대화하고 가는 아이
얘가 놀린다면서 친구 멱살 잡고 오는 아이
어제 동생이랑 싸운 이야기하는 아이
그냥 놀러 왔다며 대출대에 앉아서 시시콜콜 이야기하는 아이
상품으로 받은 책갈피 도서관 오는 애들마다 나눠주는 아이
친구 따라왔다가 도서관 무료 봉사해주고 가는 아이
난데없이 쌤 파이팅! 해주고 가는 아이
가 있다.
1학기와 비슷하게 시끌벅적하지만, 업무보다는 학생들 한 명 한 명과 소통한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정신이 쏙 빠지기보단, 어울리고 부대껴 살아가는 느낌에 활력이 되려 돌기도 한다
대학교 때 내가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던 교수님이 있다.
정말 자주, 도서관의 개념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하셨다.
교수님의 핵심은, 사서는 도서관 안에서 도서관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걸어 다니는 도서관이라는 것. 사서 그 자체로 도서관이라는 것.
아직 내가 걸어 다니는 도서관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꿈꾸는, 제 집처럼 드나들며, 친근하고, 편안한 도서관의 모습과
나의 모습이 왠지 닮은 것 같아 행복하다.
내가 꿈꾸던 선생님의 모습이 곧 내가 꿈꾸던 도서관의 모습이었고, 그것을 닮아가는 과정은
아이들로 바글바글한 도떼기시장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