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이야기
+Colombia, Medeline
하.. 아침 8시가 조금 안 되는 시간에 메데진에 떨어진 나는... 내가 너무 안일했음을 버스에서 떨어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숙소며 이동수단이며 하나도 예약하지 않고 온 나는.. 너무나도 열악한 인터넷 환경의 메데진에 이미 진이 빠져있었다. (심지어 카페도 무료 인터넷이 없엇.....십자가) 잠시 넋을 놓고 의자에 앉아있었는데 멋진 도베르만과 핏볼을 끌고 지나가는 아저씨가 뭐라뭐라 말을 걸어 주시는데 난 알아들을 길이 없었다. 한참을 멍하니 아저씨를 바라보고 있다가 나는 천천히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Sorry, ME NO SPANISH."
아저씨는 "oh..Si..." 하시더니 "I can speak English but just little bit"이라고 하셨다. 가까스로 대화를 이어나간 후 아저씨는 나에게 묵을 곳은 있는지, 메데진에서는 얼마나 지낼 것인지, 여기서의 계획 등등 기본적인 취조(?)에 들어가셨고, 곧 내가 이곳에 얼마나 계획없이 도착하게 되었는지 알게 되셨다. 아저씨는 자신의 집이 이 근처이고 자신은 어 머니와 쌍둥이 형과 자신의 아들, 이렇게 넷이 살고 있으며 이제 곧 아침을 먹을 거라며 나에게 통보(?)하셨고 같이 아침식사를 하자고 제안하셨다.
가끔, 인생에서 상식보다는 느낌에 따라 움직이는 순간들이 분명 있다. 나에겐 지금이, 아니 메데진에서의 그날 아침이 그러했다.
아침식사를 제안하는 아저씨를 나는 따라 나섰다. 선해 보이는 아저씨의 인상과 어눌한 말투의 아저씨가 나는 그냥 믿음이 갔다. 아저씨의 집은 정말 우리가 만난 곳에서 채 3분이 되지 않는 아파트에 자리잡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탄 그 순간, 엘리베이터의 "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남미는 위험하다는 여행지 중의 한곳인데 그것도 위험하다는 콜롬비아에서 내가 지금 낯선 이를 겁도 없이 벌컥 따라 나섰다는 것인가.. 여긴 어디지, 혹시 이 아저씨가 선한 인상을 한 사실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라면,.." 생각은, 망상은 꼬리의 꼬리를 물었고 나는 어서 들오라는 아저씨의 손짓에 정말 한 10초 정도는 멍하니 엘리베이터 안에서 쭈뼛쭈볏 망설이며 서 있었다.
그 순간, "Hola, Comoesta" 라며 인상 좋은 할머니 한 분이 집안에서 나왔고 나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조용히 내 쉬었다.
아저씨의 이름은 Jose, 할머님의 이름은 Maria.
인자한 인상과 따스한 웃음을 가진 할머니는 처음 보는 동양여자애가 그것도 자기 몸의 반이나 되는 큰 짐을 이고 혼자 여행을 다니고 있다는 말에 본인 자신이 더 놀라워하셨으며 안쓰러워하시고 또 대단하다며 나를 치켜세워 주셨다.
한두시간동안 맛있는 아침을 대접해 주시고 이제 숙소 헌팅을 찾아 떠나려는 나에게 Jose아저씨와 Maria 할머니는 조심스레 자신들의 집에서 지내는 게 어떠냐고 제안을 했다.
아저씨와 할머니께 민폐만 끼친다는 생각에 나는 손사래를 치며 마음은 고맙지만 괜찮다고 거절을 했지만 Jose아저씨와 마리아 할머니의 간절한 부탁에 나는 결국 "YES"를 하고 말았다.
