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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우 Jan 07. 2022

 회의를 보이콧당했다.

알면서도 당해주는 게 일상이었던 내 대학시절.

  한참 학교 활동 왕성하던 시절, 주변에 말 못 하고 덮어놨던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내본다. 누군가의 허물을 들추는 격은 아닐까 걱정스러운데, 혹시 우연히라도 '이거 내가 아는 그 사람 이야긴가.' 싶으신 분들은 그냥 조용히 읽고 넘어가 주시길. 이왕 글을 시작한 거, 그간 하지 못했던 숨겨둔 이야기들을 앞으로도 글로는 그냥 자유롭게 풀어내고 싶다. 사실 뭐, 내가 내 얘기 못할 건 뭐 있나 싶지만.


단과대 회장 출마 결의로 학과와 척을 진 후보자


  난 단과대 학생회장이 되었을 때, 우리 학과와 사이가 안 좋았다. 나는 2학년 말 즈음, 다음 해 학과 학생회장과 단과대 학생회장 후보 제안을 둘 다 받았다. 내가 대단히 잘 나서라기보단, 할 사람이 없는데 내가 적당한 상황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그때 내가 학과 학생회장을 했다면 20대가 많이 달라졌을 테지만, 단과대를 선택하는 바람에 어렵고 험난한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거기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일전에 지적했던 당시의 수직적 학과 문화에 지친 것도 있었다. 물론 그걸 바꾸려면 되려 학과 안으로 들어가야 했을 테다. 하지만 그때 난 아직 "활동가"라고 부르기엔 그냥 운동권 꿈나무였고, 그런 결심까지 하긴 어려웠다.(나중엔 그 결심을 했다. 덕분에 임기 1년을 '다시 우리 과 사람이 되는' 시간으로 썼다.) 거기에 함께 학과 집행부를 했던 동기들 대다수가 하나 둘 사라져 버렸고, 나는 혼자 과한 책임감에 너무 많은 책임을 지게 되어 지쳐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가장 열심히 일한 집행부였던 내게 선배들은 무척이나 박했다. 어느 날인가 나는 농활 출발을 앞두고 새내기들과 함께 단과대 복도에서 농활에 가져가 걸 '손플랑'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선배가 학과 농활 사업의 책임자인 내가 '너무 운동권스럽게' 농활을 추진한다며 복도에서 날 불러내 소리를 지르고 욕하며 화를 냈다.(오래된 기억이지만, 그는 아마도 그런 운동권 문화의 유산들을 혐오했던 것 같다.) 후에 상황을 해결하고 그의 농활 참가 의사를 묻기 위해 전화를 걸었지만,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는 그 선배의 태도를 참아내야 했다. 그때 나도 오류가 있었겠지만 그런 방식은 옳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다. 언젠가 학과 행사 뒤풀이에 예정보다 사람이 많이 와 자리가 부족한 상황이 생겼다. 그 상황을 지켜보던 어떤 두 학번 위의 선배는 날 주점 앞으로 불러내 길거리에서 내 뺨을 때렸다. 지금이야 거의 학교를 못 다니게 될 만한 일이었지만 그땐 그런 게 되던 시절이었다. 나중에 선배들의 중재로 그는 사석에서 내게 사과하긴 했지만, 이런 경험들이 축적되자 학과에 구태여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때 많은 선배들은 내게 "학과 사업에 대한 중요성과 책임감" 따위를 대단한 철학처럼 술자리에서 역설했고, 정작 내가 도움을 청하자 대부분은 자기 길을 갔다. 나는 미숙했고 서툴렀는데, 어리고 순진하기까지 해 "학생자치의 중요성" 어쩌고저쩌고 떠들며 그래도 열심히 했다.




  그렇게 지쳐 나가떨어질 때쯤 단과대 학생회와 총학생회 선배들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원래부터 "꿘" 성향이 다분했던 나는 집회나 행사에도 열심히 알아서 결합했다. 그러니 그들과 함께 선거를 준비하게 된 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후에 들으니 선배들은 날 설득해 과로 출마시킬지, 단과대로 출마시킬지 고민했다고 한다. 근데 내가 워낙 지쳐있었고, 과로 선거를 내보내면 도망갈 것 같았다고.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단과대 회장 후보가 되었다. 그때 우리 과 학생회장이었던 형은 "지금은 보내줄 테니, 꼭 과로 자주 돌아왔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며 날 보냈다. 당시에는 유일하게 날 응원하던 우리 과 사람이었다. 그와는 아직도 간간히 연락하는 사이다.


