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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우 Jan 16. 2022

낯선 시골에서 받은 생일상

나의 농활 이야기 ①  - 미역국 한 그릇이 바꾼 내 20대.

낯선 시골에서 받은 생일상 [나의 농활 이야기 ①  - 미역국 한 그릇이 바꾼 내 20대]
농활에는'수입산'이 없었다. [나의 농활 이야기 ② - 커피도 라면도 농활에선 안 된다구요.]


  '농활'이야 워낙에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보통 사람들은 '대학생들이 뭐 시골 내려가서 농사일 도와주고 뭐 그런 거' 정도로 알고들 있다. 그래서 농활이 무슨 줄임말이냐고 물으면 "농촌 활동", "농촌 봉사 활동 "등이 답으로 돌아온다. 실제로 운동권 물 다 빠진 대학가에서는 그런 이름으로 농활을 운영하는 단위도 많다. 사실 농활의 정확한 명칭은 "농민-학생 연대활동"이다. 새내기들이 입학하면 그 이름과 의미를 설명하는 것으로 농활사업 교양을 시작하곤 했다.


  나는 농활과 인연이 깊다. 학생운동을 시작한 데에는 전에 이야기 한 첫 집회 말고도 여러 이유가 있다. 그런데 내가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학생회를 하며, 학생운동을 하게 된 데에는 농활의 몫이 컸던 것 같다. 나는 농활을 사랑했고, 농활 다니던 동네는 내 고향 같은 곳이 되어버렸다. 6년, 횟수로는 적어도 20번 이상 농활을 다녔다. 우리는 보통 매년 봄, 여름, 가을 철마다 한 번씩 농활을 내려갔다. 짧게는 3박 4일, 길게는 7박 8일. 그러고도 겨울에 자체적으로 농활을 조직해 한번 더 내려가기도 했고, 간부들은 회의나 농민회 행사 지원을 위해 별도로 또 내려갔다.




  애당초 운동권 끼가 다분했던 나한테, 누가 봐도 운동권 유산으로 보였던 농활은 꼭 가고 싶은 사업이었다. 새내기 3월, 학과 '농활 설명회'사업을 마치자 뒤풀이는 파전집에서 열렸다. 그 시절 "과행사 뒤풀이는 무조건 소주"라며 맥주를 비롯한 다른 주종은 선택지에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우리들 앞에 막걸리가 놓였다. 가뜩이나 술 잘 못 하던 내게 막걸리는 쥐약이었다. 잘 안 넘어가는 막걸리 잔을 꾸역꾸역 넘기면서도 선배들의 신비롭고도 흥미진진한 농활 후기를 들었다. 학과 연사(학생회 연대사업부장, 농활 사업 주체) 출신 고학번 선배들도 농활 설명회 뒤풀이라고 줄줄이 자리에 들러 건배사를 했다. 그 해 학과 학생회장 누나도 전년도 연사 출신이었다. 선배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머릿속은 온통 농활에 대한 로망과 환상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막상 5월이 되어 내려 간 첫 봄 농활은 로망과는 전혀 달랐다. 첫날 마을회관에 짐을 풀고 평가회의를 했는데, 농활 규율을 정하고 각자 주체를 맡아 책임질 역할을 나눴다. 아침 기상을 담당하면 기상 주체, 신발장 정리는 현관 주체 등등... 심지어 웃음 주체, 사진 주체, 아침마다 뉴스를 브리핑하는 소통 주체 같은 것까지 있었다. 서너 개의 주체를 나누어 맡았다. 평가회의는 도저히 끝나질 않았고, 거기에 농민가를 포함해 몇 곡의 민중가요까지 배우고서야 마칠 수 있었다. 어느덧 시간이 9시를 훌쩍 넘긴 때였다.


  그때 또 술상이 시작되었다. 뒤풀이를 해야 농활이라며 마을 어르신이 사다 주신 막걸리를 꺼내 들고 안주를 내 왔다. 그렇게 숙취도 심한 막걸리를 늦게까지 들이부었다. 어른과의 술자리가 익숙하지 않던 시절, 마을 어르신과 함께 하는 술자리도 어려웠는데, 이튿날 숙취는 사람을 아주 미치게 만들었다. 우리는 논에 들어가 줄줄이 서서 발아시킬 모판을 논에 가지런히 넣었다. 엉덩이까지 빠지는 논 속에서 체력 소진은 상당했고, 허리가 아프고 햇살이 뜨거웠지만 논에 모를 자동으로 밀어 넣는 컨베이어 기계는 쉬지 않고 돌았다.


  선배들은 그러고도 무섭고 근엄한 표정으로 또 밤늦게까지 평가회의를 진행했고, 그러고 나서는 또 뒤풀이였다. (훗날 선배가 되고 간부가 돼서 안 거지만, 후배들의 진솔한 평가를 듣기 위해 뒤풀이를 '사수'하는 기풍이 운동권들한테 있었다. 딱히 운동권이 아니었던 학과 선배들은 본인들을 농활로 조직했던 선배들한테 그런 형식만 배워서 답습한 것이었을 테다. 술의 힘을 빌려야만 후배들 평가를 들을 수 있단 건 문제라는 공감대가 생기며 이런 기풍은 점차 사라져 갔다.) 도대체 저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난 농활, 두 번은 못 오겠구나. 나약했던 나는 힘들어서 못 하겠다고, 다음번에는 안 온다고 스스로에게 되뇌고 있었다.

