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로 마음을 바로 세우다.
검을 처음 잡았을 때
나는 강해지고 싶었다.
세상을 향해 한 발 더 나아가고 싶었고,
나를 무시하던 것들 앞에 서고 싶었다.
칼은 그 욕망을 가장 단순한 형태로 쥐여주는 물건처럼 보였다.
검도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상대를 먼저 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일이다.
칼 끝이 부딪히는 순간보다
그 이전의 정적이 더 깊고 더 무겁다.
죽도를 마주하고 있는 순간에도
호흡은 고요히 흐른다.
두 발은 마룻바닥에 굳건히 버티고 있지만 내면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조급해진 마음은 발을 먼저 내밀게 한다.
발이 먼저 나가면 칼은 늦고
그 늦음은 곧 패배가 된다.
검도에서 최고의 경지는 후발선지다.
상대의 움직임을 본 후, 늦게 출발한 칼이
상대에게 먼저 닿는 것이다.
삶에서도 나는 자주 한 발 먼저 나갔다.
결과를 앞당기려 했고, 인정받고 싶어 서둘렀다.
그때마다 관계는 어긋났고, 마음은 더 거칠어졌다.
검도는 속도를 늦추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때를 기다리라고 가르쳤다.
검은 거울이다.
검을 들면 숨길 수 있는 것이 없다.
화가 난 날의 칼은 거칠고,
불안한 날의 칼은 무겁다.
몸 상태보다 마음의 상태가
먼저 칼 끝에 드러난다.
검은 가장 정직한 거울이다.
오늘의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무말 없이 보여준다.
그래서 검도장은 나에게
몸을 단련 시키는 곳이자, 마음을 수련하는 도장이다.
싸우지 않는 힘,
수련이 깊어질수록
이기고 싶은 마음은 옅어진다.
대신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남는다.
진짜 강함은 언제 칼을 써야 하는지가 아니라,
언제 칼을 쓰지 않아야 하는지를 아는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된다.
나는 지금 칼을 들어도 되는 사람인가?
인생에서 가장 먼저 다듬어야 할 무기는
기술도 성과도 아니다.
마음이다.
칼을 들기 전에 마음을 바로 세우는 사람은
이미 절반은 싸우지 않고 이긴 셈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이기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남을 이겨야 진짜 강한게 아니었다.
실수를 인정하고,
패배 속에서 배우며,
나를 이기는 사람한테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진짜 강하다는 것을.
힘이 있어도 함부로 쓰지 않고
상대가 약하다고 해서 무자비하게 칼을 휘두르지 않으며
강한 상대를 만났다고 물러서지 않는 것임을.
반대로,
남한테 강함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과
자신의 나약함을 들킬까봐 두려워 하는 마음이
바로 약한 사람이라는 증거라는 것을
검도수련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체급도 없고 남.녀 구별도 없는 검도대련을 대련을 할 때마다
나보다 강한 사람을 너무나 많이 상대해 왔었다.
키가 크고 덩치가 큰 남자를 만나서 두려운 마음이 생길 때는 그 마음을 알아챘다.
고수를 만났을 때는 주눅들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공격을 시도했다.
머리를 치다가 손목이나 허리를 맞으면 어떡하나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과감하게 나아갔다.
상대의 현란한 칼놀림에 의연하려고 했고 승패에 마음을 뺏기지 않으려 노력했다.
어느 순간,
나는 남을 이기기 위한 검도를 하고 있지 않았다.
검도는 남을 이기기 위한 방편이 아니었다.
검은 다른 사람을 베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
내 안의 나약함을 베는 칼이었다.
강함이란
상대를 이기는데 있지 않고,
나 자신을 다스리는 데 있었다.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단단해진 나를
발견하는 것이 내가 검도를 하는 목적이 되었다.
이기려 애쓰지 않고
지지 않으려 두려워 하지 않는 마음.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어도
자신을 잃는다면 약한 것이고,
물러설 수 있어도 자신을 지킨다면 강한 것이다.
결국 강함이란,
특별한 순간의 폭발이 아니라,
평범한 순간을 무너지지 않고 살아내는 힘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진짜 강해지기 전에 나는 강한 척을 했었다.
항상 이기고 싶었고, 이겨야 했다.
진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지는 것이 아무렇지 않았다.
이길수도 있었고 질 수도 있었다.
이긴다는 것이 큰 의미가 없었다.
다만, 그 순간만이 존재하고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검을 들고 상대를 마주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
상대도 없고. 나도 없었다.
오직.
검(劍)이 검(劍)과 만나고 있었다.
검은 나의 또다른 이름이었다.
나의 몸이 검이 되고 나의 마음이 검이 되었다.
검을 바로 세우고 바르게 휘두르는 것은
곧 내 몸과 마음을 바로 세우는 일이었다.
검이 곧 나였으므로.