  여튼 덕분에 우리 과 선거는 후보자가 없어 연기가 되었고, 나보다 세 학번 위의 선배를 구원투수로 섭외해 부랴부랴 선본을 꾸렸다.(나는 다른 건 몰라도 그 선배의 결심만큼은 존경한다. 어쨌든 이제 와서 생각하면 난 학과 대표자를 '안'한 게 아니라, '못'한 것이고, 그는 해낸 것이다.) 역으로 나는 학과 학생회장 출신이 아닌 (당시로선) 최연소 단과대 회장 후보란 타이틀을 얻었다. 우여곡절 끝에 선거는 마쳤지만, 나는 학과를 배신한 역적이 되어 있었다. 그때부터 험난한 가시밭길은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다. 나는 대표자 1년을 오롯이 내 학과를 다시 개척하는 데 써야 했고, 이듬해 단과대 집행위원장이 되어서야 학과에서 뭘 할 수 있었다. 대표자 하던 해에는 솔직히, 학과 자리에 가서 앉는 것만으로도 가시방석이었던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임기를 시작하고 다녀온 새터에서 '총명탕 사건'이 터졌고, 우리는 자숙이 필요했다. 그런 상황에서 4월을 맞았다. 4월 초에 '해오름제'란 행사가 돌아오는데, 그건 일종의 단과대 학생회 출범식이었다. 그 행사를 하면 우리는 캠퍼스 노상에 가설무대를 꾸리고 행사를 한 뒤, 그 자리에서 막걸리를 나누어 마시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런데 학교의 여론과 분위기는 좋지 않았고, 우리는 총명탕 사건의 여파로 위축되어 있었다. 그래서 기획을 수정할 것을 제안할 수밖에 없었다.


  "소속 단위 간부들 대부분 행사는 하고 싶으실 테니, 실내에서 하자. 가뜩이나 행사할 때마다 협조공문을 보내고 양해문을 써 붙여도 소음문제에 대한 학내 반발 여론이 심각하다." 그게 우리의 제안이었다. 그러 단과대 운영위원회 반응은 전반적으로 냉담했다. 그대로 강행할 수도 없는 노릇. 하지만 문제의식 자체에는 단운위도 어느 정도 공감대가 있었다. 해서 결정된 것이 1학년 대표/부대표로 구성된 행사 추진위원회에서 결정되는 대로 따르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일단락이 되었다.




후배의 늦잠이 단과대 학생 대표자 회의를 파행시켰다.


  서로 다른 네 개 학과의 학년 대표를 모아 회의를 하려니 맞는 회의시간은 1주일에 딱 몇 시간으로 좁혀졌다. 그중 하나를 택해 어렵게 회의를 열었다. 맞는 시간을 어렵게 찾다 보니 하필 아주 바쁜 날이었다. 단과대 학생 대표자 회의(단학대회)라고 부르는 학기에 한 번 하는 가장 크고 중요한 대의기구를 소집하는 날 낮이었을 거다. 그런데 총 8명이어야 할 배석자 중 유일하게 한 명이 연락도 없이 오지 않았다. 그게 우리 과 1학년 부대표였다. 나중에 들어보니 늦잠을 잤다고.


  그래서 우리 과만 의견을 정리하지 못했고, 나머지 세 개 학과의 의견이 정리되었는데 모두 하나같이 "실내에서 해도 괜찮다."였다. 이미 과반수를 넘겼지만, 토론은 거쳐야 했다. 대체적인 의견은 실내로 모였다는 것으로 알고, 한 번 더 토론 뒤에 결정하자고 정리하고 회의를 마무리했다. 그게 그날 낮의 이야기였다.


  저녁이 되고 단학대회가 소집되었다. 당시 800명 규모 단과대였는데, 대의원만 30여 명에 이르는 회의. 나름 열심히 준비했고, 순조롭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주요 안건이 큰 문제없이 대부분 인준되고, 어느덧 회의 끝에 기타 안건 및 질의응답 시간이 되었다. 그때 우리 과 학생회장 형이 비표를 들고 발언권을 얻었다.


