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휴양지에 도착했습니다.
가볍게 해외로 떠나는 여행이 참 오랜만이다. 한창 자주 여행을 다녔을 때는 '이동이 뭐 별건가.'싶어, 짐도 아침에 일어나서, 비행기도 탑승시각에 딱 맞추어 도착하곤 했는데, 이제 여행이 '별거'가 되었다. 인천 공항을 가는 것도 크게 설레지 않은지 오래, 탑승동을 걷는 것도 목적지까지 가기 위한 지난한 과정으로만 여겼던 시간들이 무색하게 설레는 마음이 솟는다. 지난 3년간, 당연할 줄 알았던 일상이 무너진다는 게 무엇인지 실감했다. 다시 올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처음 간 여행지에서 많은 탐험을 하지 않았던 것들이 후회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냥 흐르듯 떠났던 이전과 다르게 이번 여행은 이상한 각오가 섞이고 말았다. 어떤 기회든, 어떤 순간이든,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기나긴 전염병 시대에 얻은 교훈이다.
여행의 시작엔 무뎌진 반면, 비행은 여전히 설레는 순간이다. 웅웅 거리는 엔진 소리, 비좁은 좌석, 뒷사람의 코 고는 소리. 많은 불편함 속에서도, 조그만 창문을 통해 어디 위인지 모를 하늘을 보는 것, 복불복처럼 느껴지는 기내식을 선택해서 먹는 것, 그리고 잠들기 위해 먹는 하늘 위 와인 한 잔 때문에 이 모든 것을 낭만으로 느낄 수 있다. 가끔 옆 사람과 말을 트기도 한다. 무슨 목적으로 가는지, 정해 놓은 여행지가 있는지. 한국 땅에서 수직 위로 올라왔을 뿐인데 모든 마음이 풀어지고 만다.
첫 비행은 캐나다로 워킹홀리데이를 갈 때였다. 24살 봄, 생전 해외를 나와보지 않은 애가 겁도 없이 즉흥적으로 그 먼 길을 떠날 결심을 했다. 영어라곤 기본 교육 과정에서 배운 것뿐, 입을 떼어본 적도 없으면서. 인천에서 밴쿠버로 가는 10시간 남짓의 비행시간 동안 창가 좌석에서 화장실조차 가지 않은 채 꼼짝없이 앉아만 있던 기억이다. 옆에는 낯선 서양 남자가 앉아있었는데, 그때는 낭만을 챙길만한 여유조차 없었다. 공항까지 와준 오랜 친구가 써준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훔치고 1년간 떠나 있을 한국에 대한 그리움만 떠올렸다. 새로운 기회, 새로운 설렘보다 두려움이 많은 나이였다.
이제는 와인이 없으면 비행을 못한다며 저가 항공을 탈 때는 꼭 면세점에서 몇 개를 사곤 한다. 능숙하게 영상을 저장한 패드를 꺼내고, 외국인 승무원의 스몰 토크에도 유연하게 응대할 줄 안다. 초조하고 두려움이 많았던 20대의 나에게 웃어주며.
도착한 나트랑은 비가 오고 있었다. 아스팔트를 적시는 축축한 비 냄새가 나트랑의 첫인상이다. 내 이름이 적힌 팻말을 들고 있는 픽업 운전수를 금세 발견했는데, 타지에서 내 이름 석 자가 기다린다는 게 왜인지 반가워지고 만다. 운전수는 마르고 작은 베트남인 남자였다. 태국이나 말레이시아에서 택시를 타면 금박 장식이 된 종교적 상징물이나, 낡은 가족사진이 붙어있곤 했는데, 이번 픽업 차는 시트도 장식도 특이성 없이 정갈했다. 여행 동안 카카오 택시, 배달의 민족만큼 편리하게 콜택시와 음식 배달을 이용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을 쓰기도 했다. 닫혀있던 3년 동안 오히려 세상의 문화는 평균치로 맞춰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밖을 탐험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구석구석 삶은 계속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운전수는 최대한 본인이 없는 듯 고객을 편안하게 이동시키는 게 목표인듯했다. 차 안에는 끽 끽 거리는 와이퍼 소리, 천장을 두들기는 빗방울 소리만 울렸다. 바다가 보인 건 아주 짧은 순간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아!'하고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너무 짧은 순간이었기에, 바다를 본 반가움의 소리인지, 금세 지나가버려 아쉬움의 표현이었는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제야 운전수는 서툰 영어로 '어게인, 어게인'이라고 읊조린다. 나의 작은 소리에 반응을 해준 것에 사려 깊음이 느껴졌다. 이윽고 다시 바다가 보이자 눈에 띄게 천천히 속도를 줄인다. 여행의 인상은 이렇게 사소한 태도들로 구성된다. 이 순박한 친절함에, 나는 앞으로 만날 베트남인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특별할 것 하나 없지만, 그래서 심도 있는 여행을 즐깁니다. 2022. 나트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