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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우 Nov 03. 2022

사고와 참사 사이

애도를 혐오할 자유가 아니라, 사고를 참사라고 부를 자유가 필요하다.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이었다. 그러니 국어사전에 따르면 지난 주말의 비극은 사고가 맞다. 그것은 비참하고 끔찍한 일이었으니 참사인 것도 맞다. 무미건조하게 배열된 사전 속 단어들로는 차마 다 담아내지 못할 '어떤 일'을 두고 그야말로 "때 아닌" 명칭 논란이라니.


  사고 후 며칠간 신문 보기가 싫었고 뉴스를 보기 두려웠다. 나는 대학에 입학한 첫 해 4월에 세월호 참사를 겪었다. 나는 그 배에 있지도 않았고 진도나 제주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며 안산 주민도 아니었지만, 우리 모두가 그랬듯 그 사건을 함께 겪었다. 그날의 사건은 8년이나 이어지고 있는 내 대학생활과, 삶의 태도와, 가치관과 인식을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그 비극의 기억을 다시 마주하는 것만 같아서, 그날의 감정이 자꾸 되살아오는 것만 같아서 솔직히 외면하고 싶었다. 그냥 없는 일처럼 살고 싶었다.


   그런 나를 꾸짖듯 주변은 내게 자꾸 내게 그 사건을 물었다. 교수님들은 메시지로 나의 안부를 물었고, 이번 주 강의들은 모두 교수님들의 비통함으로 시작되었다. 우리 학교 학생 셋이 허망하게 세상을 등졌고 학교에는 분향소가 차려졌다. 몇 해 전만 해도 늘 함께하던 어떤 선배는 기자가 되어, 내부 기고를 통해 결혼을 앞둔 동문을 애도했다.


  내가 그래서 더 이상은 외면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자 또 다른 참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8년 전과 무엇이 달라졌는가. 번복된 구조신호에도 출동조차 하지 않은 경찰. 유족의 지원을 놓고 벌어지는 온갖 혐오. 이제 정부는 그 와중에 이것이 사고인가 참사인가를 두고 여론과 다투고 있다. 이것이 이 비극의 참상 속에서 현수막을 바꿔 다는 행정력까지 동원하며 바로잡을 정도의 일이란 말인가. 참사로 불리는 것을 그렇게까지 두려워하는 그 속내를 나는 납득키가 어렵다. 지금 두려워해야 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닌가.


  학내 커뮤니티와 뉴스 댓글창은 반지성주의를 내놓고 자랑하는 잔칫상이 되었다. 어떤 이는 "추모를 혐오할 자유를 달라"는 기괴망측한 댓글을 다는가 하면, 언론과 시민단체 같은 '선동꾼'들이 이것을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시키려 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치기 어린 젊음이 낳은 사고에 국가 세금 지원이 웬 말이냐는 언동이 추천을 받는 모습을 보며 이것이 대학인가, 이것이 인간인가 하는 비통함마저 느낀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 정치와 비정치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우리가 공적 영역에서 일어난 비극에 함께 애도하려는 시도조차 "내가 싫다"는 이유로 비난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정당한 것인가. 사회적인 재난으로 죽고 다친 이들, 그 가족과 2차, 3차의 피해를 입은 이들을 위해 공적 재원을 사용하는 것이 이토록 저주스럽고 혐오스러운 일이라면, 국가와 공동체는 그 존립의 이유가 무엇인가. 남은 이들의 치유를 위해, 또 앞으로 세상을 살아갈 이들이 다시 이런 비극을 마주하지 않게 하기 위해 책임을 묻는 것이 그토록 의도를 추궁당해야 하는 일인가. 각자도생의 삶, 국가와 공동체의 존재 이유의 부정을 주장하는 목소리인가. 죽음 앞에 논리조차 궁색한 이성의 잣대를 자랑하고, 사회적 공감보다는 개인의 희망사항을 이야기하는 것이 지성과 합리로 포장되는 작금의 상황이야말로 또 다른 재난의 한 단면처럼 보였다.


  언제까지 상처 입히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 가짜 이성을 앞세워 배움의 부족함을 자랑하지 말라. 오만하게 가르치려 든다고 비난해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은 배움의 부족함이다. 반박과 비판은 인정할 수 있지만 혐오는, 아픈 이들에 대한 공격은 도무지 인정할 수가 없다. 당신들이 주장하는 '정치적'이라는 단어의 뜻이 "겉과는 다른 속의 못된 꿍꿍이로, 특정한 주장을 펴고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의 뜻이라면 당신들이야말로' 정치적'이다. 함께 사는 사람들의 감정을 고민하지 않는 것이 '이성'이 아니며, 치유와 위로를 위한 사회적 공감을 배격하는 것은 '합리'도 '지성'도 아니다. 참을 수 없는 그 무식을 이제 제발 그만들 드러내시라.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교수님이 있다. 강의에 대한 열정과 제자들에 대한 애정이 크신 분처럼 보였지만, 학자로서의 냉철한 이성이 늘 앞선 분이었다. 그래서 그분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교수님은 지난 화요일 수업 시작에서 출석을 부르시고는, "너무나 반갑습니다. 가슴 떨리게 반갑습니다."라고 하셨다. 언론을 가르치는 교수님이신데도, 여러분들 생각에 일요일 내내 뉴스를 보지 못했다고 하셨다. 많이 가라앉았다고 생각했는데도, 학교에 오고 당신들을 보니 다시 감정이 일어나는 것 같다고 하셨다. 그날 수업의 내용보다, 내겐 교수님의 이 짧은 안부인사가 더 큰 가르침이었다. 어떤 안부인사가 우리 서로에게 위로가 되듯, 이 끔찍한 사고를 참사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여야 참사를 함께 겪은 우리가 서로를 위로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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