한숨을 푹 자고 점심이 훌쩍 넘은 시간에 여전히 부스스한 머리며, 반쯤 감긴 눈을 힘겹게 뜨며 거실로 나갔는데 환한 웃음의 마리아 할머니와 호세 아저씨가 나를 반겨주었다. 영어를 전혀 할 줄 모르셨던 마리아 할머니였지만 난 할머니를 통해 마음과 마음이 통하면 결국 언어도 소통의 한 수단일 뿐이라는 말을 다시 한 번 실감 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연심 내 손을 끌어당기며 나를 식탁으로 앉히셨고 내가 잠든 사이 준비하셨을 점심을 차려 주셨다.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아주 푸근한 점심이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나는 대충 인터넷을 뒤져 "메데진 볼거리"를 검색하고 이 근처 어딘가에 시장이 있다는 블로그를 대충 스크린샷으로 저장한 뒤 호세 아저씨 집을 나섰다.
연심 밤에는 조심, 또 조심 "Be Careful"이라 말하는 호세 아저씨에게 나는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오겠다고 당부를 하고는 조심스레 아저씨네 집을 나섰다. 메데진에 도착한지 8시간만에 처음으로 발걸음을 옮겨본 것이다.
스크린샷으로 저장해 둔 곳은 다름 아닌 야시장.
여행을 가면 내가 늘 하는 나만의 "To do list" 중에는 그 지역에 시장을 방문하는 것인데, 이 곳 메데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야시장은 나의 걱정과는 다르게 많은 사람들로 북적 였다. 남미는 워낙 치안이 안좋고 또 소매치기가 많다는 말을 익히 들은 터라 나는 정말 눈에 띄고 싶어 안달 난 여인네처럼 가방을 아기 마냥 꼭 안고 다녔다. 소위 우리 엄마 아빠가 말했던 "타게뜨(Target)"가 되기 딱 좋은 모양새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 많은 사람들 속에 동양인 그것도 여자아이는 나 혼자였다.
두려움도 잠시, 역시 콜롬비아 사람들은 그들 특유의 투박한 미소와 따뜻함으로 나의 경계를 여차없이 풀게 만들었다.
일단 내가 야시장을 온 가장 큰 목적은 바로 블로그를 뒤져 찾아 낸 특급 정보! 바로 이 야시장에 한국의 곱창과 아주 맛이 흡사한 곱창 구이를 판다는 글을 읽어본 적이 있기 때문! 곱창 킬러 였던 내가 그런 특급 정보를 입수한 이상, 이 야시장을 지나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야시장을 샅샅이 뒤진 후, 나는 드.디.어! 그 곱창 구이를 맛볼 수 있었다. 비쥬얼이며, 맛 또한 우리나라의 곱창과 아주 비슷했는데, 이곳에서는 곱창을 구울 때 라임을 첨가한다는 것 말고는 꽤나 익숙한 맛이었다. 가격도 무려 1200원 정도! 정말 거짓말 안 하고 세 접시를 비우는 순간, 아 여기서 더하면 난 진짜... 배탈이 날 것 같아... 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 먹기로 했다.
이렇게 성공적인 나홀로 야시장 투어를 마치니 벌써 시간이 8시를 조금 넘어 가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호세 아저씨네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9시가 조금 넘는 시간 집에 도착하고 보니 호세 아저씨와 마리아 할머니는 이미 잠에 드신 것 같았는데 식탁 위에 "Windy"란 쪽지와 함께 나를 위해 만들어 놓은 저녁이 놓여있었다. 한동안 멍하니.. 식탁을 쳐다보고 있었다.
전생에 내가 무슨 덕을 얼마나 쌓았길래 남미에서 이리 좋은 사람들만 만날 수 있는 걸까.. 감사함과 내 약속에도 불구하고 너무 늦게 집에 돌아 온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꾹꾹 눌러 담고 마리아 할머니께서 만들어 주신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저녁 메뉴는 아주 맛있는 호박 죽 같은 것과 치즈를 넣은 차이 티. 저녁을 싹싹 비우고 할머니와 호세 아저씨가 깨지 않게 조용히 설거지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왔다.
내일 모레면.. 메데진도 떠나는 구나.. 메데진은 정말 경유 목적으로만 생각하고 온 거라서 길게 있을 생각이 아니었는데 마음씨 좋은 호세 아저씨와 마리아 할머니 덕분에 4일을 묶게 되었다. 뒤척거리며 잠을 청하는데 윌리엄에게 메시지가 왔다.