  



  그런데 또 가게 된 것이다. 기말고사 기간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하다 학과 연사 선배의 전화를 받았다. 이미 봄 농활에 제대로 데인 동기들은 여름농활은 못 가겠다고들 입을 모았고, 농활 참가자는 봄에 비해 반의 반토막이 나 버린 상황. 소수 정예로 가면 더 즐거울 거라는 이야기와, 여름 농활이 봄보다는 덜 힘들다는 선배의 설득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마음 약한 데다가 과생활에 진심이었던 나는 나도 모르게 "예, 가겠습니다."라고 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렇게 장장 7박 8일짜리 여름 농활 버스를 타고 말았다. 아차,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런데 그렇게 내려 간 농활이 생각보다 괜찮았다. 농활은 그 지역과 단위 간의 연대를 위해 몇 년간 같은 마을로 계속 내려가는 것이 일반적인 원칙이다. 그래서 똑같은 동네, 똑같은 마을회관으로 같은 어르신들을 뵈러 가는 것이다. 이미 익숙해진 동네와 환경 덕일까? 확실히 모든 게 힘들고 어렵던 봄보다 좀 편안하게 할 수 있었고, 선배들도 두 번째 농활을 온 새내기들에게 융통성 있게 좀 풀어주는 듯했다. 긴 농활기간 덕에 우리는 중간에 하루 일을 쉬고 단위 대항 체육대회도 열었는데, 마을 이장님과 2인 3각 달리기를 하기도 했고 각 단위에서 준비해 온 먹을거리를 나누어 먹으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기도 했다. 이 힘든 걸 몇 년째 내리 오는 선배들,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그랬던  농활 기간 중에 내 생일이 겹쳤다. 전날 과 농활대원들이 모여 다 같이 작업을 하던 중에 내 생일 이야기가 나왔다. 생일이 농활 중에 돌아오는 것을 알던 선배 동기들과 내일 생일이네 어쩌네 그런 이야기를 지나가듯 한 것이다. 그런데 그걸 같이 작업하던 우리 마을 이장님이 들으신 것이다. 말없이 같이 일 하시며 그걸 귀담아들으셨더라. 내색을 안 하셔서 모르시는 줄 알았다. 훗날 듣기로는 새내기가 생일도 포기하고 농활 내려온 게 기특해서 눈에 더 들어오셨다고.


  그렇게 농활에서 맞는 생일날이 되었다. 막걸리 숙취에 비몽사몽 한 상태로 맞은 새벽이었지만 다들 내 생일 축하 인사를 건네 왔다. 농활에 가면 기본적으로 삼시 세끼 모두 우리가 준비하는 것이 원칙이기에, 부엌에서는 아침밥 당번들이 아침식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그때 회관 미닫이 문이 드르륵 열렸다.


"오늘 00이 생일이라고 했지? 여기서 생일인데 미역국은 먹여야지. 물만 부어서 끓이면 되니까 아침 먹을 때 같이 해서 나눠들 먹어."


  아버님 손에 들린 큰 냄비엔 큼지막한 소고기가 송송 들어간 미역국이 들어있었다. 마음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었다. 미역국은 정말 맛있었고, 그 미역국에 마음을 뺏긴 나는 결국 '프로 농활러'가 되었다. 나는 그다음 해 우리 과 연사가 되었다.




  철마다 가는 농활이니 나는 이듬해부터 거의 매년 생일을 농활에서 맞았다. 내 20대 생일 대부분은 그래서 내가 농활을 다니던 충청남도 논산에서 맞았다. 어느 해에는 수박으로, 어느 해에는 케이크로 내 생일을 챙겨주셨다. 연차가 좀 차고 학생회 간부가 되어 농민회 간부님들과도 안면을 트자 어느 해에는 학교 농활대 전체 해단식에서 사회를 보던 시 농민회 총무님이 내 생일을 축하해 주셨다. 나는 그 해단식 자리에서 '생일 기념' 연대발언을 했다. 때때로 농민회가 서울로 상경해 집회를 하는 날이면 나는 학교 대오를 빠져나와 농민회 깃발을 찾았고,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 인사를 드렸다.


  해마다 학과 농활 설명회 날이 되면 나는 그래서 새내기들에게 내 미역국 얘기를 들려주곤 했다. 나도 학과 연사 출신인 데다가 단과대에서 농활 실무를 보는 간부였었기도 하니 해마다 초대를 받는 입장이었다. 아마도 매해 연사들은 내 미역국 이야기+a를 맛깔나게 풀어, 후배들을 농활에 조직하는데 도움을 좀 받고 싶은 속내가 없잖아 있었을 것이다. 나도 단과대 간부로 마찬가지 입장이니 최대한 협조(?)하곤 했다.


  하여간 그렇게 농활 일 보는 직책, 학과 연대사업부장이 되어 학생회 간부로 첫 발을 디뎠다. 그러다가 단과대 농활추진위원회에서 단과대/총학생회 운동권 선배들 만나 이듬해 단과대 학생회장이 되고, 또 운동권이 되었으니 농활이 큰 몫을 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때 그 미역국 한 그릇이 내 대학생활, 아니 젊은 날 내 삶을 참 많이 바꿔놓았단 것도 그렇고 말이다.


2022. 01. 11.


사진 출처: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yonseiblog&logNo=220724297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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