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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fa Apr 14. 2022

디자인의 리듬

속도와 방향 사이에서 고민하다.


실기 작업의 시간은 천천히 흐르지만 거기서 만족이 생긴다. 반복하는 일이 몸에 익으면서 기능은 내 것이 된다. 이렇게 더디게 굴러가는 작업시간에서 깊이 생각하고 상상하는 게 가능해진다. 얼른 결과를 내려고 밀어붙여서는 생각이고 상상이고 있을 수 없다. 몸에 익고 원숙해지는 상태는 오래 하는 데서 나온다. 그래야 그 기능이 오래도록 자기 것이 된다.

『장인-현대문명이 잃어버린 생각하는 손』 리처드 세넷


K-성질머리의 표본이라 해도 부족할 것 없이 내가 성격이 급한 편이라는 걸 일을 할수록 느꼈다. 그래서 결론을 빨리 내고 일단 할 수 있는 기술의 범위 안에서 결과물을 내는데 시간을 보냈다. 전에 하던 일, 이미 존재하는 것을 따라가는 일이라면 문제가 적었는데 새로운 일이나 전에 없던 것을 만들 때가 막막했다. 그때부터 무조건 빨리 하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걸 체감했다.


그래서 더 이상 뭐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기나긴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확신이 들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고 리서치를 반복해봤다. 예상했겠지만 오래가지 못한 방법이었다. 아이디어를 테스트하거나 추가 조사를 하지 않는데 어떻게 확신을 갖는지 의문이었다. 너무 빨리 나아가려고만 하는 원래 습관도 문제였지만 유레카를 외칠만한 방향을 찾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는 것도 답답했다. 같은 주제나 아이디어라도 구현하는 방향에 따라 결과가 천차만별일 텐데 그게 어떻게 보인다는 걸까.


학기가 시작됐고,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추상적인 발상을 키우는 훈련이 시작됐다. 일주일에 두 번 마주하는 마감 앞에서 뭐라도 그려내야 했고 모호함을 견디며 나아가는 시간 동안 긴장을 많이 했다. 아이디어를 내는 단계라 문제가 될 것도 없는데. 순간의 느낌과 감각을 제한 없이 표현하는 게 어려웠다. 내가 나를 자꾸 검열하게 되고, 리서치 단계 없이 추상적인 형태를 구체적인 공간으로 근거 없이 만들려는 조급함이 자주 들었다. 형태로 만들 수 없는 결과는 미리 차단하는 나를 발견했다.


리서치는 그보다는 쉬웠다. 논문과 차트, 영문 자료에 대한 울렁증을 참아내기만 한다면… 김대수 교수의 『뇌 과학이 인생에 필요한 순간』 에서 창의성을 키우는 방법 중 하나로 모르는 것을 적는 것이 있었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정확하게 적으면 조사의 방향이 나왔다. 날이 좋아지는 시기에 떠다니는 마음을 가다듬고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있으면 됐다. 내게 답이 없다는 마음으로 주제를 탐구하니 새로운 정보를 더 많이 접할 수 있었다.


속도냐 방향이냐   하나를 택할  아니라 모호함 속에서 조금씩 나아가고 끄적이고 피드백받고  다음 정교하게 다듬으면서  나아가는 순환이 나만의 방향대로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느끼는 요즘이다.  호흡은 나에게 맞는 주기로, 리듬감 있게 생각과 작업과 쉼과 멍을 조합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협업을 할 때는 서로의 리듬을 파악하되 중간중간 마감하는 일정은 잘 맞춰야겠다.


오늘은 목요일, 작업의 날이다. 예상치 못하게 아이의 첫 유치를 치과에서 뽑고 가느라 작업 시작이 많이 늦어졌지만 오늘도 리듬감 있게, 즐겁게 작업하는 하루를 만들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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