"잘 지내..? 보고싶다"
몇 번 메시지를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이내, 핸드폰을 끄고 잠을 청했다.. 나는 굉장히 현실적인 사람이라, 또.. 나는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기에 더는 문제를 크게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던 터였다. 더 이상 연락을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 애써 이게 맞는 행동이라며 나는 잠을 자려 노력했고, 한 두시간을 뒤척거리다가 겨우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오늘 아침에는 모든 가족들이 아침 식사 자리에 함께했다. 마리아 할머니, 호세 아저씨. 호세 아저씨의 쌍둥이 형인 Walt아저씨, 그리고 Walt아저씨의 아들 Santiago까지.
"오늘의 계획은 뭐니?" 아저씨의 질문에 모두의 시선은 나로 향했다.
"아.. 저.. 오늘은 엘페뇰에 가려구요."
"아 거기 엄청 아름다운 곳인데! 사진 많이 찍어 오렴, 물도 꼭 챙겨가고! 알았지?"
콜롬비아는 참 신기한 나라였다. 보고타에서는 윌리엄이, 메데진에서는 호세아저씨의 식구들이 그러했다. 나는 이들로 인해 한 번도 이방인이라 느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늘 살뜰히 챙겨주시는 호세 아저씨와 말은 통하지 않지만 늘 따스하게 바라봐 주시고 걱정해 주시는 마리아 할머니, 그리고 호세 아저씨의 쌍둥이인 월트 아저씨와 그의 아들 산티아고가 그러했다. 나는 마치 내가 그들의 가족 구성원이라도 된 듯한 착각에도 빠진 것 같았다.
엘페뇰로 가기 위해서 버스를 타러 가야했는데 호세 아저씨는 한사코 말리는 나를 들은 체도 안하시고 나를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도베르만과 핏불을 앞세우고 나를 버스 정류장까지 바라다 주셨다.
버스 안에 탄 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호세아저씨는 나를 향해 그 환한 웃음과 함께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셨다.
보고타에서 받은 과분한 사랑에 취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는데, 하느님이 나를 분명 과하게 사랑한 게 틀림없다. 이렇게 메데진에서 조차 나를 보호해 줄 천사를 보내주셨으니.
비록 도베르만과 핏볼을 사랑하는 조금은 투박한 천사였지만.
몇 시간 정도를 달렸을까. 기사 아저씨는 나에게 다음 정거장이 엘페뇰이라는 사실을 온갖 바디랭귀지를 총 동원하여 알려 주셨다. 나는 아저씨의 정성에 보답이라듯 하듯 평소보다 한 2옥타브 더 올라간 목소리로 "그라시아스!!!!"를 외쳐드리고는 환한 웃음을 덤으로 얹어 드렸다.
한 10분정도를 걸어 올라가니 눈앞에 우뚝 솟은 큰 바위같은 형상을 한 엘페뇰이 보였다. 지그재그로 얽힌 듯한 모습을 한 계단도 눈에 띄었다. 입장료를 구입하고 바로 입구로 들어갔는데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입구에서부터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내 차례를 기다리며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노래를 즐기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것이 여행이라서 좋았다. 무엇 하나 재촉하거나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눈에 담고, 내 차례를 기다리고..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어서 감사했다. 계단을 오르는 일은 생각보다 힘이 들지 않았다. 힘이 들면 옆으로 조금 비켜서서 조금 쉬었다.
이어폰에서 흐르고 있는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 또한 페이스를 맞춰주는 좋은 친구 역할을 해줬다.
드디어 650계단을 다 오르고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높은 엘페뇰에서 바라본 메데진은 정말 아름다웠다. 파란 색도 아닌, 그렇다고 녹색도 아닌 신비로운 색의 강도, 말도 안 되게 푸르렀던 하늘도, 아침에 비가 언제 왔었냐는 듯한 정말이지 시침도 이런 시침이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한참을 멍하니, 그리고 길게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사실 남미에 오기 전에 개인 적으로 일이 많았었다. 떠나오는 날, 백혈병으로 투병생활을 하던 친척 동생의 부고를 들어야만 했고, 오래 만나오던 남자 친구와의 관계도 나를 참 힘들게 또 아프게 했었다. 남미를 온전히 다 마음에 담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도 이런 불안정하고 힘든 나의 마음이 이런 아름다움을 온전히 다 담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나의 우려와 걱정 때문이었다.
