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키키 리리 Dec 16. 2023

난 묻어요

생기부 시즌이다. 과목별 세부능력특기사항을 쓰는데 오타를 많이 냈고, 매끄럽지 않게 몇몇 문장을 썼다. 내가 쓴 내용을 점검하던 부장님이 고칠 부분을 알려주셨다. 나는 학교 메신저로 번거롭게 해서 죄송하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빨간 펜으로 고칠 부분을 쉴 새 없이 표시하는 그가 떠올라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잠시 후 부장님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알아서 하세요."


이게 끝이었다.


나는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랐다. 이 짧은 문장 안에 담긴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쉽게 파악할 수 없었다. 기대한 내용은 아니었기에 당황스러웠고, 메시지에서 느껴지는 냉랭한 기운에 의기소침해졌다. 마음은 쉬 진정되지 않았다. 내 사과가 그에게 닿지 못하고 그대로 튕겨 나왔다고 느꼈다. 작은 파장이 소용돌이치면서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의자에 앉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는데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쿵쿵거렸다. 이성이 마비되어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급기야 내 존재 자체가 거부당했다고 믿었다. 정상적인 사고가 이뤄지지 않았다. 


퇴근 시각이 다가올수록 두통이 심해지고 눈알이 빠질 듯 아팠다. 입을 열어 말할 힘도 없었다. 




밤이 되어 겨우 쉴 수 있었다.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우울 속으로 가라앉았다. 부장님이 미웠다. 긁어 부스럼 만든 나도 미웠다. 그냥 고치면 될 것을 굳이 죄송하다고 사과한 내가 속 없어 보였다. 상대방의 한 마디에 무너지는 나 자신도 미웠다. 어쩌면 상대방은 별생각 없이, 내게 상처 주려는 의도 없이 대꾸한 것인지도 모른다. 순간적인 감정에 휩싸여 대답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의도를 알아내려고 애썼고, 문장 너머 숨겨진 감정을 찾아내려 노력했다. 내 노력은 부정적인 감정과 맞닿아 나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내 존재 자체가 거부당했다고 느꼈고 우울 속에 잠긴 채 몇 시간을 보냈다. 


나는 사람들의 비언어적인 동작이나 단순한 말조차 그냥 넘기지 못하고 이면을 해석하려고 노력한다. 사람이 쓸 수 있는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는데 이런 노력에 내 에너지를 다 써버리니 사람들을 만나면 늘 피곤하고 힘들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지도 않고 혼자 지내길 좋아한다. 


알아서 하라는 부장님의 메시지에 그냥 "네."하고 넘어갔으면 이토록 괴롭지 않았을까? 그랬겠지? 갑자기 나 자신이 몹시 미워졌다. 인간관계에서 많은 에너지를 써버리는 내가 나약하게 느껴졌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내가 너무나 측은하고 안타깝고 불쌍했다. 오늘 어떻게든 좋게 해결하려고 사과를 한 내가 안쓰러웠다. 누군가로부터 거부당할까 봐, 거절당할까 봐 전전긍긍했던 지난날의 내가 슬펐다. 이 모든 슬픔을 끌어안은 채 어른이 된 내가 말할 수 없을 만큼 안쓰러웠다.




나는 점심 급식을 먹고 난 뒤면 학교 운동장을 20분가량 걷는다. 햇볕을 쬐며 걸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소화도 잘 된다.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학생들을 구경도 하며 때론 상담이 필요한 학생과 대화를 나누며 같이 걷기도 한다. 


그런데 전체 회의 시간에 관리자가 "밥 먹고 걷는 사람들이 있는데 밖에서 보면 교사가 한가한 줄 알겠어요."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뜨끔했고 그가 말한 의도가 무엇인지 해석하려고 애썼다. 결국, '걷지 말라는 소리인가?'라고 생각했다. 내 판단을 동료와 교환했는데 그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런 모양이네."라고 한 귀로 듣고 흘렸다고 한다.  나는 믿을 수가 없어서 또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나처럼 걷지 말라는 의도로 해석했지만 그가 그런 소리를 하거나 말거나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처럼 예민하고 인간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은 무덤덤한 사람들을 보고 배우는 게 좋다. 그들의 사고방식을 배우고 그들의 행동을 따라 하는 게 큰 도움이 된다. 나는 부장님의 "알아서 하세요."라는 말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할 일을 잘했으면 끝난 일이다. 


상대방이 그러거나 말거나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리기.

묻어야 할 일은 그냥 묻어두기.

잊어야 할 일은 잊어버리기.


나는 또 이렇게 인간관계의 기술을 배운다.




*제목: 허회경 씨의 노래 '난 묻어요.'에서 가져옴

매거진의 이전글 너와 나눈 대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