"00학과 학생회장입니다. 해오름제 진행과 관련하여 논의를 진행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정리가 되었습니까?"


"오늘 회의를 진행했고, 전반적인 의견은 일단 실내로 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는데 추가로 논의를 해 보고 확정 지을 예정입니다."


"우리 과는 실내에서 하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왜 제대로 된 토론도 안 하고 결정합니까?"


"아닙니다. 아직 확정된 것이 아니고 오늘 회의가..."


"이렇게 우리 과 의견만 무시하면 저도 더 이상 00대 일정에 협조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벙찐 같은 과 나머지 대의원들은, 오전의 회의에 참석했던 1학년 대표만 제외하고 쭈뼛거리다가 그를 따라(혹은 그를 말리려) 나가버렸다. 아마 1학년 대표가 남아있었던 건 그가 전후 사정을 아는 것뿐 아니라, 그가 내 친했던 고등학교 후배였기 때문인 것도 있을 것이다. 회의는 정회됐고, 결국 그들이 돌아오지 않자 다시 속개하고 산회를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황당했다. 임기 초 기선제압을 위한 계산된 행동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급한 성격의 그가 얘기를 들어보지 않고 한 오해인지, 그와 완전히 화해한 지금까지도 물어보지 못했다. 덕분에 추진위원회를 다시 소집했고, 상황을 지켜봤던 (대의원이기도 한) 1학년 대표들은 결정을 바꾸어 옥외 개최하는 것으로 하자고 했다.


  문제를 삼으려면 삼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전후 사정을 써 대자보라도 붙이면 명백하게 여론이 정리될 만한 사안이었다. 임기 초부터 사과문에 이어 초유의 '회의 보이콧'까지 당했으니 시작부터 레임덕을 맞을 형국이었다. 비권과 운동권 대립이 심했던 시절에도 아마 이런 일은 우리 단과대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겨우 행사장소 문제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 그런데 나는 이걸 문제 삼지 못했다.


  이제 막 학과 생활을 시작하는 그때 그 새내기 부대표. 그 아이가 얼마나 무안해질지 고민했다. 내 출신 학과와 싸우는 단과대 회장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까지로도 충분했다. 그래서 그냥 지기로 했다. 미안하다고도 했고, 다시 이야기하자고도 했다. 하여간 나는 그렇게 알고도 당해 주기로 했다. 대신 우리는 해오름제 행사를 잘했다. 말아먹은 새터와 대조적으로 해오름제는 성황리에 끝났다.




  학교생활을 하며 이렇게 "당해주는" 건 이게 시작이었다. 수도 없이 많은 일을 알면서도 그냥 당했다. 나중에 나중에 그게 너무 많이 쌓여 아프고 힘들 때가 돼서야, 친한 후배 몇에게 술을 먹으며 찔금 찔금 풀어낸 게 다다. 솔직히 나도 학교에 있을 때 오류가 많았다. 그래서 학우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 일, 사과해야 할 일도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사과받을 일들이 제법 많았다. 한참 학생회 활동에 신나 있을 때 나는 내가 너른 품을 가졌다고 착각하며 자아도취되어 '내가 이렇게 멋진 활동가라니까' 식의 뽕에 스스로 젖어있었다. 그러다 지치고 나가떨어질 때쯤 되자 "조금 더 솔직하고 이기적으로 해도 됐었을 텐데, 내가 왜 이렇게 바보짓을 하고 살았나."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뭐 얼마나 크고 대단한 사건인가. 대학생들 모여서 조그맣게 공연하고 술 먹는 행사 어디서 할지를 놓고 벌인 아주 작은 논의에 관한 문제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사건 하나하나가 엄청 크게 느껴졌고, 이런 일들이 반복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 자꾸 생채기가 났다.


  아직도 어떤 이들은 그때의 내가 멍청하고 바보 같아서 당하고 속은 것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사건들에 나는 알면서도 당해줬고, 맞설 방법을 알면서도 대응하지 않았다. 내가 책임져야 할 현장과 학우들이라는 그야말로 아주 관념적인 생각 때문에. 운동을 그만둔 지금에서는, 어디서 뭘 하고 살아도 다시는 그렇게 바보처럼 당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더 크게 든다. 제대로 데여보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평범한 인간인지 스스로 솔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사진 출처: https://cauculture.net/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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