인생은 늘 선택의 연속이자, 그 선택들이 모여 나의 순간을, 또 인생을 만들어 가는 거라고 했다. 가끔 나는 내 인생이 제대로 된 길로는 가고 있는지, 내가 어느 속도로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다른 누군가에게 나는 어쩌면 늘 자신감 넘치는 여자로, 또는 내 인생을 멋지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으로 비춰질 수도 있었을 테지만, 현실의, 아니 적어도 내가 아는 솔직한 나는.. 늘 보여 지는 모습에 연연했고, 나약 했으며, 자격지심 또한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늘 솔직하지 못한 내 자신에 실망했고 무너졌었다. 하지만 남미를 여행하면서 나는 나 그 자체였다. 늘 같은 운동화에 같은 잠바, 무거운 짐을 메고 여행을 하는 배낭여행자.
최소한의 물건들만 챙겨 떠나온 여행이었기에, 부족하면 부족한 그대로, 넘치면 풍족함 에 감사했다. 참으로 일차원적인 여행이 아닐 수 없었다.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해보지 않은 적이 언제였지 싶었고, 풀메이크업을 하지 않았던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던 한국과 호주에서의 나의 삶. 그냥 아름다운 풍경을 보니 괜스레 감사하면서도 벅찼다. 여러 감정들이 얽힌 실타래처럼 줄줄줄 끝도 없이 흘러나왔다.
천천히 엘페뇰을 눈에, 마음에, 그리고 내 카메라에 담은 뒤 나는 올라왔던 그 길을 다시 내려왔다. 엘페뇰 근처의 아주 어여쁜 도시가 있다는 걸 어느 블로그에서 본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툭툭을 단돈 5천원에 흥정을 하고서는 10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 과타페마을에 도착했다.
알록달록 예쁜 색으로 칠해져 있는 마을은 정말이지 동화 속에서 나온 것같이 아기자기했고 예뻤으며, 완벽한 "취향 저격"에 성공했다.
집들 사이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고 몇몇 집 앞으로는 3D 입체 벽화도 그려져 있었다. 문득 이런 동네에서 살면 화낼 일도 없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한편으로는, 아니다.. 내가 여기 살아도 난 분명 화를 내겠지.. 라는 실없는 생각으로 실실 쪼개기도 했다. 마을은 생각보다 아담하고 작았기에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오늘 저녁은 호세 아저씨, 마리아 할머니와 같이 먹을 생각으로 나는 여행은 이쯤에서 끝내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6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에 돌아온 나를 보고 호세 아저씨와 마리아 할머니는 특유의 인자하고 반가운 웃음으로 날 맞아주셨다. 오늘은 무엇을 했는지, 어디를 갔다 왔는지, 가족들에게서 묻는 시시콜콜한 것들을 나에게 물어보셨다. 신이 난 나는 오늘 하루 다녀온 엘페뇰, 그리고 동화같이 예뻤던 과타페 마을에 대해 주절주절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저녁을 준비하러 일어나시는 마리아 할머니를 따라 나도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호세 아저씨 네 에서 묵는 내내 아저씨와 할머니는 내게 어떠한 집안일도 거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텔레비전을 틀어주시거나, 가끔은 유행이 한참 지난 한국 가요를 찾아 틀어주시기도 하셨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꼭 집안일을 거들기로 작정한 터라 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내게 틈을 조금 내어주신 마리아 할머니께서는 가장 쉬운 일을 나에게 선사하셨다. 그것은 바로 식기들을 식탁에 놓는 것!
