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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볕 Mar 05. 2020

꾹꾹 눌러 담은 마음에 대하여_下

- 전편에서 계속 -


전화를 끊자마자 슬리퍼 바람으로 뛰어나갔다. 저 멀리 아파트 단지 너머로 느린 걸음의 그녀가 보인다. 양손 가득 바리바리 싸 들고 오는 모습이다. 반가운 마음에 막 달려갔는데, 할머니의 실루엣이 또렷해질수록 점점 화가 났다. '아니 날씨가 이렇게 쌀쌀한데 저걸 들고 여기까지. 잘못하다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렇게 무리하다 병이라도 나면.' 당신 몸은 하나도 생각지 않는 할머니가 미웠다. 짐을 받아 들면서도 속상한 맘에 진심과 다른 짜증이 먼저 튀어나왔다. “할머니, 거기서 여기까지 못 해도 한 시간인데, 이걸 왜 들고 와요. 이렇게 무거운 거 들고 다니다 뼈라도 부러지면!” “야, 하나도 안 무겁다. 옛날엔 더한 것도 들고 다녔는데?” “그때랑 지금이랑 같아요? 할머니 이러다 다치면 그게 날 더 힘들게 하는 거야!”


할머니가 코를 찡긋하며 특유의 귀여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할머니 때문에 토라질 때면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보이는 할머니의 특기다. 평소 같으면 바로 풀어졌겠지만, 소용없었다. 이 추운 날 지하철을 타고 양손에 짐을 든 채 한 걸음 한 걸음 힘주며 걸었을 걸 생각하니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내가 뭐라고. 진작 눈치채지 못한 스스로가 한심했다.    


집으로 가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도 풀이 죽어 보였다. 손을 덥석 잡고 싶었지만, 여기서 내가 좋아하면 어김없이 다음에 또 이러실 거란 생각에 마음을 굳게 먹었다. 집안에 들어서자 할머니가 조용히 짐을 끄르셨다. 과일부터 밑반찬, 간식이 무더기로 나왔다. “할머니, 집에도 다 있어요. 못 먹기라도 할까 봐? 그리고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내가 사 먹으면 되지.” “내가 주는 거랑 같냐?” 뾰로통해진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통 하나를 꺼냈다. 열어보니 내가 좋아하는 밤탕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는 간식으로 고구마 맛탕이나 밤탕을 자주 해주셨는데, 여기서 밤탕은 깐 밤을 튀기지 않고 꿀에 은근히 조린 걸 말한다. 계속 저어줘야 해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 실제 이런 음식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우리 집에선 옛날부터 그냥 '밤탕'이라고 불렀다. 할머니 표 밤탕은 쫄깃쫄깃한 게 특징이다.


원래 나는 밤만 들어가는 걸 좋아하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웬일인지 대추 반 밤 반이다. 할머니가 눈길로 내 손을 좇으며 말했다. “대추가 겨울에 먹으면 몸에 좋아. 그리고 스트레스받을 때 먹으면 좋다고 티브이에 나오더라. 그래서 넣었으니까 빼지 말고 같이 먹어.” 할머니는 이 한 알 한 알을 조리려 얼마나 부엌을 서성거렸을까. 빈틈없이 차곡히 담긴 밤과 대추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울컥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얼른 밤에 대추를 얹어 하나 집어먹었다. 미처 맛있다고 할 새도 없이 할머니가 말했다. “너는 꾸덕꾸덕하고 쫄깃한 거 좋아하잖냐. 근데 오늘은 내가 급하게 하느라 그 맛이 날지 모르겠다.” “왜 급하게 했는데요?” “너 나가서 공부할까 봐 집에 있을 때 오려고. 이거 빨리해서 뜨끈할 때 먹여야 맛있지.”


자꾸만 눈물이 질질 새어 나왔다. 대체 내가 뭐라고. 평소보다 단단한 밤을 우물우물 먹으며 할머니를 꽉 안았다. “할머니, 너무 맛있어. 안 그래도 먹고 싶었는데. 나 이거 먹고 공부 잘할 수 있을 거 같아.” 할머니는 싫지 않은지 눈은 흘깃하면서도 입은 웃고 있다. “에계? 아까는 그냥 투덜투덜 승질내더니.” “할머니 걱정돼서 그랬지! 할머니 다치면 밤탕은 누가 해줄 거야!” 할머니가 슬며시 웃으며 당신 허리춤에 있는 내 손을 더 깊이 끌어당긴다. 나는 할머니의 까슬까슬한 스웨터에 얼굴을 파묻고 눈물을 쓱 닦아낸다. 포근한 할머니 냄새가 코끝에 맴돌며 나의 불안을 어루만진다. 구구절절 말하지 않았어도 할머니는 그간 마음 졸였던 나의 나날들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에필로그

그렇게 할머니의 정성이 듬뿍 담긴 밤탕을 먹고, 면접에 붙어 최종 합격으로까지 쭉 이어졌다면 이 이야긴 완벽했을 거다. 하지만 인생이란 호락호락하지 않은 법. 아쉽게도 해당 면접에선 떨어졌다. 많이 긴장하기도 했고, 첫 면접인 탓에 미숙하고 부족했다. 면접장을 나와 지하철역을 향해 걷는데,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거기선 그렇게 말할걸. 아, 이걸 빼먹고 말 안 했네.' 노련한 다른 지원자들과 비교되기도 했다. 내 자신이 왜 이리 작아 보이던지. 곱씹을수록 한숨만 나왔다. 울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우는 대신 이 값진 경험을 거름 삼아 다음을 더 잘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짧아진 해에 저녁은 한밤중처럼 어두컴컴했고, 마음마저 후벼 파는 듯한 칼바람이 매섭게 불었더랬다. 그래도 움츠러들진 않았다. 할머니가 해준 밤탕을 먹었으니까, 라고 생각하며 몸을 더 꼿꼿이 세웠다. 사실 내가 먹은 건 밤과 대추가 아니라 꾹꾹 눌러 담은 할머니의 마음이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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