호텔 근무만 8년을 넘게 해왔던 나이기에 식기들을 정말 레스토랑 셋팅 못지않게 해 놓은 내 모습을 보시더니 호세 아저씨는 조금 놀란 눈치셨다. 맛있는 저녁을 끝내고, 나는 또 한번 아저씨와 할머니에게 오늘만큼은 내가 설거지를 하겠노라 으름장을 놓았다.
한사코 안 된다고 말리시던 호세 아저씨도 유난히 단호한 나의 눈빛을 읽으셨는지 이내 마리아 할머니에게 무어라 말씀하셨다. 잠시 후 마리아 할머니도 오늘만큼은 내가졌다는 눈빛으로, 하지만 이내 연신 고맙다고 하셨다.
뽀득뽀득 소리가 날 만큼 깨끗하게 설거지를 마치고 샤워를 하기 위해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나를 위해 예쁘게 접은 수건과 새 비누를 선반에 올려주신 정성을 보고 나는 또 한 번 울컥했다. 포근해진 마음이, 그 여운이 오래도록 남을 것만 같은 밤이었다.
알람을 맞추고 잠이 들었는데 다행히도 알람 소리에 잠이 깼다. 오늘은 부지런히 일어나서 마리아 할머니가 아침을 준비하는 걸 도와드리고 싶었다. 사실 나는 내일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어제 저녁부터 무언가 도움이 되어드리고 싶었다.
대충 머리를 만지고 눈꼽만 대충 제거(?)를 한 뒤 거실에 나가보니 역시나.. 호세아저씨는 쇼파에 앉아 신문을 읽고 계셨고, 마리아 할머니는 벌써 아침을 준비하고 계셨다.
"Good Morning!"
아저씨에게 인사를 한 뒤 나는 부엌으로 향했다.
어제 저녁과 마찬가지로 나는 식기들을 식탁에 두었고, 할머니가 늘 정성스레 준비하던 차를 오늘 아침에는 내가 준비를 했다.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듬뿍 넣어서.
"저.. 내일 떠날 것 같아요.. 원래는 2틀정도만 있을 생각이었는데 너무 잘해주셔서 생각보다 더 오래 있게 되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떠난다는 나의 말에 모두가 서운해 해주셨고, 그리면 오늘 저녁은 다 같이 와서 먹자는 호세 아저씨의 제안에 나도 패러글라이딩 투어를 마치는 데로 바로 집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메데진이 패러글라이딩으로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블로그를 통해 어렴풋이 본 기억이 난 나는, 서둘러 근처 투어 회사로 향했다. 운이 좋게도 당일 출발하는 패러글라이딩 투어가 있다고 했다. 가격은 195,000페소 정도, 한화로 7만원이 조금 넘는 저렴한 가격이었다. 패러글라이딩을 할 수 있는 투어 장소에 도착했는데.. 아뿔사.. 비가 올 것만 같은 날씨가 아닌가.. 조금 더 날씨를 지켜보자는 투어 가이드의 말에 혼자 내심 망연자실하고 있었는데, 메데진은 나의 행운의 도시가 아니었던가! 이내 조금씩 해가 나기 시작하더니, 페어글라이딩을 다시 할 수 있는 쨍쨍한 날씨가 되었다.
두근두근, 설레임을 뒤로하고 패러글라이딩을 등에 메고 내 목숨을(?) 오로지 함께 뛰는 투어 가이드에게 맡겼다.
"혹...혹시 페러글라이딩을 하다가 죽...죽은 사람은 없어..? 라는 나의 질문에 가이드는
"최근엔 없어" 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시크 하게 던졌다. 그리고는 "이제 간다. 최대한 발을 계속 달리고 있어야 돼 알았지?" 라며 주의 사항을 몇 번 더 강조를 하더니 "Lets go!"를 낮게 내뱉었다. 그 말과 동시에 우리는 있는 힘껏 발을 굴렸다. 발길이 빨라 질수록 나는 더 질끈 두 눈을 꼭 감았다. 미친 듯이 달리고 보니 어느새 내 몸이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이 들어 실 눈을 뜬 나는.. 날고 있었다. 생애 첫, 패러글라이딩을 성공 한 순간이었다.
나는 여행을 다닐 때 꼭 한 가지 나한테 약속 하는 것이 있다. 여행을 하는 순간에는 해야만 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자고.
우리는 늘 우리 자신들의 선택의 희생자들이 아니던가? 그래서 가끔은 그 선택을 후회 할 때도, 또 그 선택들로 인해 아파할 때 도 많았으니 여행을 하는 동안이라도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에는 하고 싶은 것들 선택하자고 다짐 또 다짐을 했었다. 이번 패러글라이딩이 그랬고, 보고타에서 떠나 올 때의 내 마음이 그랬다.
하늘을 날고 있으니실로 모든 것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아니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하늘을 날고 있고, 그것만으로도 이미 많은 걸 해낸 것 마냥 우쭐해져 있었다.
패러글라이딩을 마치고 나니 시간은 어느 덧 오후 3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오늘은 호세 아저씨들 가족 모두와 저녁을 함께하기로 했음으로 나는 다른 계획은 잡지 않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유심히 봐둔 빵집에 들려서 미리 봐 둔 맛있어 보이는 초콜릿 케이크를 구매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초콜릿 케이크를 다들 좋아하셔야 할 텐데.. 라는 걱정도 들었지만, 유난히도 달콤한 것을 좋아하는 콜롬비아인들이기에 나는 그나마 가장 안전한 선택을 한 것이라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집에 도착하니 6시가 조금 안 되는 시간이었다. 초인종을 누르니 호세 아저씨가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아주셨다. 옷을 갈아입고 케이크를 냉장고에 넣고 거실로 나오는데 호세아저씨께서 조금은 상기된 목소리로 나를 부르셨다.
"윈디!! 윈디! 이리로 와봐. 보여줄 게 있어!"
호세 아저씨는.. 새빨간 장미꽃 한 다발을 내게 안겨 주셨다. 마지막 날이라서 가장 예쁜 것을 선물해 주고 싶으셨다고.
나는 내가 이렇게나 눈물이 많은 사람인 줄 몰랐다. 남미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매 순간이 감사한 순간이었고, 너무 나도 넘치고 넘치는 사랑을, 이름 모를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들로부터 받았다는 이 사실이 너무 감사하고, 과연 내가 이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나 되는 사람인가.. 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게 했다.
"아저씨.. 꽃이 너무 예뻐요.. 저는.. 이런 걸 받을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인 걸요.."
"윈디는 신이 우리 에게 보내주신 선물 같은 사람이야. 윈디가 있는 4일동안 어머니는 더 많이 웃으셨고, 즐거워 보이셨 어. 나 또한 마찬가지야 혹시라도 다시 콜롬비아에, 메데진에 오게 된다면 꼭 다시 만났으면 좋겠어,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소중한 인연은 가족과 같은 거야."
나는 아저씨가 왜 새빨간 예쁜 장미꽃을 사 왔는지 안다. 아저씨네 집에서 머물게 된 첫날, 보고타의 첫인상에 관해 이야기를 하다가 나오게 된 말이었다.
보고타는 진짜 큰 도시였고 너무 많은 사람들과 바쁘게 움직이는 차들 때문에 별로였지만, 딱 한가지- 꽃을 파는 곳이 많아 그 차디찬 보고타를 조금은 더 아름답고 따뜻하게 했던 것 같다고. 나는 꽃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콜롬비아의 꽃은 참 아름답다고 이야기 했었는데.
그 말을 기억하시고 메데진에서는 꽃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 라는 나의 귀여운 푸념을 아저씨는 기억하셨던 거다.
그 날 저녁을 먹으며 아저씨는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으셨던,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아저씨와 아저씨의 전 부인은 3년 전 헤어지셨는데 그 이유는 아저씨께서 교통사고가 난 이후 장애 판정을 받아서였다고 하셨다. 내가 아저씨를 처음 만났을 때 아저씨의 어눌한 말투와 조금은 불편해 보이는 걸음걸이가 늘 궁금했었는데, 그 이후가 사고 때문이라는 걸 안 순간 나는 왠지 모를 숙연함에 고개가 숙여졌다.
아저씨는 그 사고 이 후, 남겨진 아들과 어머니에게 늘 죄송한 마음뿐이셨다고.
그 때 아저씨는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지었다고, 그리고 철저히 혼자라고, 이 세상 누구도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셨다고 했다. 그렇게 2년을 지독한 우울증과 알콜중독증으로 우울하고 힘든 나날을 보내셨다고 했다. 알콜 병동에서 퇴원을 하고 나오는 그날, 아저씨는 지금 키우시는 도베르만과 핏볼을 입양 했다. 두 마리 개들 모두 2번의 파양을 경험한 적이 있는 아이들이었는데 남들에게 거절당한 그 모습이 꼬옥 자신과 닮아 보이셨다고 하셨다.
그렇게 늘 습관처럼 아침, 저녁으로 개들을 데리고 산책하는 게 아저씨의 유일한 낙이셨는데 그때 벤치에서 넋 놓고 있는 나를 보셨다고 했다. 본인의 체구만큼이나 커다란 가방을 메고,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동양인 여자 아이가 안쓰러운 마음보다는 대단해 보인다고 하셨다. 그래서 뭔가 도움 될 일이 없을까 하고 나에게 다가오신 거라고 하셨다.
나는 처음에 아저씨를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했던 내 자신에게 조금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서는 겉모습으로만 아저씨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판단했었던 내 아둔한 모습도 반성을 했다. 아저씨는 정말 하느님이 내게 보내준 천사가 분명했다.
따스했던, 그리고 묵직했던 저녁식사 후 정리를 돕는 나에게 마리아 할머니께서는 잠깐 자리에 앉아 보시라고 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셨는데 그것은 아주 어여쁜 팔찌였다. 영어를 전혀 하실 줄 몰랐던 마리아 할머니께서는 팔찌를 내 손에 쥐여 주신 뒤에 나를 꼭 안아주셨다.
아마도.. 할머니만의 고맙다는 마음의 표현인 것 같았다. 나는 이번엔 애써 거절하지 않았고, 나 또한 한국에서 들고 온 작은 선물을, 내 부족한 마음을 꼭 담아 드렸다. 할머니께서는 그 특유의 인자한, 그리고 포근한 미소를 내게 답례로 보여주셨다.
저녁을 다 마치고 마무리까지 다 끝낸 나는 마지막으로 호세 아저씨와 아저씨의 쌍둥이 형, 아저씨의 아들 미구엘과 마리아 할머니까지. 온 가족들과 함께 둘러 앉아 오래된 엘피판을 꺼내 콜롬비아의 노래도 들려주시고, 호세 아저씨 가족의 앨범까지 구경을 끝내고 나서야 내 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 나는 내가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근사한 사람인지 잊고 있었다. 늘 부족해 보이는 내 모습이, 그리고 초라해 보이는 내 모습이 싫어 그 모습을 감추기 위해 꼼꼼히 또 열심히 화장을 했고, 단 한 번도 화장을 하지 않고는 밖을 나가지도 않았었다. 늘 나보다 나를 더 크게 보여 줄 수 있는 높은 구두를 신고 다녔고,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언제나 가장 예쁘고 행복해 보이는 모습만을 보여주려고 했었다.
늘 나를 다른 누군가와 비교했고, 부족해 보이는 내 모습이 너무나도 싫어 끊임없이 나를 질책하고 부정했었다. 하지만 오늘밤.. 나는 내가 있음에, 그 이유만으로도 하늘에 있는 그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감사하다 말했다. 이런 나도.. 누군가에게는 존재만으로도 감사한 사람이 될 수 있구나,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오히려 나는 호세아저씨와 마리아 할머니의 그 마음 씀씀이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사람은 누구나가 다, 적어도 어느 누구에게는 특별한 존재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대단한 일을 하지 않아도 마음을 나눌 수만 있다면, 그 이유만으로도 사람은 위대할 수 있다는 것.
나는 또 하나, 별 거 아닌 일상에서 큰 무언가를 배워간다.
나는, 소중하고 소중한 사람이었다.
헤어짐이 쉽지 않은 또 다른 밤이 소리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